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76화
813화
보이지 않는 힘에 밀린 기사들이 태풍에 휩쓸린 나무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그에 기사들이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다급하게 외쳤다.
“소드 배리어다!”
“가까이 가지 마!”
“공격 범위를 넓혀!”
그건 각자가 알고 있는 소드 배리어에 대한 공략 방법이었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소드 배리어지만, 원 소속 기사단이 기사단인 만큼 한 번씩은 겪어 본 것이다.
그러나 펄헴은 그런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소드 배리어가 저렇게 얌전할 리가 없지.”
그가 아는 소드 배리어는 단순한 방어 기술이 아니다. 만만히 보고 몸을 들이밀었다가는 갈가리 찢어 버리는 공방 일체의 기술이지, 사람을 얌전히 밀어내는 그런 친절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기사들을 말의 뒷발에 차인 것처럼 튕겨 낸 것일까?
“소검후께서 이제야 진짜 실력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펄헴처럼 한발 물러서 기사들을 살피던 고데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소드 배리어가 아니지?”
“예. 어처구니없지만, 내력의 밀도가 바뀌면서 기사들이 밀려난 겁니다. 솜방망이에서 강철 방망이로 바뀐 거죠.”
고데리가 초인인 펄헴이 이해하기 쉽도록 일리나에게 일어난 현상을 설명했다.
“지금부터가 진짜란 말이군.”
펄헴은 고데리의 말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니. 자신이 말을 하고서도 기가 막혔다.
그럼 지금까지는 뭐란 말인가? 지금도 2, 3조의 기사들이 일리나를 둘러싸고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의문을 가지는 순간 그것에 답하듯 일리나가 움직였다.
스르륵.
지금까지 막아내고, 피하던 기사들의 검 사이를 마치 유령처럼 지난 일리나의 뒤로 기사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누운 기사들은 자신들이 어딜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쓰러진 기사들은 조건반사처럼 일어나려 했다.
이드는 그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친절하게 사망 선고를 내려 주었다.
짧은 순간 서 있는 기사들이 절반으로 줄었다. 숫자가 줄어들면서 2조와 3조의 거리가 좁아져 한데 뭉쳤다.
“미치겠군.”
펄헴은 지금 상황이 지독한 꿈인 것 같았다. 전날 있었던 출정 파티가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소검후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전력의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아니, 소검후의 정확한 전력은 알지 못해도 자신들의 실력을 믿었다.
자신들은 자랑스러운 황색 갈기 기사단의 기사였고, 같이 싸우는 놈들은 꼴 보기 싫지만 실력은 있는 청색 깃털의 초인이었으니까.
거기에 수도 이쪽이 압도적이다.
자고로 다구리 앞에 장사 없는 법. 소검후가 강하지만 물량전과 차륜전이면 망신당할 일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무엇인가.
펄헴은 이마에 솟아난 식은땀을 닦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사실 그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 수의 힘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아무리 천재적인 전략가가 수를 쓴다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열 배는 몰라도, 과연 오십 배, 백배 천배나 많은 수의 적이
공격한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때는 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살아 돌아와도 두 손 번쩍 들고 백기를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의 폭력이 가능한 것도 마나와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버튼 하나로 도시 하나를 지워 버리는 시대에 병사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또 검과 마법의 극에 달한 자들에게도 수는 무의미하다. 그 앞에 일반 병사는 작은 레고 병사와 다를 바 없으니까.
펄헴도 그것을 알 것이다. 스스로가 마나의 축복을 받은 초인이며,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인데 모를 수가 있나.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경험하는 것의 차이는 컸다. 그 차이가 지금의 혼란을 만들었다.
“더 조밀하게 조여라. 소검후가 비집고 들 빈틈을 만들지 마라.”
“노아, 벤, 찰스는 기사들을 최대로 보조하고, 나머지는 화력을 높여! 이대로라면 적의 옷깃도 스치지 못하는 개망신을 당한다! 죽을힘을 다해!”
펄헴과 고데리가 악을 쓰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리나와 기사들 간의 실력 차는 악을 쓴다고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쿠쿠쿠쿠~
땅이 울리고 사방이 암흑으로 물들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와 함께 무지갯빛 공격들이 쏟아졌다.
