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78화
815화
아이넬 기사단이 들어간 수련장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급조된 기사단에 최소한의 수련은 필요했으니까.
“그래도 불쌍하긴 하다. 황녀 전하를 지키는 일이 영광스럽긴 하지만, 출정 직전까지 지옥 훈련이라니. 으으~”
그런데 이어진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수련장에 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봐, 들었어? 황녀 전하께서 수련장에서 함께 수련 중이라고 하는군.”
“황녀 전하께서 정예 기사들도 비명이 나오는 수련에 함께하시다니. 정말 존경스러워.”
“그런데 우리는 그냥 있어도 되는 건가? 황녀 전하께서도 독하게 훈련 중이신데.
“아무래도 좀 눈치가 보이지?”
기사들은 묘한 불안감에 몸을 사렸다. 자연 흥청이던 분위기가 가시고, 유흥가를 떠돌던 기사들의 숫자도 줄었다.
귀족들도 행보관을 살피는 말년 병장처럼 살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단 하루 만에 수도의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솔선수범의 본보기가 이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기사들의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황녀 전하께서 본을 보이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우리 포야 기사단도 수련이다!”
그러던 중 결국 작은 기사단 하나가 사고를 쳤다.
이렇게 되자 여타 기사단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젠장~”
출정 전에 때 아닌 강도 높은 수련 폭풍이 불었다.
“출정 하루 전에 훈련이라니. 황녀 덕분에 희한한 경험을 하는군.”
훈련으로 흘린 땀을 목욕으로 씻어 낸 게일이 가운을 걸치고 나오며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이번 훈련은 그에게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쉽게 청색 기사단에 섞일 수 있었지. 그렇게 보면 고마워해야 하나?”
처음 그의 등장에 청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러던 것이 훈련이 끝난 후에는 그럭저럭 사라져 있었다. 잡념 없이 한바탕 같이 땀을 흘린 덕분이었다.
이러니 기사와 가장 빠르게 친해지는 방법이 같이 싸우는 것과 같이 땀 흘리는 거라는 말이 나도는 것이다.
“그나저나 직접 전장에 서서 싸우겠다니. 그녀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가?”
게일이 아는 황녀는 이렇게 과감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쩐지 황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단순히 며칠 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황녀가 그를 만나 주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낯설음이 묘하게 황녀를 더 가지고 싶게 만들었다. 한 번 놓쳤던 황녀를 다시 손에 쥐고 싶었다.
“그러려면 검왕자의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되찾아야지.”
다시 황녀를 얻으려면 그 자리가 꼭 필요했다. 소드 팰러스의 검왕자가 아닌 게일은 황제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았다. 마침 좋은 기회도 생겼으니,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특히 검후님이 복귀하지 못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이엔에게 들었던 스스로의 역할에 대해 떠올린 게일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역할은 초인파를 준비된 함정으로 유인 후 미완의 마탑에 넘기는 것이다.
게일은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쿵쾅거리던 심장이 아직 진정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당시 표정 관리를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설마 삼검왕이 토벌 대상과 손을 잡고 있을 줄이야. 밝혀지는 순간 역대급 스캔들 확정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게일이 돌연 쓰게 웃었다. 이제 자신은 모이엔이 내민 손을 잡고 스캔들의 일부가 되었으니까.
위험한 도박이라는 건 알았지만, 검왕자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삼검왕의 강력한 지지가 필요했다. 지지를 얻는데에는 비밀의 공유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다.
물론 삼검왕이 적당히 게일을 이용한 후 지워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게일은 삼검왕이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할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만에 하나 삼검왕이 그런 계획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걸 거두게 할 자신 정도는 있었다.
쪼로로록.
갈색의 독주를 단숨에 털어 넣은 게일은 인테그란 후작과 연결된 통신구를 꺼냈다. 하지만 통신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게일은 끝내 인테그란 후작을 부르지 못했다.
도저히 후작에게 자신의 실수와 결정에 대해서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거는 후작의 기대를 아니까.
이번 일은 소드 팰러스의 성주가 되기 위해 했던 일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번 일은 백이면 백 모두가 손가락질하고 욕할 음모였으니까. 적당히 여론을 유도하는 말랑말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상황을 위해서라도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다. 어설프게 알아 보았자 상황만 나빠질 테니까.
게일은 다시 독주로 잔을 채워 들었다.
“내일의 출정을 위하여.”
그리고 창밖의 어둠에 건배하고는 단숨에 잔을 비우며 생각했다. 혹시 초인파를 위해 준비한 함정에 이드도 같이 집어넣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더 이상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 놓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 속 좁은 열등감의 덩어리일 줄이야.”
게일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드 덕분에 황녀와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밌는 밤이었다.
“내일의 출정을 위하여.”
페시딘은 소드 팰러스의 검은 하늘을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이번 토벌에 대해 기대가 컸다. 당연히 황제를 비롯한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목적을 가진 기대였다.
