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71화
808화
희번뜩. 스폴의 눈이 하얗게 번뜩였다.
“뿌득, 다시 말해 보라. 뭐라고?”
심상치 않은 스폴의 반응에 은색 기사단을 조롱하던 기사는 내심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초인 기사단 때문에 너무 흥분했던 것이다. 주변을 살핀 기사는 곧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초인 기사단과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었다.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도 충분히 멋진 모습이지만, 혈기 넘치는 단순한 기사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 정도야 해 주지. 주군도 지키지 못한 것들이라고 했다. 왜, 자존심 상하나?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닌 걸 어쩌겠어. 안 그래? 으하하하!”
그는 일부러 크게 웃으며, 동료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 그렇지. 하하하.”
동료 기사들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은색 기사단을 걸고넘어진 거야!’
‘이 미친놈들 때문에 나도 은색 기사단에 찍히겠구나. 잘 보여도 모자를 여기사들에게 이게 무슨 꼴이야!’
‘으아, 젠장. 다 끝이야. 다 끝이라고. 저 미친 새끼는 왜 검후 님까지 끄집어내는 거야!’
기사들은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었다.
은색 기사단이 어디 보통 기사단인가, 미모도 대단하지만, 실력까지 다른 오색 기사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괜히 기세에 밀려 조롱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몇몇 기사들은 자신들을 곤란한 상황에 빠트린 동료들에 대해 원한을 가졌다. ‘일단 이 일만 넘기면 처음 은색 기사단을 물고 늘어진 놈을 찾아서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스폴은 눈을 질끈 감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검을 뽑아도 벌써 뽑아서 목을 베거나, 사지를 부러트려도 모자랐다. 하지만 참았다.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킬 기회도 없었지만, 일단 틀린 말은 아니니까. 지금도 검후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검후의 일은 그녀와 은색 기사단의 가슴 깊이 박힌 가시였다.
이 문제로 그녀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나서, 탈모로 고민하는 20~30대 남녀의 스트레스 이상이었다.
이번 토벌 역시 검후에 대한 수색의 연장선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고, 모든 일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곳곳에서 노력 중이었다.
현재 그녀가 참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여기서 검을 뽑으면 은색 기사단을 조롱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분노를 풀 수 있겠지만, 호위 기사단의 구성에 잡음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서는 은색 기사단의 사기에 문제가 생긴다. 힘든 일이 있을수록 당당하고 여유로워야 하는 법.
조용히 눈을 뜬 스폴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뭐, 뭐?!”
순간 기백에 밀린 기사가 움찔 놀라며 반응했다.
“지금부터 그대의 말을 정정할 기회를 주겠다. 그대는 지금 은색 기사단의 주군이신 검후 님에 대한 불확실한 소문을 언급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못한 유언비어에 대해서 취소하기를 바란다.”
즉, 검후의 납치, 실종에 대한 내용을 정정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은색 기사단이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도 자연 소멸하는 것이니까.
‘유언비어는! 이미 소문 다 났구먼!’
이미 검후의 소문은 어지간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소드 팰러스나, 황궁에서 인정한 것도 아니다.
‘……취소할까?’
그렇지 않아도 찝찝해하던 기사는 순간 갈등했다. 주변 기사들 역시 그를 향해 취소하라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가 다수의 의견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은 순간이었다.
“뭔 개소리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인데, 취소는 개뿔!”
기사들 속에서 걸쭉한 목소리가 뽑혀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황색 갈기 기사단의 전원이 속으로 악 소리를 질렀다.
어디나 사람이 모이면 그 중 한둘은 끼어 있는 또라이. 모두 좋아할 때 불만을 쏟아내고, 모두 긍정을 말할 때 홀로 부정을 말하는 미친놈이 꼭 끼어 있는데,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놈이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 새끼 입좀…….’
“기사가 입만 살아서는. 하여간 여자는 어쩔 수 없다니까, 너희들이 우리 호위 기사단에 왜 뽑혔는지도 모르지? 너희들은 시녀야, 시녀. 전장까지 시녀를 데려가지는 못하니까 그년들 대신 데려가는 거라고. 알겠냐?”
순간 넓은 수련장이 고요해졌다.
제때 입을 봉하지 못한 기사들은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미친놈인 줄은 알았지만 은색 기사단을 시녀라고 비하할 줄이야!
꼴깍.
마른침을 삼킨 기사들의 눈이 은색 기사단을 향했고, 거기서 살기를 뿜는 은색 기사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마나 살기등등한지
트레이드마크인 은색 파츠 아머가 검은색으로 보일 지경이다.
‘마, 망했다.’
기사들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디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황색 갈기 기사들을 이끌고 온 상급 기사 베르나가 덜덜 떨리는 턱을 겨우 움직였다.
“크, 크흠. 지, 지금 말은…….”
“조용.”
스르릉,
억지로 입을 여는 기사의 말을 막은 스폴이 조용히 검을 뽑았다.
“좋은 검을 두고 길게 말할 필요 없잖아? 설마 네놈들은 하인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웃어넘길 수 있나 보지?”
