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90화
727화
푸화아아악!
검에서 붉은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양이 꼭 수천의 꽃잎을 압축시켰다 한 방에 터트린 것 같다.
백화난무는 난화십이식의 정화이며, 가장 많은 적을 처리할 수 있는 초식이다.
“으아아악!”
태풍처럼 몰아치는 강기에 삼 열의 초인들이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항거 불능의 힘에 초인기로 몸을 지키거나 도망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애초에 난화십이식의 최후식을 막거나 피해 낼 실력이 있었다면, 삼 열이 아니라 일 열이나 이 열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셋을 세기도 전, 공포에 물든 얼굴로 쓰러지고 말았다.
“빌어먹을! 내가 이 꼴로 죽을 줄 알아!”
물론 드물게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인기가 백화난무의 강기에 토마토처럼 갈려 나가는 걸 보며 허탈함만 더했을 뿐, 앞서간 동료들과 같은 결과를 피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이 일리나가 백화난무라는 단 한 초식을 펼쳐 낸 후 일어난 일이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에 잠깐이지만 사람들은 싸우는 것을 잊었다.
오랜 경험과 숙련도로 쌓은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세월이 가져다주는 빵빵한 내공을 가진 기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이 자리의 모두가 보고 느꼈다.
마법사도, 정령사도, 초인도 극한에 이르면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곳에 없고, 일리나는 눈앞에 있다.
꿀꺽…………….
초인들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백화난무의 위력을 목격하고서야 자신들이 드래곤 레어에 맨몸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오색 기사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래곤 옆에 오크를 아무리 죽여 봐야 무슨 소용인가. 드래곤이 나서서 입김만 불면 다 끝나는 일인데.
‘이거 계속합니까?’
그런 뜻을 담은 초인들의 시선이 그들의 대장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도 초인들의 시선에 답할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협력자로부터 일리나가 기사들과 다대일로 붙어 이겼다고 듣기는 했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맹세코 상상치 못했다.
“어때. 이제 좀 사신처럼 보이나?”
스위트는 냉기에 부르튼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었다.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다 이긴 것처럼 거만하던 적 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그녀도 일리나가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지만, 기쁜 오산일 따름이었다.
“사신보다는 괴물이군.”
“둘이 통하는 점이 있기는 하지. 마지막으로 말한다. 항복하고 정체를 밝혀라.”
“역시 보는 눈이 없군, 스위트 경. 기사는 적이 항복하라 하면 항복하나?”
“그것이 어리석은 싸움이라면.”
“거짓말이군. 임무를 완수한다. 죽어라!”
고개를 저어 부정한 적 대장이 자신들의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실로 황당한 명령에 스위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죽으라니. 그게 부하들에게 할 말인가? 더구나 저들은 어딘가 용병과 같은 분위기를 감고 있었다. 고용주가 죽으란다고 자살하는 용병이 있던가?
스위트는 저들이 대장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녀의 생각이 맞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판단은 틀렸다.
“이런 젠자앙!”
“나도 여기까지구먼.”
초인들이 분노 가득한 얼굴로 욕설을 뱉었다. 그러나 곧 서로를 돌아본 후 질끈 눈을 감은 그들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다짐하듯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들 아웃사이트를 위하여!”
그리고 눈을 뜬 초인들은 무언가 바뀌어 있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표정이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느껴지는 변화는 딱 하나였다. 그때부터 초인들은 자신이 죽어도 죽이고 죽겠다는 살인광처럼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자! 죽어! 같이 죽자아!”
“이 개자식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후퇴! 적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밀집 대형. 가드를 단단히 올려!”
돌변한 초인들로 인해 덩달아 기사들도 다급해졌다.
“미친! 설마 진짜 다 죽겠다는 생각이냐!”
이제는 차라리 도망가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운 스위트였다. 저런 명령을 내려서 이탈자가 없을 기사단이 얼마나 될까. 적들의 전력도 대단하지만,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모습이 더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임무는 완수되어야 하니까.”
“네놈들의 임무가 자살이 아닌 다음에야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대체 아웃사이트가 무엇이냐!”
“방금 외치지 않았나. 우리가 아웃사이트라고. 자, 그럼 같이 죽어 보자!”
“…….”
스위트는 짧은 순간 상대의 박력에 놀라 버렸다. 진심으로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놈만큼 무서운 적도 드문 법이다.
슈우우욱-
얼어붙을 것 같았던 온도가 급히 올라갔다. 정확히는 온도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적 대장이 뿜어냈던 냉기와 자연에 존재하는 냉기가 다시 그에게 흡수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스위트는 그의 공격과 반대되는 모습에 변화를 예상했다.
과연, 그녀가 판단한 대로였다.
꾸드드득.
적 대장의 몸이 얼음으로 둘러싸이며 곰처럼 거대해졌다. 거대하던 양팔과 어울리는 모습이 된 것이다.
“이제 머리만 커지면 저 얼어붙은 대지에 사는 얼음의 제왕이라는 곰과 잘 어울리겠군.”
