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37화
774화
이드는 딱딱해진 헹크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너랑 저놈들. 어디에 소속된, 뭐하는 놈들이냐?”
“……”
“이만한 병력이 웅크리고 있다면 분명 소속도 있을 거고, 목적도 있을 거 아냐.”
“……”
“이봐, 방금 혀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말 잘하던 인간이 왜 말이 없어? 우리를・・・・・・ 아니, 초인력 흡수 초인기를 노린 이유는?”
“…….”
이드는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문 헹크를 보며 혀를 찼다.
‘대답 듣기는 틀렸네.’
헹크 같은 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았다. 아마 지금 겨우 버티고 있는 그의 부하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인다고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이봐, 이봐.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면 너희들이 승복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 네가 했던 최소한의 확인처럼 나도 힘을 쓰고, 귀찮음을 감수한 대가가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다른 놈을 잡고 물어야 해?”
이드의 말에 그제야 헹크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우리 이름은 바벨, 세상으로부터 초인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입니다.”
“……멍청한, 대체 언제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의 답에 이드가 미간을 구겼다. 과거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초인은 대륙의 무력을 대표하는 힘 중 하나로, 각국에서 애지중지하는 전력이다. 절대 누군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자들이 아니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초인들이 보호받아야 한다면 정말 힘없는 평민들은 어떻게 하라고?
지금 헹크의 대답은 실로 철 지나 케케묵은 슬로건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그렇다 치고, 무슨 목적으로 저 요새에 모여 있는 거지? 날 노린 목적은?”
다시 물은 이드의 말에 헹크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팔목이 부러진 팔을 강력한 힘으로 뜯어 냈다. 살과 근육이 걸레처럼 찢어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표정으로 이드의 발 앞에 뜯어 낸 팔을 놓았다.
이드는 발 앞에 놓인 팔에 황당해하며 말했다.
“어쩌라고?”
“우리가 패배했고, 당신에게 사죄한다는 ‘확인’이다. 이 이상 당신에게 해 줄 말은 없다.”
즉, 이 이상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각오를 보인 것이다.
이드는 뜯어 낸 팔이 원래 크기로 줄어드는 것을 보다 말했다.
“당신, 철저히 구식이군.”
거기다 행동 하나하나가 과격하다. 난데없는 폄하에 헹크의 눈썹이 꿈틀댔다.
‘터프한 남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는 좀 더 스마트해야지. 적당히 넘길 수 있는 건 넘겨야 물러서 줄 거 아니겠어? 저렇게 뻣뻣하게만 굴어서야, 쯧쯧.’
이드는 내심 혀를 찼다. 당장 팔을 뜯어 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이드가 보기에 그것은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퍼포먼스일 뿐이었다.
만약 중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팔이 잘리면 외팔이가 되니까. 하지만 그레센은 팔이 잘렸다고 영원히 외팔이로 살지 않아도 된다. 신의 은혜를 대신하는 신관이 있고, 마법사가 있으며, 기기묘묘한 초인기를 가진 초인들이 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뜯어 낸 팔을 붙이거나 새로 만들어 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분명 그에 대한 대가가 작지 않겠지만, 팔 뜯기 한 번으로 비밀도 지키고, 병력의 손실도 최소로 줄일 수 있다면 어지간히 괴팍한 상사가 아니고서야 팔 하나 정도는 회복시켜 줄 것이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팔을 잘라봤자.
이드는 어깨에서 피를 폭포처럼 쏟아 내는 헹크를 무시하고 라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실드에 붙어 근근이 버티고 있던 자 중 하나가 실드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톰과 검은돌의 손으로 떨어졌다.
라미아를 통해 이드의 말을 전해들은 그들은 최선을 다해 남자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토하게 만들었다.
“……흑흑, 이제 더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건 다 말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마법사와 기사, 암살자에게 돌아가며 취조를 당한 남자가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리며 두 손 모아 애원했다.
톰은 그가 더 아는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라미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라미아를 통해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들은 이드는 아쉬운 한숨을 토했다. 취조를 당한 남자에게 알아낸 것도 바벨이라는 이름과 낡고 고루한 슬로건뿐. 과연 한 요새에서만 수백의 병력을 운용하는 만큼 정보의 통제가 철저했다.
이드에겐 아쉽지만 현명한 행동이다. 두 명만 알아도 비밀이 아니라는 말처럼 수백, 수천의 입 중 어느 입에서 비밀이 새어 나갈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까지 바벨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다.
같은 초인임을 강조하던 헹크의 말도 그렇고. 이드는 어쩌면 초인이라는 동지 의식이 가지는 힘이 생각보다 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드는 그때까지 피를 흘리고 있는 헹크를 보았다. 남자를 취조하는 동안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 오우거처럼 변한 몸만큼이나 실로 괴물 같은 체력이다.
‘혹시 저 팔도 뜯어 낸 자리에 가져다 대면 그냥 붙는 거 아냐?’
어쩐지 그럴 것 같다. 헹크에 대한 의심을 키우며 이드가 입을 열었다.
“목표에 대한 조사는 부실하면서 정보 통제는 확실하네. 쩝, 아쉽지만 여기서 물러나지. 얼마나 거대한지 모르는 곳과 끝까지 싸워 봐야 남는 게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하지. 다음은 없어. 오늘의 실수도 있는 만큼 나에 대해 알게 되면 그쪽에서 먼저 물러나야 할 거야.”