당연히 못 한다. 감히 기사에게 하인이라는 놈이 있다면 우선 목부터 베고 난 후에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
“물론 그럴 수는 없겠지만, 상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겠소. 우리 기사가 흥분해서 말이 과하긴 했지만, 그는 평소 폭언을 자주 하는 자이니 은색 기사단에서는 그만 검을 거두시오. 설마, 황궁 안에서 제국의 기사들끼리 피를 보자는 말이오?”
“흥, 폭언하는 자라. 그럼 당신은 달변가에 바람둥이인 모양이야. 말이 매끄러운 걸 보면. 하지만 말발만 세우다 보니 기사가 명예를 위해 피를 보는 곳에 장소의 구별이 없다는 건 모르는가 보군. 거기다, 잘 알아 두라고. 여긴 반짝거리는 대리석이 깔린 대전이 아니라 기사들이 피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걸.”
스폴은 말을 끝냄과 동시에 검을 들고 달려 나갔다.
어지간하면 참으려 했지만, 상대의 조롱은 선을 넘었다. 그녀는 이 일이 문제가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으아아아아~!”
그런 스폴의 뒤를 따라 은색 기사단이 검을 뽑았다. 황색 갈기나, 청색 깃털처럼 요란한 욕설도 없었다. 조용히 실력으로 보여 주겠다는 듯 강렬한 기합이 뿜어졌다.
“빌어먹을! 무조건 막아! 방어만 해! 뒤에 있는 놈들은 테러발 개새끼가 절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악을 쓰듯 명령을 내린 베르나가 검을 들고 스폴을 향해 달려 나갔다.
쩌러!
우선 검을 부딪쳐 스폴을 막으려던 베르나는 검을 통해 느껴지는 힘에 이를 악물었다.
‘강하다. 최소 나와 같은 상급 기사다.’
베르나는 상대 이름이 궁금했지만, 참았다. 그리고 자신과 스폴을 지나치는 여기사들을 보며 급히 입을 열었다.
“멈추시오. 서로 여기까지 하고 멈춥시다. 이 이상 일이 커지면 서로 곤란하오!”
“곤란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니까.”
퍽!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르나를 밀어낸 스폴이 그의 복부를 차올렸다.
“커헉, 젠장! 알았소, 우리 잘못을 인정하지. 그러니 멈추라고!”
씨익.
버럭 소리치는 베르나의 말에 스폴은 냉소하고는 찌르기로 그의 말에 답했다.
인정한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아, 예. 하고 넘어갈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테러발인가, 테러블인가 하는 놈의 목이라도 내놓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상급 기사로서 시녀라고 비하당한 부하들의 분노를 풀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따다다당.
기관총 같은 스폴의 찌르기가 이어졌다. 최선을 다해 그녀의 공격을 막아 내던 베르나는 옆구리의 옷이 길게 찢어지는 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태세를 전환해야 했다.
“빌어먹을.”
그리고 그가 막 스폴의 공격에 반격을 가하려는 찰나.
“청색 깃털 기사단 소속 기사 25명이 명예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련장에 울렸다.
“명예 후작…… 님?”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 있던 황색 갈기 기사단과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모였던 이유가…….’
‘망했다.’
‘오늘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뒤늦게 자신들이 수련장에 모인 이유를 떠올린 기사들은 암담함을 느껴야 했다.
“며, 명예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은색 기사단과 황색 갈기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장난치다 들킨 아이들처럼 급히 검을 감추고는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 주고는 말했다.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왜 멈춰? 하던 거 계속하지?”
태연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말에 기사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할 텐데.
그렇다고 정말 하던 짓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랬다가는 진짜 몽둥이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려서부터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황색 갈기 기사단의 상급 기사 베르나가 고합니다. 저희 황색 갈기 기사단과 은색 기사단 사이에 오해가 생겨, 명예 후작님께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부디 화를 푸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
잘근잘근 입술을 씹던 베르나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니, 나는 전혀 화나지 않았다. 베르나라고 했던가? 경은 내 말을 달리 해석한 모양인데, 나는 말을 돌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던 일 계속하라.”
“예?”
순간 이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베르나가 버벅거리는 사이 스폴과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일어나 이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검을 들었다.
“명예 후작께서 허락하셨다. 일어나라.”
“자, 잠깐, 은색 기사단의 상급 기사는 멈추시오. 명예 후작님, 이 싸움은 오해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절대 싸울 일이 아닙니다. 부디 말려 주십시오. 황녀 전하를 위해 힘을 더해야 할 기사들이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급했는지 다다다 쏟아내는 베르나를 보며 이드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스폴 경이 바람둥이 같은 달변가라고 했던가? 그 말이 틀리지 않군.”
오싹.
베르나는 이드가 스폴이 했던 말을 안다는 사실에 등골이 짜릿했다.
“그런데 베르나 경, 어째서 자네 말은 앞뒤가 다른 거지? 자네와 자네 기사단은 왜 힘을 더해야 할 기사단을 모욕했는가?”
“그, 그것은…….”
“그리고 자네는 잘못을 범한 기사를 벌하겠다는 말도 없고, 오히려 그를 감싸고 있지. 그것이 함께 힘을 합해야 할 동료 기사단에 대한 예의인가?”
“……”
“그렇다면 내 판단에는 스스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은색 기사단의 실력 행사는 옳다고 보는데, 자네 생각은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