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10화
747화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않고서 한 쌍의 결혼식을 앞당기고, 또 다른 한 쌍의 예비부부를 탄생시킨 부부 제조기 이드는 벤텀 백작과 마주 앉아 있었다.
느긋하게 기대앉은 이드와 난감한 얼굴로 진땀을 빼는 벤텀 백작의 모습이 잘 보여 주듯 이드는 현재 그를 상대로 절찬 갑질 중이었다. 저택에서 이그렌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시온 자작의 문제를 풀기 위해 벤텀 백작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드는 우선 일리나스가 가진 무공에 대한 욕심을 잡아 흔들었다. 무공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럼 가격이 적당하면 무공을 파실 수 있다는………..”
그러자 벤텀 백작이 대번에 혹한 표정으로 물어 온다. 판다고 한다면 왕국의 보고를 털어서라도 싹쓸이할 기세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제 말의 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지요. 아무리 큰 대가를 준다 해도 무공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공을 전하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혹시…… 무공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 일리나스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드는 벤텀 백작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긍정했다. 과연 눈치가 제법이 아닌가.
끄덕.
“마, 말도 안 됩니다. 후작께서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 그렇게 봤습니다.”
“아니요. 분명 잘못 보신 겁니다. 무공의 가치를 모르다니요! 이 넓은 그레센 대륙에서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것은 저 흉악한 몬스터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들뿐입니다. 당장 무공을 익혀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검후님을 있는데, 어떻게 무공의 가치를 모르겠습니까.”
벤텀 백작은 이드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지금 이드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바로 무공 때문인데 가치를 모르다니. 되레 섭섭하기까지 한 소리다.
이드는 그런 벤텀 백작의 모습을 바라보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그럼 백작과 일리나스 왕국은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잘 안다는 말이군요.”
“당연합니다. 무공은, 특히 마인드 마스터와 후작님이 가지신 무공은 그 가치를 가히 환산하기 힘들 정도지요.”
고개를 끄덕이는 벤텀 백작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말을 못 해 그렇지 말만 할 수 있다면 당장 이드 앞에 보물 상자를 내던지며 얼마면 돼?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런 벤텀 백작의 표정을 읽은 이드가 기대었던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당연히 자작의 작위보다 대단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어떻게 자작의 작위와 비교하겠습니까.”
“그럼 초대 시온 자작에겐 왜 그런 겁니까? 그는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바치고도 고작 자작에 봉해지지 않았습니까.”
“헉・・・・・・ 그것은 그때 사정이…….”
이드는 끙끙거리며 변명하는 벤텀 백작의 모습에 싸늘하게 웃었다.
설마 왕실에 무공을 받친 그레이가 그 공을 도둑맞았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을까? 당시 왕실이 사정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무시한 전력이 있다고?
어림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레이의 무공을 다른 기사들이 익힐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러지 않기를 빈다. 그 말을 한다는 것은 백작이 그만큼 바보라는 뜻이니까.
그레이를 자작에 봉한 것은 기사들이 그레이의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전인데, 그 말은 일리나스에서 무공의 가치를 자작위 정도로 본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이라…… 그럼 그 사정이 백 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좋아지지 않고 있나 봅니다? 아직 정산을 제대로 못 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커허험.”
부메랑처럼 돌아온 자신의 말에 벤텀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드는 그가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래도 일리나스가 무공의 가치를 모른다는 제 생각이 틀린 것 같습니까?”
“……”
묵묵부답. 벤텀 백작은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의 말과 왕국의 처사가 모순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시점에 왜 시온 자작이 거론되는 것인지가 의미심장하다.
벤텀 백작은 반사적으로 이그렌의 모습을 살폈다. 그가 아니라면 이드가 지금에 와서 시온 자작의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이그렌의 모습에서는 딱히 수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거기다 이드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벤텀 백작은 일단 이드의 생각부터 돌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잠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던 그는 일단 표면에 드러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어험, 과연 후작께서 그렇게 생각하실 만합니다. 분명 이것은 왕국의 실수입니다. 긴 시간이 흐르며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그런 사실을 알았으니 왕국에서는 전날 시온 자작에게 돌아가지 못한 대가를 온전히 지급할 것입니다.”
이그렌은 벤텀 백작의 발언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이드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저 과거를 언급했을 뿐인데 저런 반응이 나오다니.
사실 90년 전의 일이라면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이야기다. 국가 간의 문제도 어지간해서는 다시 꺼내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데, 왕국을 대표하여 제국에 방문한 이가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다니.
‘이것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가진 힘인가!’
이번에 확실히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귀족의 위에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그렌은 그 짜릿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감격스러운 모양이네.’
이드는 이그렌의 떨림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마무리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힌다면 좋은 일이지요. 내 알기로 현재 시온 자작은 사무엘 백작가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정의 빚도 있고.
정산이 되면 그런 문제는 충분히 해결되겠지요?”
“해결될 뿐 아니라 본래의 가세 이상을 회복할 것입니다.”
“좋군요.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한번 방문하십시오.”
이드가 조건부로 저택의 방문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 두면 좀 더 빨리 일이 해결되리라.
“빠른 시일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이드는 벤텀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한 것은 조금 전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에 보도록 하죠.”
벤텀 백작은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이드와 인사를 나누고는 마차에 털썩 주저앉았다.
“골치 아픈 문제를 떠안아 버렸구나.”
