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28화
765화
쿠당탕.
무언가 거칠게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이드에게서 멧돼지를 탈취한, 나름 유니크한 타이틀을 획득한 남자가 힘껏 인상을 썼다. 물론, 본인은 알지 못하는 타이틀이지만.
“시펄, 이번엔 또 뭐야!”
그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했다. 오늘 저 문 너머로 나온 오보로 몇 번이나 헛걸음을 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호출도 아니고 무언가 넘어지는 소음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비명이 들려도 못 들은 척하고 싶지만 그러다가 찍히면 남은 조직 생활이 고달프다.
방의 주인은 저 높은 곳에 앉아 자신들을 내려다본다는 골든 아이의 비서였다. 성주도 함부로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그녀는 골든 아이가 요새의 보안을 위해 보내온 인물이니까.
언뜻 듣기로 이 여자 비서들은 골든 아이의 총애를 받는 여자들로, 그녀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골든 아이에게 전해진단다. 그래서 제법 매력 있는 그녀에게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빌어먹을! 욕구 불만을 풀려면 다른 놈 잡고 풀라고.”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꿍얼거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발로 찼다.
퉁퉁!
“이번엔 또 뭐요?”
“으……”
흠칫.
이어질 답을 기다리던 남자는 안에서 들리는 희미한 신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탁자와 함께 쓰러져 있는 여성이 보였다. 남자는 방의 주인이 쓰러진 모습에 본능적으로 침입자가 없는지를 살피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창백한 얼굴로 차가운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여성에게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어이, 어이! 무슨 일이야? 왜 하필 내가 경비를 설 때 이러는 거냐고! 정신 차려 봐!”
찰싹 찰싹
“어이……어이……”
남자가 약감의 감정을 실어 뺨을 두드리자 여성이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는 즉시 손을 멈추었다.
“이봐, 정신이 들어?”
“바…… 밖에…… 적이…….”
여성이 입을 열자 귀를 기울이던 남자는 이어지는 말에 묘한 표정이 되어 여성을 힐끔거렸다. 이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이 되어서다. 분명 밖에는 아무도 없다.
지금 이게 몇 번의 오보를 날린 후에 쓰러져서 할 소리인가?
“이봐,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밖엔 아무도 없어.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있는 거 맞아?”
“밖・・・・・・ 확인을…….”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차라리 완전히 기절을 하든가.”
남자는 질색을 하면서 일어났다. 밖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여성이 이유 없이 쓰러진 것이 조금은 신경이 쓰여서다.
[에단이 말하던 초인력 흡수가 일어나는 것 같죠?]
“딱 봐도 그거지. 그런데 문제는 저게 왜 지금 일어나느냔 말이야.”
분명 에단에게 듣기로 주변에 죽은 초인이 있어야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지금 주변에 초인은커녕 일반인의 시신도 없다.
무엇보다 뚜껑 열린 하수구에 빨려 들듯 에단에게 흡수되는 초인력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니라, 직전까지 요새 주변을 경계하던 정체불명의 초인기다.
“일단 저대로 둘 수는 없겠는데.”
당연하다. 경계 나팔을 불어야 할 기운이 에단에게 흡수되는 것 자체가 이상이기 때문에, 이쪽의 존재를 알았을 것이 분명하니까.
이드는 급히 에단과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에단, 상태는 괜찮아? 말할 수 있겠어?”
“입만 겨우. 괜찮습니다.”
에단이 추위에 꽁꽁 언 입을 움직이듯 어색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이드는 그의 말에 강력한 힘의 격류에 에단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음을 파악했다. 다행인 점은 통제력을 잃었을 뿐 다른 이상은 없다는 사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
“네에.”
이드는 에단의 대답을 들으며 기감을 열고 신안으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에단에게 흡수되는 황금빛 기운의 흐름이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거칠고 강제된 역류가!
“좋아. 그럼 내가 널 그 흐름에서 잘라내고 끄집어낼 거야. 이 상태로 오래 있으면 절대로 발각된다. 어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혹시 위험할 것 같으면 말해. 발각되었을 때의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실로 가볍게 말을 꺼낸 이드가 언급한 책임이란 단어는 강철같은 차갑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를 연상한 에단은, 황망한 중에도 상상이 되는 무자비한 힘의 폭력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기록에 남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드의 힘이라면 조심스럽게 요새에 잠입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요새와 그 안의 초인들을 순식간에 전멸시키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혹시나 요새 안에 검왕급의 초인이라도 숨어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남을지 몰라도 자신이 뒤를 쫓은 자들 중에 그런 실력자는 결단코 없었다.
“아님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에단은 많은 생명을 살리는 신관의 심정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다. 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는 희생정신 따위 애초에 키운 적도, 키울 생각도 없는 에단이었다. 아무리 많은 생명이라도 적을 살리기 위해 죽는다고? 그게 무슨 토끼 스테이크 써는 소리인가 말이다. 이드는 푸들거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에단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황금빛 기운 속으로 뛰어들었다.
