이드 2부 – 278화
715화
파르르.
작게 히죽거리는 라울의 말에, 그들의 발아래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은색 털이 몸을 떨었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뚫고 자란 털은 아기 고양이의 솜털보다 작고 가늘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울과 발터가 이야기할 때마다 전해지는 공기의 진동으로 몸을 떠는 은색 털끝에는, 이드의 요청에 따라 도청하고 있는 라미아가 있었다.
[강기 옷?]
그녀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단절된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 장의 깃털을 나노 굵기로 형성해 파티장의 바닥을 뚫어 접근한 것이다. 물론 이드의 정신력을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크기가 얼마든 모두 그녀의 신체 일부였기 때문에 가능한 도청 방법이었다. 나노 굵기의 실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감지할 수 있을까. 사실상 방어 불가능의 도청 방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도한 도청으로 들은 라울의 말에 라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희미해진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오를 듯 말 듯 했기 때문이다.
라미아는 이어지는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자네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킨 건가? 그것도 강기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냐는 이상한 질문을.”
발터는 질문의 내용보다 라울에게 심부름 따위를 시키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했다.
“탑에 사는 섹시한 레이디께서 부탁하더군. 여기 오기 전에 들렀다 왔거든.”
“검후의 질문이란 말이군.”
발터는 라울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그가 섹시하다고 평가하는 여성은 최근 그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네는 검후를 보고 잘도 섹시한 레이디라는 말이 나오나 보군. 백 세가 넘은 노파에게 말이야.”
검후를 섹시하다고 말하는 라울의 취향에 발터가 거부감을 보였지만, 라울은 그래도 좋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수백 년을 사는 엘프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이제 백 살이 넘은 검후는 젊은 거지.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몸을 수식할 말은 섹시하단 단어 외에 없다고. 거기다 입고 있는 옷도 얼마나 화끈한데. 아, 자넨 그 모습은 못 봐서 모르겠군.”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대신 물어보진 않았군?”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굳이 흔적을 남길 필요가 없으니까.”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는 모습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칸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주의하시는 것이…………….”
윗사람에게 권고하는 것이 건방지게 보일까 우려하는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칸의 걱정과 달리 라울도 발터도 그런 사소한 일에 화를 내거나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라울이 피식 웃으며 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좋아. 일 열심히 한다. 그런데 이번엔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런 대비는 미리미리 다 해 놨지. 지금도 이 파티장에서 날 보고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물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일이 워낙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 끼어들었습니다.”
“괜찮아. 잘한 일이라니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라. 아무도 못 들으니까.”
라울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라울도 자신의 발밑에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얇은 은색 털이 뾰족하게 솟아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듣고 있다, 이 자식들아!]
라미아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래 봐야 찻잎 같은 작은 부리가 삐뚤빼뚤거리는 모양이라 귀엽기만 했지만.
검후가 거론되는 순간 희미한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오래전 이드가 황궁에 잠시 머물 때 어린 검후가 장난처럼 이드의 옷을 숨기고, 이드가 옷 대신 강기를 두른 적이 있었다. 희미하던 기억이 설마 그때의 것일 줄이야. 오래전 일이고, 잠시 웃어넘긴 사소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 당연했다.
설마 이드를 상대로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 주의했는데, 이런 엄청난 정보가 튀어나올 줄이야. 검후에 대해서 뭐 하나 시원하게 알아낸 것이 없었는데, 뜻밖의 곳에서 단서를 잡은 것이다.
라미아는 그때부터 라울뿐 아니라, 발터와 칸의 얼굴도 똑똑히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당장 그 사실을 이드에게 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당장 저 세 놈을 잡아 주리를 틀어 검후의 행방을 알아내고 싶지만, 황제와 수많은 귀족 앞에서 날뛸 수는 없었다. ‘그래, 저놈들이란 말이지.’
그리고 이드도 그녀의 생각에는 동감이었다.
[어떻게 해요?]
‘당장 움직일 수는 없지. 황제가 이 일에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잖아.’
만약 황제도 관여되어 있는 일이라면 곤란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하려다 자칫 제국 전체의 적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제국에 딱히 미련은 없지만, 잘못하면 검후의 목숨도 어떻게 될지 몰라.’
그리고 일이 더 커졌다가는 시온 숲까지 위험할 수가 있었다. 난공불락의 금지로 여겨지지만, 제국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엘프 마을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저들을 그냥 두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이놈들을 어쩐다.’
가장 악질적인 범인 중 하나로 꼽히는 납치범을 앞에 둔 이드의 눈이 차갑게 번뜩거렸다.
하지만 이런 이드의 분위기를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드와 라미아의 대화를 알지 못하고, 그 앞에 패배를 인정한 엘론드가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할 순간에, 굳은 표정으로 엘론드를 싸늘히 바라보고 있으니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묘한 열기를 띄었다. 이드에 의해 바닥을 뒹굴던 엘론드의 모습에 사람들의 가학성이 자극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당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흥미진진하다는 감정을 이끌어 내었다.
“후작님, 승자로서 패자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시겠습니까?”
황녀가 잠시 기다린 후 물었다. 이 또한 심판의 역할이다.
“무슨 요구 말입니까?”
막 머릿속에서 라울과 발터들을 저택 지하에 매달아 고문하는 상상을 하던 이드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승리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말하는 거랍니다.”
이드는 그제야 자신을 불안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는 엘론드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황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았다.
“승자의 요구는 결투 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한 것은 대련입니다만?”
“하지만 엘론드 경은 대련으로 얻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이는 순수한 대련이라기보다는 목적이 우선인 결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축하를 위한 파티의 분위기를 흐리고, 상급 기사가 제국의 명예 후작께 무례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한 처벌은 있어야 합니다. 승자의 요구는 그러한 의미도 있습니다.”
