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21화
758화
승부욕에 집착하다 보면 승부와 아티팩트를 모두 날려 루키브레이커의 제물이 된다.
그렇다고 루키브레이커를 부수지 않기 위해 내공 운용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승부욕 같은 어쭙잖은 잡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
정말 기가 막히게 머리를 굴린 결과물이지 않은가?
이후 루키브레이커가 부서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단계까지 내공을 사용하는 숙련된 운용 능력을 확보한 후, 대련의 승패까지 신경 쓸 때가 되면 더 이상 신입이 아니게 된 후일 것이다.
이드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누가 기획한 작품인지 몰라도 절묘하네. 절묘해.”
“이 재미있는 이름의 아티팩트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이드는 궁금증 가득한 황녀에게 루키브레이커를 건네주었다. 황녀가 바로 착용해 보지만 가는 그녀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릴 뿐이었다.
“이 아티팩트가 아니라 이걸 기사단 수련에 사용할 생각을 한 사람이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간단한 기능에 비해서 과열 방지와 내공 수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으니까요. 미량의 내공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는 법을 익히게 한다면 지구력을 요구하는 전쟁 상황에서 기사들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겁니다.”
열을 띈 이드의 말에 황녀는 새삼 자신의 팔에 걸린 루키브레이커를 돌아본다.
그녀는 어떨지 몰라도 이드는 자신이 왜 이런 아이템을 만들지 못했는지 아쉬울 정도다. 발상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말마따나 정말 그렇다. 사용하는 방법과 규칙이 중요하지, 물건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라미아도 있는데, 이 정도의 아티팩트 따위 공장 규모로 찍어 낼 수 있다.
‘농담이 아니라 중원에 돌아가서 이 루키브레이커를 팔면 완전 대박이겠어.’
그레센 대륙의 기사들 이상으로 하루하루가 수련의 연속인 무림인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분명 각 문파의 필수 장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해지기 위한 수련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들이라면 루키브레이커를 좀 더 변태적인 방법으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부위별로 내공의 한계가 다르게 설정된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내력 운용을 하는 것 말이다.
전체적인 내공의 단일 출력은 물론이고, 몸의 부위별로 기어를 바꿔야 한다니. 루키브레이커에 멘탈과 지갑을 털린 신입들이 들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도 모자랄 헬 난이도의 훈련이다.
이드는 자신이 떠올리고도 실없이 웃고 말았다. 그 어이없는 생각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것이 웃겼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게 자신이 무림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 같았다. 좋은 의미에서의 확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적용해 보면 효과가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디서 파는지 알아보고 좀 사 둬야겠다.’
이런 사소한 일에 라미아를 동원할 수는 없으니까. 그야말로 능력의 낭비다.
순식간에 어떤 식으로 수련에 이용하면 좋을지까지 설계를 마친 이드가 게일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게일 자작의 말은 이 루키브레이커를 써서 대련을 하자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과연 이 물건이 꼭 필요할까요?”
이드는 루키브레이커의 필요성에 의문을 표했다. 이드나 게일 모두 이런 아티팩트가 없어도 철저하게 내공을 통제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루키브레이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제가 부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일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고도 방지해야겠지요.”
“그렇다면야.”
이드는 슬슬 턱을 쓰다듬으며 수긍했다. 그러나 황녀도 지적한 게일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반사적으로 손에 든 루키브레이커를 보지만 아무런 이상도 느낄 수 없었다.
비록 마법에 대한 지식이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손에 든 물건의 내력 정도는 읽어 낼 수 있다. 이 루키브레이커는 말 그대로 메이드 인 황궁 기사단의 정품이었다.
‘이쪽이 아니면 게일이 가진 루키브레이커에 뭔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에이, 설마……..’
혹시나 하던 이드는 곧 고개를 저어 가능성을 부정해 본다.
그 사이 연무장이 격렬하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드와 게일의 입에서 동시에 대련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흥분한 것이다.
그야말로 세기의 대련이 아닌가. 기사들 역시 황궁의 식구로서 게일과 이드에 관한 소문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야! 너희들 빨리 안 내려오고 뭐 해! 연무장 비워. 대련에 방해되는 것도 모조리 치우고!”
“너, 너, 그리고 너. 세 명은 가서 황녀님이 편히 관람하실 수 있도록 의자와 탁자를 가져와.”
연무장에 있던 선배 기사들이 나서서 연무장을 비우고 대련 준비를 시켰다.
그에 연무장에서 쫓겨난 기사들이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황녀의 근처에 서려고 했지만, 황녀를 따라온 릴리가 황녀님을 땀 냄새로 질식시킬 일 있냐고 밀어내는 통에 밀려나고 말았다. 그에 기사들은 비 맞은 개꼴로 처량하게 밀려났다. 견종은 불도그와 도베르만일까.
하지만 곧 실망을 떨친 기사 중 하나가 시커먼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내가 설마 이런 구경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분명 수련을 열심히 한 상을 받는 거야.”
“열심은 개뿔. 열흘 만에 얼굴 비추는 놈이. 그나저나 게일 경은 무슨 생각이지? 질 것 같은 일에는 아예 관여하지 않는 사람인데.”
눈썹을 따라 길게 흉터가 있는 기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말들이 나왔다. 하루 이틀 함께한 것이 아니다 보니 게일의 성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나온 말이었다.
“혹시 명예 후작을 이길 수 있는 비장의 수라도 준비한 거 아냐? 봐. 내공도 막아 두면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라고.’