이번 토벌만 잘 끝나면 자신의 목표에 한발 더 가까워지게 될 테니까.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투명한 포도주 잔 너머로 존 워스의 저택이 비치자 페시딘이 혀를 찼다.
항상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로서 믿음을 주는 두 사람 중 하나였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틀 전 페시딘은 적당한 때라 판단하고 두 동지에게 미완의 마탑과 있었던 거래에 대해서 말했다.
그에 마르텔은 별말이 없었지만, 존 워스는 페시딘의 결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평소 초인을 혐오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싫어하는 그라면 차라리 반길 줄 알았는데, 전혀 반대의 반응이었던 것이다. 반대의 이유에 대해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눈앞의 초인도 싫지만, 미완의 마탑에서 생산될 대량의 초인도 똑같이 싫어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더욱더.
존 워스의 입장에서는, 빗길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 질색하는 중에 지렁이를 키우는 농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야생초인이고, 양식 초인이고 초인이라면 무조건 싫다는 확고한 마인드!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존 워스가 가진 초인에 대한 시들지 않는 적개심은 천하의 페시딘도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그의 혐오감 때문에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존 워스는 그날부터 저택에 틀어박혀 버렸다.
초인과 관련된 일에 종종 보이던 모습이었기에 페시딘은 화를 내거나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그만 초인을 인정하길 바랐다.
자신이 단순히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으로 끝난다면 상관이 없지만, 소드 팰러스를 손에 넣어 당당히 세상 앞에 서려면 대륙을 지탱하는 힘의 한 축인 초인을 계속 냉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 워스가 계속 초인을 혐오한다면 그 아래 존 워스와 초인을 공존시키기가 힘들게 된다.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그는 절대 존 워스와 초인 둘 다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소드 팰러스의 어둠을 틈타 성벽을 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직전까지 그가 생각하고 있던 존 워스일 줄은 더더욱.
바닥을 기는 뱀처럼 은밀하게 소드 팰러스를 빠져나가는 존 워스의 한쪽 눈이 기묘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출정의 날이 밝았다.
수도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꽃을 뿌렸고,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황제와 각 신전의 대신관이 나서서 토벌대를 축복했다.
“출정하라!”
황제로부터 토벌대의 지휘권을 받아 든 록마틴 후작이 토벌대의 출발을 선언했다.
“출정이다!”
그의 말에 복명한 토벌대가 꽃비를 맞으며 수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기사와 물자, 잡일을 할 하인과 병사에 외국 참관인들까지.
정말 엄청난 대인원이 움직였다.
각국 참관인들이 아니었다면, 제국이 드디어 검은 속을 드러내며 전쟁을 하려 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을 것 같은 모습이다.
록마틴 후작과 프랑 기사단이 가장 선두에 섰고, 이드와 황녀는 그 뒤에 섰다.
원래는 황녀의 안전을 위해 토벌대의 중앙에 위치시키려 했지만, 이드가 거부했다. 겨우 몸과 마음을 실전에 맞춰 놨는데, 주변의 과보호 속에 묻혀 있다 보면 그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토벌대의 출정 소식은 곧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고, 각국의 왕들은 자신들이 파견한 공관장을 통해 토벌대의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다. 하지만 각국의 왕은 물론 대륙의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토벌대의 소식을 안 자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토벌대가 토벌해야 할 대상이자 적인 미완의 마탑이었다.
그들은 몰래 침투시켜 둔 첩자를 통해 토벌대가 성문을 넘는 순간 그 사실을 알았다.
적당한 밝기의 빛이 비추는 원형 탁자에 토벌대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결국 오는군.”
키릴 마탑주가 토벌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편안한 그의 말과 달리 탁자에 둘러앉은 자들은 심각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그들은 영상이 비치는 토벌대의 모습에 위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두려우냐?”
키릴이 위로하듯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자, 몇몇 마법사들이 속마음을 들킨 듯 흠칫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두려워 마라. 아직 마법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강하다. 우리 미완의 마탑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랜달, 바이트 타블렛의 상태는 어떠냐?”
“80%가량 완성된 상태로, 완성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토벌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완성은 불가능합니다.”
랜달이 잘라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바이트 타블렛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제자들아, 두려워 말고 때가 왔음에 기뻐해라. 약육강식과 강자존. 세상이 생겨난 순간부터 존재하던 진리에 따라 우리는 토벌대를 물리친 후 당당히 세상에 나가리라.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마법을 온 대륙이 알게 할 것이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것.
남의 것을 빼앗는 강도도 힘만 있으면 나라를 빼앗는 패왕이 되는 것과 같다.
납치? 인체 실험?
“허허허”
사악한 흑마법사의 전형적인 죄목이지만, 그것도 토벌대를 물리치면 바뀔 것이다. 대륙은 미완의 마탑의 마법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자, 준비해라. 우리의 마법을 증명할 시간이 다가온다.”
“예, 스승님.”
“예, 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