황녀는 아주 똑 부러지게 단정 지어 말했다.
이드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엘론드는, 황녀의 발언에 간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고 식은땀을 흘렸다. 당장에라도 용서를 빌고 싶었지만, 황녀의 단호한 눈빛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무례에 대해 감히 후작님께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그에 목표를 이드로 바꾼 엘론드가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놈도 보통은 아니야. 눈치 없이 날뛸 때는 언제고 이제는 선처를 바라다니.’
이드는 엉망진창인 엘론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우선 그 얼굴부터 치워 주게. 그런 눈빛도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 효과가 있지. 그렇게 굴면 그 얼굴을 뭉개 버리라는 요구를 하고 싶어질지도 몰라.”
“옙!”
이드의 콧등에 생긴 주름을 본 엘론드가 바짝 엎드렸다. 그 모습을 바라본 이드는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 폐하, 엘론드 경을 제 뜻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비록 못난 모습을 보였지만 엘론드는 엄연히 황제의 명을 따르는 기사였다. 그것도 뛰어난 실력으로 상급 기사에 오른 자. 그런 자를 황제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할 수는 없다.
“심판이 말하지 않았는가. 심판이 결정했다면 거기에 따라야겠지.”
황제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엘론드는 이드를 위한 제물이었으니까. 특히 그는 황녀의 판단이 마음에 드는지, 호탕한 목소리로 심판의 결정을 지지하는 말을 더했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이드는 감사를 표하고 엘론드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에게 어떤 것을 요구할지 고민한 이드는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승자로서 엘론드 경에게 일 년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말고, 아무런 말도 하지 말 것을 요구하오. 이것은 그대가 헛소문을 믿고 억지 주장을 펼친 것에 대한 벌이오.”
각오하던 것보다 가벼운 처벌에 또또록 눈을 굴린 엘론드는 슬며시 긴장을 풀었다.
“후작님의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무례에 대해서는 반드시 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생각한 엘론드의 목소리가 한 톤 정도 올라갔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같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내심 이드가 얼마나 심한 요구를 할까 기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진 황녀의 말에 엘론드와 사람들은 이드의 요구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현명한 요구이며, 적절한 처벌이 되겠군요. 황실 마법사는 즉시 시행하세요.”
이드의 요구를 감명 깊게 들은 황녀가 그 자리에서 마법사를 불렀다.
마법사는 엘론드의 귀에 석화 마법을 걸어 듣지 못하게 했고, 입에는 사일런스 마법을 걸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저 듣지 못한 척하고 입을 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상급 기사로 예민하던 감각이 굳어 버리자 균형이 흐트러진 엘론드는 급히 바닥을 짚어야 했고, 그 모습을 보며 반사적으로 다가온 엘코란을
보고는 입만 벙긋거렸다.
이드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귀에는 사람이 균형을 잡는 데 중요한 기관이 있소. 마비로 그것까지 굳어 버렸으니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또한 말이라는 것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겠지. 뭐, 이렇게 말해도 결국 듣지 못하겠지만 말이오.”
이드의 말을 증명하듯 엘론드는 휘청거리며 엘코란을 잡고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호오!”
새로운 사실과 효과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동시에 승자의 요구를 마법으로 강제한 황녀의 결정을 칭찬했다. 바로 직전에 이드의 요구를 듣고 따르겠다고 한 엘론드가 말을 하려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밀리아리아 황녀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오.”
“그렇구려. 엘론드 경의 성질이 가벼운지 어찌 아시고 저리 꼼꼼히 처리해 놓으시는지.”
“이제 대련도 끝났으니, 후작과 인사나 해야겠소이다.”
“아, 그럼 나도.”
눈치 빠른 누군가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이드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엘론드가 나서기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드에게 다가갔다. 대신 대련 전보다 조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론드의 무례에 크게 분노하지 않는 듯하면서 큰 망신을 주는 모습에, 이드를 대함에 있어 주의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엘코란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가는 엘론드의 모습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자네가 꾸민 대로 잘 풀린 것 같은가?”
그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황제가 레오날도 후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 심려를 끼칠 일은 없을 듯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후작의 상대로 엘론드 경은 너무 약해 보였어. 매우 무례하기에 후작이 좀 거칠게 다룰까 기대했더니 그렇지도 않고 말이야.”
평생을 따라다닐 망신을 당했는데도 황제는 성에 차지 않아 했다.
“심려치 마소서. 황색 갈기 기사단의 상급 기사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황제의 명을 따르는 황색 갈기 기사단은 권력과 비리로 직급을 올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상급 기사에 올랐다면 그 실력에 거짓이
없다고 봐야 했다.
‘눈이 어둡지 않은 자들은 상급 기사를 그렇게 어리석은 바보로 보이도록 만든 명예 후작의 능력에 감탄하겠지.’
이미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대련 중에 확인한 레오날도 후작이었다.
“그리고 후작이 마지막에 보였던 강기의 검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무런 매개물도 없이 순수하게 내공만으로 검을 만들었지. 대단했어.”
“그렇습니다. 그걸 보고도 의심하는 자라면 구제할 방법이 없는 멍청이지요. 초인력으로 강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는 물러나는 엘론드의 뒤통수를 보다 말했다.
“그럼, 일도 잘 풀렸으니 엘론드 경에게도 상을 주어야지. 후작이 처리하게.”
“가장 활약하기 좋은 국경으로 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심한 말투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를 확인한 레오날도 후작이 황제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치켜 올라갔던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