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17화
754화
머리를 쓰기 위해서는 단 걸 먹어야 한다?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먹을 거라는 말에 반짝거리는 포장지를 집어 들었다. 적을 추적하며 제대로 된 음식보다는 거친 음식만 먹어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달콤한 거라지 않는가. 달콤한 음식은 대부분 고급 재료나 고급 요리뿐이다.
“오옷! 달다!”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에단이 그 오묘한 맛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드 곁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얻어먹은 경험이 있어 망설임이 없었던 것. 이래서 뭐든 경험이 중요한 법이다.
그런 에단의 모습에 너도나도 입에 디저트를 털어 넣고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적을 추적하고 요새에 잠입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곤두섰던 신경이 혀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녹아내렸다.
곧 사람들은 입에 사탕과 초콜릿을 물고 정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 그런 일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따로 나와 밤새 자리를 지킨 감시자들과 교대를 하기도 했다.
[금고에서 찾은 서류에 대해서는 의논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드는 자신을 따라 오두막 밖으로 나온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서류에 따로 의논할 게 있나. 숨겨진 위치가 금고였고 미묘한 예감이 들어서 그렇지. 괜히 내가 나서면 오히려 선입견만 심어 주는 꼴이 될 거야. 과연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는지 보자고.”
[그럴 수도 있지만 전 확실히 뭔가 있다고 생각해요. 본래 무인이건 마법사건 지고한 경지에 오른 사람의 육감은 특별한 것이니까요.]
이드도 일정 부분 공감하긴 했다.
화경이나 현경에 이른 무인이 천문을 따로 공부하지 않고도 천기를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육감의 연장선이다.
‘뭐, 난 아직 천기는 모르겠지만…..’
이드는 별빛이 희미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 저 하늘에서 뭘 읽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 해 뜬다. 이제 슬슬 집무실에 사람이 들어갔을 만한데, 고양이, 죽지는 않겠죠?]
“…… “
이드는 옆에서 느껴지는 묘한 압박에 하늘을 향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각 고양이는 집무실의 문을 잡고 굳어진 성주를 꼬리까지 흔들며 반기고 있었다.
냐아옹~
“이, 이게 무슨!”
엉망이 된 방과 고양이를 번갈아 본 성주의 얼굴이 대번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라미아의 걱정 덕분일까 아니면 고양이가 귀엽게 꼬리를 흔들어 성주를 반긴 덕분일까. 성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에게 화를 내기보다 그 원인을 찾아 분노를 쏟아 냈는데, 덕분에 겨우 나무기둥에서 내려온 사내는 다시 한참을 더 매달려 있어야 했다.
마음속으로 고양이의 무사를 빌었던 이드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자신에게 정보를 분석하는 재주 따위 없다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드는 온전히 해가 떠오르자 라미아와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래 봤자 아공간에 쌓아 두고 있던 요리들을 꺼내 늘어놓는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명령하시면 저희들이 했을 텐데. 후작님께서 손수…….”
하지만 그것만 해도 사람들은 감격해했다. 언제 후작이 차려 주는 밥을 먹어 보겠는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니까. 그나저나 뭐 좀 나온 거 있어요?”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워낙 정보들이 단편적이고 서류의 분량이 적지 않아서요. 당장은 종류와 연관성 별로 정리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제법 걸리겠네요.”
“예. 검은돌의 에린이 분석 능력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 에린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추가 요금만 주신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늘 자정까지 완벽히 끝내 보이겠어요. 츄릅.”
꿀떡 삼키는 군침으로 봐서 추가 요금이 돈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이드가 물으려는 순간 눈치 빠른 라미아가 나서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오늘처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양 기준으로 디저트 2개월분!]
파아앗!
순간 에린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결의가 넘실대는 눈으로 맹세했다.
“제 영혼을 걸고 자정까지 일을 마치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에린이 오두막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앞을 막았다가는 사생결단이라도 낼 기세에 쩍하니 입을 벌리고 보던 에단이 스톤에게 말했다.
“……혹시 너희 의뢰비로 디저트도 받냐?”
스르륵.
대답 대신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가 유령처럼 에단의 턱 아래 놓였다.
에단은 그 순간 스톤의 눈빛이 참 우울하다 싶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칼 든 친구 앞에서는 말조심이 필수인 세상이니까.
에린에게 확답을 받은 이드가 턱을 쓰다듬었다.
“역시 하루는 걸리는구나.”
저 모습이라면 더 늦어지지는 않겠지만, 더 빨리 끝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좀 더 서두르라고 해 볼까요? 디저트 2개월분 정도 추가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가능할 것 같지만 포기. 몇 시간 빨리 보자고 에린 양 생명을 깎아 먹을 수는 없지.”
정말 목숨을 걸 것 같아서 무섭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과로사한 송장을 치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드는 다시 오두막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가는 에단들을 바라보다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여기 있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선약이나 지키러 가 볼까?”
[황녀궁이요?]
즉시 할 일이 있었다면 무시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함부로 무시해서 좋을 상대는 아니다.
[그럼 전 남아서 뭐가 나오는지 보고 돌아갈게요.]
“황녀궁에 같이 안 가고?”
이드가 갸웃하며 물었다. 그렇게 황녀를 경계하던 그녀답지 않은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에 따라가면 귀찮은 사생팬이 생길 것 같아서요.]
