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74화
811화
“아이넬 기사단 부단장 스폴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녀에게 인사를 올리는 스폴을 따라 호위 대형을 짜던 기사들도 멈추어 무릎을 꿇었다. 백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제법 볼만했다.
각각 소속도 다르면서 따로 모여서 연습이라도 한 것 같다.
“일어나세요. 나의 기사들의 힘찬 목소리를 들으니 매우 믿음직스럽군요.”
“황녀 전하께 충성을!”
나의 기사라니. 황녀의 친위 기사단이 아니고서야 언제 그런 말을 들어 볼까. 기사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부르르 떨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쉴라가 이드를 향해 소근거렸다.
“설마 황녀 전하께서 저희 대련에 참가하시는 건가요?”
“왜요. 황녀 전하는 대련에 참가하면 안 됩니까?”
이드는 놀라는 스폴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 물었다.
“안 될 건 없지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나는 평민이나, 황족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다. 가끔 신분보다 더 지독한 재능이란 것으로 차별을 둘 때도 있지만 보통은 똑같이 땀 흘려 수련하고, 똑같이 실험실에 처박혀 연구에 힘써야 마나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대련도 마찬가지다. 최대한 다치는 것을 조심하긴 하겠지만, 대련도 수련의 필수 요소다.
그리고 스폴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황족의 대련은 일대일의 대련이지, 이런 집단 전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황족의 수련은 일종의 교양의 연장선이며, 건강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밀리아리아 황녀처럼 본격적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케이스가 절대 흔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위험해도 실전만큼 위험할까요? 다치려면 차라리 여기서 다치는 게 낫죠. 실전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하는 게 대련 아닙니까. 조금 까지고 피가 나더라도 여기서 하는 것이 좋아요. 거기다 오늘 황녀 전하는 어디까지나 조연이라고요.”
주연은 일리나와 아이넬 기사단이다. 그때 황녀가 스폴에게 다가와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스폴 경.”
누가 들으면 오해할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황녀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운 미소가 가득했다.
기사의 표본 같은 쉴라와 달리, 사차원적인 부분이 있지만 밝고 장난기 많은 스폴은 쉴라와 다른 의미로 황녀가 좋아하는 기사였다.
“저도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답니다, 황녀 전하. 오랜만인 대신 황녀 전하의 기사로서 돌아왔으니, 그간 소식이 없었던 무례는 용서해 주십시오.”
“호호호, 당연하지요. 스폴 경이 내 기사가 된 기쁜 날인걸요. 오늘은 모험담도 들려주고 궁에서 자고 가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황녀궁의 음식이 그리웠는데, 당연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황녀와 기사라는 관계를 넘어선 듯 보이는 친근한 모습에 지켜보던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사로만 구성된 은색 기사단의 특성상 존귀한 여성들과 친밀하다는 것은 알지만, 저렇게 격이 없는 모습을 보일 줄이야.
부단장에 대한 존경심이 쑥쑥 커지는 기사들이었다. 명예를 존중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존심이 강한 기사지만, 역시 인맥의 힘을 무시하긴 힘들다.
거기다 어지간한 인맥이라야지! 무려 황가의 넘버3 황녀가 아닌가.
‘저희는 처음부터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스폴 부단장님!’
기사들이 뜨거운 시선으로 스폴을 바라볼 때 이드가 황녀를 중앙 단상으로 이끌었다.
“오늘부터 이들은 황녀 전하의 기사들입니다.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다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단의 이름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있었는데 잘되었다.
이드의 말에 황녀가 익숙한 듯 단상에 올라 기사들을 향해 짧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공식적인 자리가 많은 황녀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전장에서 자신을 지켜 줄 기사들이라는 것 때문인지 황녀는 권위적인 모습보다 친근한 모습으로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고한 모습만 보다 귀여운 모습을 보이자 반응이 뜨거웠다. 황자가 아니라 황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자, 그럼 황녀 전하께서도 대련에 참가하기 위해 오셨으니 빨리 시작하도록 하지요. 스폴 경은 기사들의 대형을 마저 조정하고, 일리나도 위치로 가 줘요.”
“예.”
“알았어요.”
이드의 말에 일리나와 스폴이 즉시 움직였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황녀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드를 향해 물었다.
“전 뭘 하면 되나요?”
황녀가 손에 쥔 검을 달그락거리며 말했다. 이드가 말만 하면 당장에라도 선두에 선 기사들과 함께 검을 휘두를 기세다.
하지만 이드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를 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선 단상에서 내려오세요. 호위는 기사도 잘해야 하지만, 호위 대상도 잘해야 합니다. 기사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것은 제발 자신에게 화살이나 마법을 날려 달라고 애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에……”
황녀가 노골적으로 실망하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아무래도 그녀를 적당히 위로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 이드가 말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방심하지는 마십시오. 실전이라면 적이 언제 어떻게 황녀 전하를 노릴지 모르니,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그 누구보다 황녀 전하께서 먼저 스스로 움직이셔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자신 있어요. 그런 때를 위해 배운 무공이니까요.”
언제 실망했냐 싶게 황녀가 의욕을 불태웠다. 이상하게 무력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굉장히 허술한 황녀다. 그만큼 무력에 대한 욕구불만이 강하다는 뜻.
하지만 그 욕구불만도 이번 토벌에서 실전을 거치고 나면 사그라들 것이다.
‘어쩌면 싸우는 걸 두려워하게 될지도 모르지.’