그러나 확실히 그냥 둘 수는 없는 문제였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어차피 이그렌 경과 시온 자작은 이드 후작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빼내 올 생각이었으니. 그것이 좀 빨라질 뿐이야.
거기다 후작에게 무공을 배우고 있는 이그렌 경을 미리미리 대우한다고 나쁠 것도 없고.”
벤텀 백작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고민한다고 해서 어떻게 될 일도 아니고.
마차의 벽을 퉁퉁 두드린 백작이 마차를 출발시켰다.
“공관으로 돌아가자!”
다그닥 다그닥.
막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이그렌이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될까요?”
“뭐가?”
“이번에 정산하기로 한 옛날 일이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좀 억지잖아요.”
“억지면 어때? 결론적으로 통했잖아. 그럼 된 거야. 이제 벤텀 백작과 일리나스의 왕실이 알아서 시온 자작을 빼내 줄 거야. 덤으로 빚도 청산되고, 잘하면 영지도 가지게 되겠지.”
“영지까진 바라지 않아요. 그냥 제 가족과 마을이 평안하면 그걸로 족해요.”
“네가 도인이냐? 그렇게 욕심이 없게?”
이드는 그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사무엘을 죽이는 일에도 망설이는 것을 보고 느꼈지만, 이렇게 욕심조차 없을 줄이야.
딱 도를 닦으면 좋을 기질이 아닌가.
“네? 도인이요? 그게 뭐죠?”
“너하고 성격이 비슷한 사람들인데, 자세한 건 알 거 없고. 그보다 이제 세상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일부러라도 욕심을 좀 가져라. 그렇지 않으면 자작과 마을을 다시 찾아도 또 빼앗길 수가 있어. 그게 싫으면 차라리 제국으로 넘어오든가.”
“깊이 새겨 궁리하겠습니다.”
가볍게 던진 말에 이그렌이 과할 만큼 진지하게 반응하자 이드는 쓰게 웃었다. 하는 말까지 정말 도사를 빼다 박지 않았는가.
“궁리는 알아서 하고, 들어가서 쉬어. 우린 어디 가 볼 곳이 있으니까.”
“제가 모시게…….”
“아니, 둘이 움직이는 게 편해.”
이드는 이그렌을 그의 방이 있는 쪽으로 밀어내고는 라미아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아, 역시 우리 집이 편하네요.]
라미아가 침대에 몸을 풀썩 던지며 말했다.
“진짜 우리 집은 아니지만 그렇지. 아니면 이번에 진짜 우리 집을 하나 살까?”
[음・・・・・・ 저는 좋아요. 제국에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데 계속 신세를 질 순 없죠. 당장 토벌전을 위해서 오색 기사단이 움직이면 이 저택도 비워 줘야 하잖아요.]
라미아가 다리를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나가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긴 힘들겠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눈치 보며 얹혀살 필요는 없다. 이미 소드 팰러스에 집을 사 놓은 이드는 쉽게 마음을 정했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 첫 번째 집 구매는 좀 망설였지만, 두 번째 집에 대한 구매 결정은 빨랐다.
“좋아. 그럼 일리나가 오면 같이 둘러보고 집을 사자.”
[좋아요. 그럼 제가 미리 괜찮은 집을 수배해 둘게요. 일전에 들렀던 도둑 길드에 의뢰하면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을 거예요.]
제법 능력 있어 보이던 도둑 길드의 지부장들을 떠올린 라미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찾는 수고는 확실히 줄어드니 좋네. 그보다 이제 슬슬 약속 시간 아니야?”
[그러네요.]
이드의 말에 하늘을 살핀 라미아가 일어났다. 살짝 꺼졌다 제 모습을 찾아가는 침대와 라미아를 번갈아 본 이드가 말했다.
“그 몸 정말 잘 만들었어. 중량 조절이 자연스럽잖아.”
[제가 괜히 공을 들였게요. 게다가 중량 조절은 기본을 넘어 필수라고요. 그거 없이 침대에 누웠다가는 침대 다 망가질걸요. 마차도 타기 어렵고. 아, 열렸어요.]
라미아의 말과 함께 그녀의 손길을 따라 마력이 유동하던 거울의 게이트가 열렸다.
이미 두 번이나 사용해 보았던 이드는 망설이지 않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게이트로 사라진 이드의 몸은 공간을 넘어 일리나의 방에 나타났다.
“어서 와요.”
그러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일리나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이드를 반겼다.
“아, 일리나. 다녀왔어요.”
[저도 다녀왔어요~]
이드를 따라 곧장 뒤따라온 라미아가 게이트를 나오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라미아?”
낯선 인물의 출연에 놀라던 일리나는 곧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고 놀란 표정을 했다.
[에헤헤, 역시 일리나는 바로 알아볼 줄 알았어요. 어때요. 괜찮아 보이죠?]
“・・・・・・ 골렘을 이용한 건가요?”
과연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엘프답게 직관적으로 라미아가 만들어 낸 육체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히히히, 맞아요. 아무래도 새보다는 인간의 육체가 여러모로 편하니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인간의 육체라면 이드를 돌보는 데도 여러모로 편리할 거예요.”
[그렇죠? 그렇죠?]
라미아는 일리나가 그녀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리자 신이 나 말했다.
두 사람은 왜 항상 자신을 아기 취급하는 것일까. 이드는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에 더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은 일리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에요. 쉴라 경, 클라인 백작.’
“명예 후작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후작님.”
이드의 말에 일리나와 함께 이드를 기다리고 있던 쉴라와 클라인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