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91화
728화
충격이 가시는지 뿌연 먼지 속에서 거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적을 두고 계속 스위트를 간호할 수는 없는 일. 데일리는 부상으로 뒤로 물러서 있던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를 불러 포션을 주며 스위트를 지키게 했다.
“그럼 잠시 기다리십시오. 덩치만 큰 무식쟁이는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부관의 임무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심해라. 가까이 가면 냉기에 몸이 굳어 반응이 느려진다.”
스위트가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후후, 걱정 마십시오. 공주를 구하고 싶은 수십 명의 왕자 후보를 제치고 제가 온 이유가 그거 때문이니까요. 제 파츠 아머는 보온 마법도 걸려 있는 튼튼한 녀석입니다.”
과연 보온 마법이라면 냉기에 걱정이 없다. 파츠 아머에 걸려 있는 보온 마법이라면 한계가 있기야 하겠지만, 그거야 적도 마찬가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하하, 그럼 부탁하지. 이번 일이 끝나면 내 파츠 아머에도 꼭 보온 마법을 넣도록 해야겠어.”
설마 보온 마법이 없어 이렇게 고생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데일리는 그런 스위트에게 빙긋 웃어 보이고는 이제 거의 사라진 먼지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놈이 부상당한 스위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일부러 먼저 달려든 것이다.
“역시 스위트 경을 빼낸 것이 너였구나, 은색 기사!”
“자, 네놈들이 좋아하는 파트너 체인지로 2라운드 시작이다. 첫인사는 마음에 들었나? 아, 모자란 것 같다고? 그럼 바로 더해 주지. 죽어랏!” 순간 뿌연 먼지 속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서걱 하는 소리와 무거운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데일리 경이 먼저 시작한 모양이군.”
아니나 다를까. 곧 뿌연 먼지 속에서 쉼 없이 검강이 번뜩이며 고함소리와 함께 크고 작은 그림자가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스위트와 그녀의 곁에 붙은 여기사는 긴장한 표정으로 먼지 속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일리는 거대한 곰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실력만 보자면 그녀가 스위트보다 좋았기 때문에 스위트는 따로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힘을 중심에 두고 수련한 데일리라면 몬스터 같은 힘을 휘두르는 적 대장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때 적 대장이 버럭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그거 마법 갑옷이로구나!”
실로 다양한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무엇보다 앞에 붙은 욕설이 말을 내뱉은 적 대장의 불안한 마음을 표하고 있기에, 듣는 스위트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미소를 지으며 뻑뻑한 입술을 훔친 그녀의 손에 붉은 피딱지가 후두둑 떨어지고 말랑한 핑크색 입술이 나타났다.
“대략 상황이 정리되어 가는 모양입니다.”
일리나는 자신과 10미터 거리를 유지하며 식은땀을 뚝뚝 흘리고 있는 스키퍼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정한 위험도 순위 세 번째 사람이었다. 혼자 이 열과 삼 열의 초인 네 명분의 활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열의 초인들을 정리한 후 즉시 그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실 이 열과 삼 열의 공격 속에 있지 않은 그는 크게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그런데 막상 작심하고 그를 잡으려 나서고 보니 잡는 일도 죽이는 일도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가요. 전 더 복잡해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복잡하다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어느 곳도 전투가 마무리된 곳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가시가 솟은 일리나의 말에 스키퍼가 곤란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피싯!
은밀한 사각을 건넌 한 줄기 검강이 스키퍼의 머리를 꿰뚫는 순간이었다.
“흡!”
다급한 숨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하게 변하더니 검광을 통과시켜 버렸다. 앞서 일리나의 공격을 몇 번이나 무위로 만들며,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재주였다.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일리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확실해.’
다른 말로는 공기. 사람이 숨을 쉬는데 필요한 기체. 검강이 스키퍼의 몸을 통과하는 순간, 한순간이지만 그의 몸은 분명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신체를 버리고 공기가 되었었다.
사람이 정령도 아니고, 도대체 어떻게 자연계의 원소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스키퍼가 뭐라고 답할지 짐작이 되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공기로 변하는군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것이 제 초인기입니다.”
초인기. 일리나도 이제 안다. 마법사가 아닌 자들이 마법사처럼 신기한 짓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초인들이 사용하는 초인기라는 것을.
하지만 인간의 육체를 잠깐이지만 공기라는 자연의 원소로 변환할 수 있는 초인기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어쩌면 그가 부대장처럼 초인들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것도 저 초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자가 약자를 따르는 법이 없듯, 스키퍼가 보인 에너지탄은 위험하긴 하지만 강력하진 않았다. 하지만 육체를 원소화할 수 있는 초인기라면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약육강식. 초인들의 사회가 특별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어차피 좀 더 강하거나 특별한 초인기를 가진 자가 다른 초인들 위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
사실, 다른 때라면 일리나도 꼼꼼하게 스키퍼가 가진 초인기의 허점을 찾아 그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 그녀의 눈은 중간중간 기사들과 화원을 살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파츠 아머를 입고 나오겠다던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츠 아머를 새로 만들어 입는 게 아닌 이상,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래 걸릴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도 은색 기사단의 기사라며 같이 싸우겠다던 두 아가씨가 갑자기 겁이 나 안전한 곳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이럴 때 이드라도 있었으면 정말 좋겠지만……………’
없는 사람을 아쉬워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다.