전장의 광기는 어떻게 말해도 모자랄 정도로 무섭다. 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자도 결코 적지 않다. 황녀가 그 속에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적이 된 후작 부인의 실력을 직접 보게 된다니. 정말이지 신나는 경험이에요.”
뭐, 저 상태를 보고 있으면 전쟁 공포증 같은 것에는 절대로 걸릴 것 같지 않지만 말이다.
“아이넬 기사단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스폴의 보고에 이드가 기사단을 살폈다.
기사단은 세 개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안에서 은색 기사단이 방어와 함께 황녀에 대한 초근접 경호를 하고, 그 앞에서 두 개 기사단이 검과 창이 되어 적을 무찌르는 형태다.
기발할 것 없이 철저하게 기본에 충실한 형태지만, 오늘 소집되어 호흡 한 번 맞춰 보지 않은 기사들에게는 저것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에 대련이 끝나면 아이넬 기사단이 가진 장단점도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좋네요. 지휘는 스폴 경이 합니다.”
“단장님이 있으신데요?”
“상황에 따라서 제가 빠질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때를 대비한 거라고 해 두죠. 그리고 아무래도 기사들을 움직여서 아내와 싸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내가 폭력 남편도 아니고.”
일대일도 아니고, 수십 명의 기사들을 지휘해서 아내와 싸우다니. 아무리 대련이라도 보기 좋지 않다.
“후훗, 옳은 말씀이군요. 이해했습니다. 오늘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제가 지휘하도록 하겠습니다.”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스폴이지만,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는 미소가 아닐 수 없다. 이드는 스폴을 한 번 쏘아본 후 일리나에게 다가갔다.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기사들과 달리 일리나는 고요히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하고, 잘 부탁해요.”
“걱정 말아요. 미리 정해 둔 대로 하면 되는 거죠?”
“당연하죠. 철저하게 해 버려요.”
엄지손가락을 든 이드가 실로 상쾌한 얼굴로 말했다.
대련을 계획했을 때부터 일리나가 기사단을 상대하는 것을 정해 두었었다. 그녀의 실력을 알아야 일리나에 대한 기사들의 불만이 사라질 테니까.
거기에 더해서 일리나에게 패배하고 나면 황색 갈기나 청색 깃털이라는 명성 높은 기사단의 기사가 아닌, 강자에 대한 두려움을 아는 약자가 되어 긴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황녀를 호위하는 일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지나친 자신감은 빈틈을 만들지만, 적당한 두려움은 모든 상황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드는 즉석에서 일리나에게 한 가지 일을 더 해 줄 것을 부탁했다.
“뭔데요?”
“기회가 생기면 황녀를 날려 버려요. 황녀에게도 말했지만, 우선 호위 대상이 자신이 보호가 필요한 존재라는 걸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마 황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일리나가 진심으로 자신을 상대해 줄 기회가 생겼다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최대한 무섭게 던져 볼게요.”
이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일리나를 보며 ‘적당히’라는 말을 더해야 할까에 대해서 잠시 고민해야 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
괜히 일리나를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황녀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호명하는 사람은 전투 불가니까 빠지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고, 대련을 시작합니다!”
수련장 가로 나온 이드가 큰 목소리로 대련의 스타트를 끊었다.
그 옆에는 석탁이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인 이드가 필기구를 끄집어냈다. 아이넬 기사단의 기사들이 모두 대련에 빠진 사이 그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부터 자신의 부하가 된 기사들의 능력과 특징을 파악하는 것. 그것이 단장으로서 이드가 가진 첫 의무였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꼭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란 거지.”
이드가 연필을 입에 물고 까딱거리는 순간 공격자인 일리나가 먼저 움직였다.
보통 대련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일대일, 혹은 이대일이다. 좀 빡세게 훈련을 한다고 해도 다섯 명을 상대하는 정도다. 그것도 난전을 대비한
훈련이지, 정말 다섯 명을 상대로 이기라고 하는 훈련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오대일도 아니고, 하나의 기사단이 한 사람과 대련을 시작하고 있다.
기사단에 속하게 된 기사들은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난감한 한편 기대되었다.
소검후에 대해 떠도는 소문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드가 직접 이 대련을 준비했다는 것은 일리나가 그만큼 강하다는 말일 테니까. 개인 대 집단의 대련이 성립할 정도의 강자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할짝.
가장 선두에 선 기사가 기대와 긴장에 마른 입술을 적시며 달려오는 일리나를 향해 검을 세웠다.
타다다당!
한 호흡에 수십 번의 공격이 오고 갔다. 기사의 검은 단단했지만, 일리나의 검은 단단한 강철 벽에서 빈틈을 찾을 정도로 섬세하고 빨랐다.
쉴 새 없이 빈틈을 찌르는 공격에 첫 공방을 주고받은 이후로 기사는 연신 밀렸다.
그러나 분명 실력에서 밀리고 있음에도 기사의 얼굴에는 위기감이 아닌 의아함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가세하지.”
그때 동료 기사의 열세에 다른 기사가 힘을 더했고, 일리나의 공격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합류한 기사의 표정도 미묘하게 변했다.
‘이건……………’
‘생각보다 할 만하잖아?’
눈을 마주친 두 기사의 마음이 오고 갔다.
‘역시 소문이 과장된 것인가?’
분명 강하긴 하지만, 다수를 넘어 단체를 상대할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에 대해 적은 이드가 다시 연필을 입에 물었다.
“유인과 함정. 걸려들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일리나가 상대하던 기사들을 강하게 밀어내고 다른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의 실력을 두 기사에게만 보일 수 없다는 듯 두 개 그룹으로 나뉜 기사들 사이를 종횡무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