라미아는 호기심과 동경에 가득한 소녀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황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이드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이드에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남자보다 여자가 황녀의 취향일지도………….]
“뭐?”
[별일 없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요, 호호호.]
이드는 방긋 웃는 라미아를 미묘한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드도 듣지 못해 물었던 것이 아니라, 굳이 더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취향은 둘째 치더라도 황녀가 라미아에 대해 호기심을 크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고 보면 황녀와 둘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을 때 그녀의 이야기 대부분이 검후에 대한 것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뭐, 아무렴 어때.’
이드가 돌아가겠다고 밝히자 배웅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단 것을 위해 영혼을 불사르는 에린을 제외한 사람들이었다.
“나올 필요 없으니 하던 일 계속해요. 중요한 정보가 나오면 다시 올 테니까.”
“오늘 직접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손을 들어 제지하는 이드의 말에 사람들은 더 나서지 못하고, 등을 돌리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에단과 비올라는 슬그머니 그런 사람들 사이를 지나 이드의 뒤를 따랐다. 나오지 말라는 말을 따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톰은 그것을 이드와 그들 사이의 신뢰 관계라고 받아들이고 조금 부러워했다.
전날 마법진을 그렸던 곳으로 가며 이드가 말했다.
“오늘처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에단은 어지간해서는 이드를 불러내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드를 부른다는 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과 같아 스스로가 너무 작고 무능하게 느껴지니까.
그러는 사이 재료를 쏟아부은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비올라가 그 옆에서 지켜보다 혈관이 솟아오른 머리를 부여잡았다.
“크흐…… 이런 참혹한 꼴을 내가 보아야 한다니!”
누가 들으면 꼭 강제로 끌고 와서 보도록 한 줄 알겠다.
이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반들거리는 비올라의 머리를 한 대 치고는 검은색으로 물든 공간으로 발을 들여 사라졌다.
“나중에 보자.”
이드가 짧은 말을 남기고 사라지자 비올라가 라미아의 옷자락을 잡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재료 좀!”
갈 때와 마찬가지로 마법을 이용한 이동은 한순간이었다.
비올라가 기겁할 정도로 많은 재료가 쓰인 이동 마법의 탑승감은 매우 뛰어나 솔바람이 스치는 느낌과 함께 이드는 수도의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밤새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그리 피곤하지 않은 이드는 검을 탁자에 올려두고 샤워를 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피곤해서 침대에 늘어졌겠지만, 이드는 수일간 잠을 자지 않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절정의 경지만 넘어서도 하루 한두 시간만 잠을 자면 신체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 어쩌면 고수일수록 강한 이유도 줄어든 수면 시간을 수련으로 대체해서인지도 모른다. 수련의 피로에 쉬지 않을 수 없는 하수와 빠른 회복 속도 덕에 쉴 시간을 수련으로 채우는 고수.
빈익빈 부익부가 여기 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탁자에 새 옷이 올려져 있다. 샤워 중 기척이 나더니 그때 가져다 놓은 것 같다. 어떻게 샤워 중인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유능한 집사인 것은 확실하다.
새로 구매하는 집의 집사로 꼭 데려가고 싶은 인물이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명예 후작님.”
이드가 옷을 입고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인다.
“아니요. 간밤에 좀 바빠서 말이죠.”
이드는 놀라 흠칫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점잖은 얼굴로 침묵하는 집사의 모습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라미아는 오늘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걸로 하고요.”
“명심하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할까요?”
“아니요. 먹었어요. 사무엘 백작과 이그렌 경은요?”
“사무엘 백작님은 어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이그렌 경은 아침 일찍 손님을 만난 후 명예 후작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아침부터 이그렌을 찾을 손님이 누가 있을까?
이드는 바로 이그렌을 찾았다. 초조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고 있던 이그렌은 이드가 오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손님이 왔었다고?”
“네. 벤텀 백작이 조용히 만나고 싶다고 절 초대했습니다.”
“벌써? 행동이 빠르네.”
이드는 살짝 놀라며 말했다. 관계 정리를 위해 사무엘 백작과 이그렌의 관계를 알아볼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설마 날이 밝자마자 이그렌을 찾을 정도로 행동이 빠른 사람인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그렌이 근심을 한가득 안고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벤텀 백작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할 거 뭐 있어 보자는데 만나. 너에게 시온 자작과 사무엘에 대한 일을 좀 더 들어 보려고 보자는 것 같은데, 내가 사무엘 백작과 시온 자작의 일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 빼고 아는 대로 이야기하고 와.”
“그러면 될까요?”
“아니면 가서 내가 하라는 대로 연기라도 하게?”
“명령만 하시면…….”
“됐네요. 가자. 마침 나도 나가는 길이니까. 가는 길에 태워다 줄게.”
이드는 말을 마치고 집사에게 마차를 준비하도록 시켰다.
“밖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황녀궁에 약속이 있어서.”
“아…….”
이드의 말에 전날 황녀의 모습을 떠올린 이그렌이 살짝 부러운 듯 이드를 바라보았다.
일반 귀족 가문의 레이디도 아니고 황녀라니. 공주나 황녀의 은밀한 초대는 젊은 기사들이 꿈꾸는 로망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