“그 말씀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그를 위해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훗, 싫다. 바벨과 초인을 위한다는 말 이외에는 전부 침묵해 놓고, 나에겐 이것저것 다 내놓으라고? 이름도 진짜 얼굴도 알려 주지 않는다. 이번에 너희들이 날 추적한 것처럼 나다 싶으면 그냥 피해.”
이드야 어느 곳에 어떤 이름으로 나서게 될지 모를 에단을 두고 한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이름도 얼굴로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서 못하겠다고?”
이드가 하얀 이빨을 번뜩이며 노려보았다.
“하겠습니다. 반드시…….”
헹크가 고개를 숙였다. 억지를 부리든, 투정을 부리든 결국 패자는 승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거절하는 것은 죽겠다는 말과 같으니까. ‘성주와 라울 님이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끝이다.’
헹크는 내심 이후의 책임을 두 사람에게 내던졌다. 평소 책임감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선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책임자가 아닌가!
‘저들의 뒤를 추적하는 일만 아니라면 분골착근이든 고문이든 해 볼 텐데. 쉽게 불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털어서 나오는 정보가 뒤를 추적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보다 낫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물끄러미 헹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이드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접었다.
그러나 좀 더 헹크를 몰아붙여 명령을 내린 라울의 이름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지금의 결정과는 확실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드는 알지 못했지만, 참으로 아까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드는 헹크를 지나치며 결계처럼 일대를 가두고 있던 회오리를 소멸시켰다.
구르르르릉-
만류상생의 힘에 압축되어 있던 공기가 자유를 찾으며 천둥소리가 났다. 뒤이어 폭풍에 휩쓸려 허공을 떠돌던 잡동사니와 사람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떠, 떨어진다악!”
“으아아아악!”
쿵! 콰당!
떨리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행크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9조에서 흡수한 초인력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저 거대한 회오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하다니・・・・・・ 실로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애초에 저런 괴물을 우리만으로 잡아 오라는 명령이 잘못이다. 저자는 검후와 같은 절대자다.’
이드의 뒷모습에서 검후를 떠올린 헹크는 슬그머니 뜯어 낸 팔을 집어 들었다.
라미아들에게 다가가던 이드가 헹크의 행동을 감지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싸늘하게 말아 올렸다.
‘역시 쇼였던 거네. 곰같이 생겨서는 여우 짓을 하는군.’
그러고 보니 곰이라는 생물 자체가 영리하고 교활하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드가 다가가자 라미아가 실드를 해제했다.
실드를 잡고 회오리를 버티던 적들은 이드의 눈치를 보고는 슬금슬금 길을 비키더니,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 헹크 곁으로 물러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스터.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실드가 사라지자 단숨에 이드에게 달려온 톰이 물었지만, 답은 라미아에게서 나왔다.
[이드의 몸에 닿은 공격도 없는데, 불편한 곳이 있을 리가 없죠. 수고했어요. 우리가 노렸던 목적은 모두 이뤘네요.]
“힘쓰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으니까, 어려울 것 없지.”
“저 많은 적을 상대하는 일이 쉬운 사람은 마스터뿐입니다.”
톰이 힘없이 웃으며 말하자, 암살자 두 사람도 동감이라는 듯 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이드가 선보인 무지막지한 힘의 규모가 그저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이드는 기운 없는 세 사람의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라미아 곁에 섰다.
“이제 멋지게 퇴장하면 끝이야. 준비됐지?”
[저야 언제든 준비되어 있죠.]
언제나 듬직한 대답을 들려주는 라미아의 말에 만족한 이드가 헹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그래도 멀쩡한 모습의 부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럼 다시 보는 일 없도록 하자고.”
이드가 처음 그들을 만날 때처럼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헹크와 그의 부하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렬한 마나광과 함께 이드들이 사라졌다.
“후우..”
이를 확인한 헹크가 긴 한숨과 함께 모로 쓰러지며 초인기를 사용하기 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헹크 대장……! 여기! 포션과 치료사를 데려와 대장이 쓰러졌다.”
“떨어진 팔도 얼른 챙겨.”
“젠장, 부상자가 너무 많아.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
“진정해.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이니까.”
헹크는 소란스러운 부하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초인기가 풀리자 뒤늦게 뜯겨 나간 어깨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이드의 생각처럼 초인기를 사용할 때 그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일 년은 꼼작 않고 쉬고 싶군.”
휴가를 결심한 헹크는 대량의 출혈과 통증에 그대로 기절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요새의 침대 위에서 깨어난 헹크는 가장 먼저 달려온 성주와 라울에게 시달려야 했다.
이미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텐데도 두 사람은 헹크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시 그 자리에서 가장 강한 자가 헹크였기 때문에 헹크의 생각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 헹크를 괴롭힌 라울은 그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그는 제가 보는 앞에서 흡수한 초인력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초인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절대, 절대 함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알아. 그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두 눈을 번뜩이는 라울의 모습은 헹크가 보기에 절대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의 일은 그의 것이 아니었기에 묵묵히 눈을 감았다. 정말이지 그 괴물 같은 자와는 더 이상은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