일리나는 이름 없는 풀잎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던 감각으로 중심을 잡고서 초인기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일리나의 검이 초인기 사이를 지나자 검에서 뿜어지는 기묘한 기류에 휘말린 초인기가 태풍에 휩쓸린 잠자리처럼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3조 앞을 막아선 2조의 방패를 두드렸다.
무당의 도사가 보고 놀랄 절정의 이화접목이었다.
꽈꽝!
퍼어엉!
“으악!”
“화경으로 초인기의 목표를 바꾼다고? 저게 말이 돼?”
비명 속에서 일리나의 신기를 알아본 자가 현실을 부정했지만, 사실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목표를 바꾼 초인기에 5명의 기사가 이드에게 이름을 불렸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굉장하네.”
스폴은 일리나의 활약을 지켜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화원을 구한 일리나의 활약을 듣기는 했지만, 역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더 좋았다. 하지만 스폴은 놀라는 중에도 일리나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일리나와 아이넬 기사단의 전력을 냉정하게 분석 중이었다. 과연 아이넬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가장 우선해야 할 것도 기사단의 제1 목표이고,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제1 목표이지.’
그리고 아이넬 기사단의 존재 이유는 황녀의 호위다. 기사단의 존재 이유를 되새긴 스폴이 빠르게 판단을 끝냈다.
“1조 2열까지 전장에 합류한다. 나머지 기사는 황녀 전하를 모시고 즉시 현장을 이탈, 최대한의 속도로 안전 지대로 향한다. 1, 2, 3조는 그때까지 목숨을 걸고 적의 발목이라도 잡고 늘어져라!”
잔인하게 들리는 동귀어진 명령이었다.
“충!”
비록 대련이지만,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에 망설이는 기사가 없었다.
대답과 동시에 기사들의 분위기와 싸움 방식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적을 쓰러트리겠다는 것이 목표라면, 지금은 최대한 싸움을 길게 끌고 가겠다는 분위기다.
당장 방어가 두꺼워졌다. 공격의 횟수는 늘었지만, 출력을 반으로 줄여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늘렸다.
지금까지 조금 물러서서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펄헴과 고데리 역시 기사들과 함께 검을 들었다. “오래 버티진 못하겠군.”
스폴은 기사들의 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검후를 상대한 은색 기사단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이넬 기사단에 속한 기사들이 뛰어나긴 하지만, 은색 기사단보다 월등히 좋은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스폴을 포함한 은색 기사단은 검후와의 훈련을 통해 그레이트 소드 이상의 강자에 대한 대처 방법을 익혔다.
그렇다. 싸우는 방법이 아니라 대처 방법이다.
“싸움은, 전투는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스폴은 검후를 앞에 두고 검을 든 쉴라의 말을 분명히 기억했다. 그렇다고 그 말이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과연 소검후님, 굉장하군요.”
“그렇지? 다시 봐도 정말………… 환상적이야.”
“검후님을 떠올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황녀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소근거렸다.
“전투 중에 누가 잡담을 하나! 집중!”
“…….”
미간을 좁히며 기사들에게 주의를 준 스폴은 또다시 힘없이 쓰러지는 기사의 모습을 보다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드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리나 님의 실력은 정말 무섭네요. 듣던 것 이상이세요.』
『후후, 고마워요.』
일리나의 실력을 칭찬했는데, 왜 이드가 고마울까? 평소라면 그걸 꼬투리 삼아 놀렸을 스폴이 작게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래서 한 가지 궁금해졌어요. 지금 모습도 듣던 것보다 강한데, 지금 보여 주시는 것이 일리나 님의 전력인가요?』
스폴의 질문이 끝나는 순간 또 한 명의 기사가 쓰러졌다. 이번엔 2조가 아닌 3조에 속한 초인 기사였다.