일리나는 이드를 떠올리는 것을 멈추고 스키퍼를 살폈다. 상대의 초인기도 무적은 아닐 테니까. 진짜 아무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면 그는 이런 곳에서 습격이나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강(最强)은 아니지만 분명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무적(無敵)의 초인이 되었을 것이다.
“노드, 이리 와서 날 도와줘요.”
정령을 소환한 일리나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빨리 이 초인기를 넘어 스키퍼를 공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일리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드는 이미 화원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구르륵.
아무도 없는 일리나의 방에 세워진 거울이 갑자기 저 혼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받쳐 주던 지지대에서 벗어난 거울이, 길쭉하던 모습에서 동그란 모양으로 변했다. 또 매끄러운 거울 표면에 요철이 솟아올라 숨겨졌던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걸려 마법진이 완성되자, 그때까지 방 안을 비추던 거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기 시작했다.
불쑥!
그런 거울 표면에 갑자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공포 영화 마니아라면 그 순간 진짜가 나타났다며 박수를 보냈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방에는 마니아는커녕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곧 손을 따라 머리를 들이민 이드가 익숙한 듯 주변을 돌아보고는 온전히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일리나의 방이라서 그런가? 처음 오는 곳인데도 익숙하네.”
[매일 저녁 보는 방이니까 그렇죠. 그보다 거울을 이용한 느낌은 어때요? 안정감을 높이고 어느 쪽에서라도 반대쪽 거울을 조종할 수 있도록 게이트 마법을 응용했거든요.]
“테스트 안 해 봤어?”
[테스트는 했죠. 하지만 이 마법진을 처음으로 쓴 인간은 이드가 처음이거든요.]
처음이란 말에 이드는 가슴이 떨렸다. 불안으로, 물론 라미아의 실력과 테스트를 믿지만..
“음, 나쁘지 않았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자세한 감상은 나중에 적어 줄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잖아.”
이드는 일리나가 습격을 알려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화원은 이미 수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어 구조는 파악하고 있다. 이드는 곧장 방문을 열고 정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바로 개입할 거예요?]
“위험하면 그래야지. 다만 얼굴은 좀 가리고.”
괜히 자신에게 수도와 소드 팰러스를 왕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할 필요는 없으니까. 잘만 사용하면 좋은 패가 될 수 있는 물건을 왜 공짜로 공개한단 말인가?
“그보다 일리나가 무사해야 할 텐데.”
[에그, 사서 고생이지. 일리나가 위험할 리가 어디 있다고.]
일리나에게 위협이 되려면 당장 삼검왕 정도는 나서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라미아가 구시렁거렸다.
“어!”
라미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정문으로 향하던 이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멈춰요?]
“지금 네리베르의 목소리가 들렸어.”
[밖이 아니라 안에서요?]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청력을 끌어 올렸다. 생각과 동시에 내력이 움직이며 이드를 중심으로 오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네리베르와 케마란 두 사람이 같이 있네. 화원에 침입한 적과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칼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
이드는 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에게 먼저 가 보시게요?]
“응. 일리나도 괜찮은 것 같고, 밖에도 당장은 큰일이 없는 것 같으니까.”
케마란과 네리베르와 함께 일리나를 살피는 것도 빠트리지 않은 이드였다.
이드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빠르고 은밀하게 다가갔다. 그러다 자신이 향하는 곳이 이미 한 번 가본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로 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나올 텐데.”
[지하라면…… 가짜 렉터를 가둬 둔 곳이요?]
“응.”
[오호라, 그럼 혹시 양동이에요? 밖으로 시선을 끌어 두고 진짜는 몰래 잠입시키는.]
“충분히 가능하지. 다만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지하실을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다가가자 내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귀를 쨍쨍 울리는 고성과 쇳소리가 들려왔다.
이드는 지하실 계단이 보이는 모퉁이 앞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과연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지하실을 뒤에 둔 채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싸운 듯 모두 땀과 상처투성이였다.
체력이 모자란 듯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순간순간 자리를 바꿔 가며 체력을 보충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미아는 이드가 당장 나설 생각은 하지 않고 몰래 구경만 하고 있자 이드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이드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아프다고! 왜 그래?”
[두 사람을 도와주지는 않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그렇잖아요. 계속 구경만 할 거예요?]
그런데 도와주지 않는다고 따지는 라미아는, 왜 자기가 나서지 않고 들키지 않게 속삭이며 말하는 것일까?
이드는 피식 웃음이 났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해 봤자 민망함을 감추려고 또 꼬집기만 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내가 있으니까 안전하고, 두 사람은 내가 있다는 걸 모를 테니까 최선을 다할 거 아니겠어? 성장할 좋은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