축골공을 풀어 본 모습을 돌아온 후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황금빛 기운은 에단에게 흡수되기 바빠 이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에단 옆에 이른 이드는 바로 에단과 기운을 잘라내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일어난 일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인력 흡수 현상을 살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그중에서도 이번은 더욱 특이하다. 사망한 초인의 초인력도 아니고, 멀쩡히 자기 기능을 다하고 있던 초인기의 초인력을 흡수하고 있지 않은가. 에단의 초인력 흡수 능력이 진화한 것인가, 아니면 황금빛 기운과 에단의 흡수 능력에 알 수 없는 연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을 쳐 낸 이드는 거침없이 손을 뻗어 에단의 맥문과 명문에 동시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이드의 머릿속에 맥문과 명문을 통해 읽어 낸 에단의 신체와 기운의 흐름이 마치 3D 영상처럼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신체에는 이상이 없다. 대신 흡수된 기운은…………..?
간파의 눈이라는 문을 통해 흡수된 기운은 내력이라기보다는 정령력과 비슷한 흐름으로 중단전으로 흡수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 하단전을 사용하는 무인과 달리 초인의 초인력은 중단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말 그대로 외부의 초인력을 자신의 중단전으로 흡수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걸로 끝이 아니야. 대량의 기운을 흡수했는데, 중단전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게 아니라도 초인력을 두 번이나 흡수한 에단에게 자신의 초인기가 강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드는 즉시 무극신기로 에단의 중단전을 세밀하게 살폈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흐름.
잠시 후 이드는 목적하던 미세한 흐름을 잡아낼 수 있었다. 중단전을 솥으로 써서 순정의 상태로 바뀐 황금빛 기운은 척추의 골수를 타고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상단전?”
기운의 최종 정착지를 확인한 이드는 혀를 차며 눈을 떴다. 아무래도 머리에 있는 상단전은 하단전과 중단전보다 접근하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적진의 코앞에서 살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이 아니라도 이드의 한껏 기감을 높인 귓가로 들리는 발자국 소리도 무시하기 힘들다. 장담하는데 저 발소리의 주인이 자신들을 보면 헛걸음을 한 분노를 담아 일단 공격부터 하고 볼 것이다.
“아무래도 다음 기회를 잡아야겠군.”
아쉬움을 표한 이드는 라미아에게 눈짓을 한 이후 에단의 눈앞을 손으로 가리더니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내리그었고, 그 손을 따라 새파란 도깨비불 같은 불꽃이 튀었다.
마치 잠든 것을 확인하듯 가벼운 손짓이지만, 그 속에는 감히 추측하기 힘든 무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강시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에단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드는 그런 에단의 허리를 감아 옆구리에 끼고는 산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라미아는 자신들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꼼꼼히 마법적 처치를 하고 블링크로 이드의 뒤를 따랐다.
공을 들여 만든 몸이고 무공도 제법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이드의 경공을 따를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마법이 무공보다 편해서였지만. 그런 점을 보면 마법사가 천직이다 싶다.
세 사람이 사라진 직후 요새의 성벽 위에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성벽 아래와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고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런, 쌍! 아무도 없잖아! 빌어처먹을 년이 괜히 분위기 잡아 가면서 날 골탕 먹였겠다. 오냐, 내가 이번에는 진짜 가만 안둔다. 성주가 아니라, 골든 아이가 와서 말려도 이젠 못 참아!”
자기 스스로 화를 돋운 남자는 붉은 천을 본 투우처럼 맹렬한 기세로 성에 들어갔다.
“휴~ 간발의 차였네.”
그 모습을 나무 그림자 속에서 확인한 이드가 땀 한 점 없는 말간 이마를 닦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발각될 뻔하고…….”
그제야 마비가 풀리는 듯 삐걱삐걱 어깨와 허리를 돌리던 에단이 말했다.
“아무도 예측 못 했던 일이야. 불가항력, 천재지변엔 사과할 거 없어. 결과적으로 발각된 것도 아니고.”
“……”
에단은 그 말에 땅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이드의 말처럼 발각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순순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몇 번의 오보와는 다르다. 뭔가를 잘못 보는 것과 초인력이 흡수당하는 것은 질적으로 다른 문제이니까.
아직은 저들이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만, 곧 분위기는 변할 것이다.
이드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숙인 에단을 보다 분위기도 바꿀 겸 궁금한 점을 물었다.
“이번 흡수, 뭐 느낀 거 없어? 앞의 흡수와 다른 점 같은 거.”
“모르겠습니다. 앞의 흡수는 워낙 짧은 시간에 끝나는 일이라 뭔가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이번 흡수는 뭐가 달랐어요?]
“다르다고 할까…… 처음 느꼈어. 흡수된 초인력이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늪으로 빠져서 사라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
이드는 늪이라고 표현한 에단의 말이 척추 속으로 스며든 초인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직감하고 자신이 느낀 것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에단이 머리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는 말했다.
“그럼・・・・・・ 흡수된 초인력이 제 머릿속에 있다는 말입니까?”
“일단 내가 감지하기로는 그렇지만 확인해 봐야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비올라를 부르죠. 에단의 상태를 보려고 인형을 만들어 둔 게 있으니까 그것도 같이 살피면 뭔가 나올 거예요.] 라미아의 말처럼 이곳에 언제까지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러자. 일단 잠깐 오두막도 비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요새를 슬쩍 돌아본 이드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