“내공이 없다고 용병이 기사를 이기냐? 상대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고. 그것도 마르텔 님을 이긴 진짜 중의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누군가의 말에 기사 여럿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반박하는 목소리에 동감하는 기사들 역시 적지는 않았다.
“자자, 어차피 대련 끝나면 정해질 승자와 패자를 가지고 계집애처럼 입 아프게 싸우지 말고, 여기에 행동으로 보이라고! 자, 걸어라.”
각자의 주장에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찰나, 한 기사가 투구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언제 준비했는지 투구에는 이드와 게일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단박에 알 수 있는 투구의 정체에 각자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기사들이 조용히 입을 닫고 돈주머니를 열었다.
이런 내기가 한두 번이 아닌 듯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실로 황궁의 안전이 걱정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때 투구 속에 돈을 넣는 커다란 손 사이로 작은 손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여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하얗고 말랑말랑한 손은 금방 눈에 띄었다.
“응? 너도 끼게?”
“왜요? 기사만 걸 수 있는 거예요?”
사내는 새초롬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릴리의 모습에 헤 벌어지려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흥,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이 주머니는 황녀님의 것이니까요.’
릴리가 고급스러운 하얀색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자 투구에 돈을 집어 던지던 기사들의 손이 멈췄다.
“저, 정말이냐?”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럼 황녀님은 어느 쪽을…….”
설마 황녀를 앞에 두고 황녀의 이름을 파는 시녀가 세상에 있겠는가! 빠르게 고개를 저은 사내는 황녀가 있는 쪽을 힐끗거리며 릴리 앞으로 투구를 내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릴리의 손끝을 향했다. 그녀는 그런 시선을 즐기며 검은 투구에 던져 넣기는 아까울 정도로 하얀 주머니를 이드의 이름이 적힌 투구에 밀어 넣었다.
“흐음…….”
“역시 황녀님은…….”
황녀의 결정을 확인한 기사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방어구를 장비 중인 게일을 힐끔거렸다. 내기를 통해서 황녀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확실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미 돈주머니를 넣은 기사 하나가 슬그머니 나와서 투구에 손을 집어넣는다.
“야, 이미 돈까지 걸어 둔 새끼가 어디 손을 넣어! 그러다 손모가지 날아가면 안 아프지?”
“그게 아니라 나도 황녀님 따라서 걸려고…….”
“그런 거면 나도…….”
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나섰다.
그에 투구를 들고 있던 사내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낙장불입! 한 번 걸었으면 끝이야. 돌리고 싶으면 반대쪽에 두 배를 걸든가! 어디 신성한 게임 판에 부정 타게 건 돈을 빼 가려고……”
돈이 담긴 투구를 지키는 모습이 마치 지옥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같이 흉흉하다. 결국 돈을 빼려던 사람들이 물러나고, 이어진 내기 금액은 거의 모두가 이드의 이름이 붙은 투구를 향했다.
과연 그것이 이드의 실력을 믿어서인지 황녀가 지지하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너무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액수에 게일에게 돈을 건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괜찮아! 게일이 이기면 대박이라고.”
그중 재미로 시작한 일에 진지하게 한 달 봉급을 털어 넣고, 행복 회로를 돌리는 어리석은 자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진심으로 게일의 승리를 점치는 인간은 적었다.
이드는 생각보다 예의에 집착하지 않고 가벼운 분위기를 가진 기사들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유야 어떻든 자신의 승리에 돈을 걸고 있지 않은가.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슬그머니 게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과연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많은 기사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게일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못했다.
까드득.
보지 않는 척하며 그런 상황을 보고 듣고 있던 게일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장난 같은 내기라지만 자신의 패배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들에게 박혀 있는 자신의 이미지가 약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만큼 이드의 인상이 강했거나.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당신들의 생각을 오늘 철저하게 뜯어고쳐 주지. 대련에서는 지더라도 승부에서는 이긴다.’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편 게일은 루키브레이커를 단단히 조이는 듯 쓰다듬으며 한 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밀었다.
찰칵.
그러자 손끝에서 무언가 맞물렸다. 소리도 없고 루키브레이커에 나타나는 변화도 없었지만 분명 루키브레이커에 모종의 변화가 생겼음을 게일은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쉰 게일이 고개를 들었다.
이드가 익숙지 않은 방어구를 코린의 도움을 받아 장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의 시선을 마주한 게일은 단단히 이를 물었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비겁한 수단을 들고나온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곧 황녀의 시선을 피한 게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이런 선택을 강요한 것은 황실과 황녀이지 않은가 말이다. 부끄러움 같은 것은 이긴 뒤에 떠올리면 된다. 이번만 확실히 해 두면 뒤에 이 같은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애초에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길 방법을 준비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니까. 비겁함에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에 자랑스러워해라. 게일.’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듯 생각한 게일은 짧게 숨을 끊어내며 연무장에 올랐다.
“우리 기사단을 대표해서 이기라고 게일!”
“검왕자 만세!”
게일이 등장하자 관전자 모드를 하고 있던 기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드는 과연 그 환호가 진정 게일에 대한 믿음인지 투구에 들어간 남자의 자신감 때문인지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답이 나왔다.
“게일 경! 내 봉급을 지켜주게!”
“……어쩐지 짠하네.”
과연 게일과 기사들 간의 믿음은 고작 그 정도의 것이었던가!
이드는 문득 연무장에 쓸쓸히 올라선 게일이 불쌍해 보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