“크아아아!”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적 대장이 야수 같은 고함을 지르며 스위퍼를 향해 달려들었다. 5미터가 넘는 거체가 달려드는 모습은 칼과 창이 없어도 무시무시했다.
정말 곰과 하는 짓까지 비슷하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해 줄 여유도 없다. 스위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적을 향해 달렸다.
지금까지는 냉기로 접근이 힘들었지만, 이제 냉기는 없다. 뿐만 아니라 냉기가 침범해 둔해졌던 몸도 가벼워졌다. 이제 은색 기사단 상급 기사에 어울리지 않게 도망 다녀야 했던 수치를 만회할 때였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더 신중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고 달려 나간 것이 오판이었다.
숨을 내쉬는 입으로 눈처럼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냉기가 적 대장 가까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얼음 주변이 차가운 것처럼.
‘당했다. 냉기를 흡수하는 모습만 보고 멍청하게 방심해 버렸어.’
근육이 다시 둔해지는 것을 느끼며 스위트가 이를 악물었다.
마침 적 대장이 흉하게 웃는 모습이 보이더니 곧 거대한 얼음 주먹에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스위트는 전력으로 주먹을 회피했다.
꽈앙!
얼음과 땅이 충돌하며 그 파편이 스위트에게 튀었지만, 그녀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땅에 박힌 적의 팔을 베었다.
카카카칵-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튀며 베인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역시 보통 얼음이 아니었다. 검기가 깃든 검이 얼음을 베는 데 반탄력이 느껴질 턱이 없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얼음이 너무 두꺼워 검이 진짜 팔까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리를 잡고 앉아 얼음을 깨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검이 얼음을 통과하자 베어진 자리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 정도면 트롤보다 질이 나쁘다. 그놈은 팔이 가늘어 잘라 내기라도 하지!
“치잇!”
무심코 혀를 차던 스위트는 곧 몸을 굴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얼음덩이를 피했다. 몸의 반응이 미세하게 느려져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냉기에 당한 상태로는 힘든가.’
이대로는 불리하다 느낀 스위트가 후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그녀의 생각을 읽은 적 대장에 의해 막혔다. 야수처럼 싸우고 있지만 진짜 야수가 된 건 아니니까.
그 상태로 냉기에 계속 노출된 스위트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신장 5미터의 적이 가진 수비 범위는 너무 넓었다. 그녀도 적의 신체인 얼음을 깎아 냈지만, 순식간에 회복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그녀의 손해였다.
그리고 적 대장의 공격을 피하는 간격이 점점 아슬아슬해지던 어느 순간.
퍼억!
“커허악!”
적이 시간차로 날린 얼음 주먹을 두드려 맞은 스위트가 수면에 던져진 돌처럼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스위트는 고통 속에서도 위기를 떠올렸다. 쓰러진 적만큼 쉬운 먹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본능처럼 몸을 움직이려다가 정수리까지 짜릿한 통증에 피가래를 토해 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쿵쾅거리며 달려온 적 대장이 그녀의 위로 뛰어들었다. 저 몸 아래 깔리는 순간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터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은색 기사단….. 의 기사가, 그냥・・・・・・ 죽지는 않아!”
어쩌면 고집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스위트는 겨우 움직이는 손으로 가슴 위에 검을 세웠다. 죽더라도 일격을 먹이고 죽겠다는 뜻.
그녀는 몇 미터 앞으로 닥쳐온 적 대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땅바닥을 기듯이 날아온 인영이 스위트를 안아 들고 미끄러지며 적 대장의 얼굴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이놈!”
손을 뻗어 두 사람을 잡으려던 적 대장은 머리가 날아갈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방어하며 몸을 감싼 얼음을 분해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도 검기와 단단한 얼음의 육체와 땅이 충돌하며 일어난 폭음에 먹혀 사라져 버렸다.
꽈르르릉!
고 클래스의 공격 마법이라도 폭발한 듯 폭음과 진동에 화원의 유리창이 깨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화원에 지진이 났다고 하겠군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스위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데일리 경?”
“무식한 덩치를 상대로 혼자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도우러 왔습니다만, 조금 늦었군요.”
데일리는 평평한 바닥에 조심스럽게 스위트를 눕히며 말했다. 말투는 가벼웠지만,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스위트의 상처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딱 좋을 때 와 주었다. 덕분에 살았어. 조금만 늦었으면 화장이 따로 필요 없게 될 뻔했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일단 포션부터 드세요.”
데일리는 주머니에 휴대하고 다니는 포션을 꺼내 한 모금 마시게 하고, 부러진 한쪽 팔과 다리도 원래 자리로 돌린 후 포션을 부었다. 골절에는 외상만큼 큰 효과를 보이지 않지만 통증을 없애고 회복을 촉진시킨다.
“기사들은 어떻지?”
“방어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미친놈들은 일단 피해야 해서요.”
검에 찔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어 초인기를 터트리는데, 이건 벽을 쌓고 막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도 해 볼 만합니다. 일리나 님이 위험한 물건은 다 치워 주셨거든요.”
데일리의 말을 들은 스위트는 그제야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