몸을 강철로 바꾼 그는 공깃돌처럼 일리나의 검 끝에 매달려 나부끼다가 비명을 지르며 수련장 벽에 처박히고 있었다. 검 실력 이전에, 저 가는 팔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
“글쎄요. 스폴 경이 생각하기엔 어떨 것 같아요?』
『…… 일리나 님을 보면 검후님이 생각나요.』
이드는 애매한 스폴의 대답에 진자하게 일리나와 검후의 실력에 대해 생각했다.
일리나의 실력이야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럼 검후의 실력은?
직접 보지 못해도 어림짐작은 가능하다. 화원의 비밀 수련장에 남겨진 흔적과 검후의 숲에 남겨진 전투를 통해서다.
그렇게 헤아린 두 사람의 경지는 비슷했다.
반의 반 초식이 뭔가. 순간의 호흡의 끊어짐으로 생사가 오가는 강자의 세계에서 비슷하다는 말로 두 사람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그래도 검후를 직접 볼 수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짐작이라도 해 볼 수밖에.
아무튼 그렇게 비교한 두 사람의 수준이 비슷하다는 결론을 얻은 이드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경지가 비슷한 것일까?
일리나가 검후보다 검을 잡아도 수십 년 먼저 잡았고, 수련을 해도 수십 년 먼저 시작했으며, 무공도 일리나가 먼저 배웠는데 어째서? 그 공백을 메울 만큼 검후가 무공에 인생을 걸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뜻일까? 아니면 반대로 일리나가 게으름을 피운 것일까?
하나 확실한 것은,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드가 남긴 무공을 일리나가 어설프게 익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을의 엘프들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위해서 직접 인체 실험에 가까운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아는데, 게으름이 말이 되나.
오히려 개인의 노력보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인간과 엘프라는 종족간의 특성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무공은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발전되어 온 법칙이니까.
그리고 종합 전력을 따지면, 정령술과 기초 마법을 익힌 일리나가 검후를 앞서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무공의 우열에 정령과 마법을 끌어들이는 것도 꼴불견이다.
“이번 기회에 일리나도 무공의 증진이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어쩐지 일리나가 검후에게 무공으로 뒤진다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 못한 이드의 바람이었다.
그 사이.
일리나를 상대로 분전하던 기사들의 대부분이 수련장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검기와 초인기의 폭발과 충격에 굴러다니며 바닥 청소에 한몫을 하는 중이었다.
이제 남은 기사는 고작 아홉 명 사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스폴의 명령을 지키려 했다.
“이 앞으로… 헉헉..보내지 못합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기사 하나가 헉헉거리며 말했다.
부들부들거리는 손끝에서 초인기가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제법 대단한 의지가 아닌가.
일리나는 그런 기사의 모습에 화답하듯 단전을 활짝 열어 두 손에 잡힌 검으로 내력을 인도했다.
화아아악~
일리나의 검에서 붉은 꽃잎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와 수련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검기임이 분명한 꽃잎에서 아련한 향이 피어올랐다.
“세상에…….”
기사들은 누구 할 거 없이 환상적인 모습에 순간 압도되었다. 과연 이곳이 방금까지 무식한 폭력이 난무하던 수련장이 맞을까?
당연하다. 아무리 꾸며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
일리나는 난화십이식의 백화난무가 만들어 내는 환상에 숨어 황녀에게 다가갔다. 사방에 일리나가 뿌린 검기가 그득했기 때문이다. 모래사장에 모래를 뿌린 겪이랄까?
때문에 기사들이 황녀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일리나의 접근을 알지 못했다.
스폴이 일리나를 경계하며 눈을 부릅떴지만, 그녀가 일리나를 발견했을 때 이미 스폴의 어깨를 밟고 올라 그녀를 제압한 후였다.
“……무거운데, 내려와 주시면 안 될까요?”
“볼일만 보고 곧 내려갈 테니까, 잠깐만 참아 줘요.”
생긋 웃으며 양해를 구하는 일리나의 얼굴에 공포를 느낀 스폴이 입을 닫았다.
스폴의 허락을 획득한 일리나는 곧바로 스폴의 등 뒤에 숨어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던 황녀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앗?”
그리고 사정없이………..
“어? 아! 자, 잠・・・・・・ 꺄아아아악!”
하늘 높이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