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27화
864화
“흥, 내가 말했잖아. 생명의 관은 쓰레기 중에서도 쓰레기만 모아 둔 곳이라고.”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던 비올라가 비웃으며 말했다. 자신이 설명할 때는 뭘 듣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어진 이드의 말에 비올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래. 네 말처럼 워낙 쓰레기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서 잘 실감이 나지 않으셨던 거지.”
“……”
자신의 말을 따라 쓰레기라 하는데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는지. 천재라 자신하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다.
비올라의 입을 닫아 버린 이드는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생명의 관 때와 다른 건 이쪽도 마찬가지. 토벌대의 현재 전력이라면 정신의 관을 물리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이드는 토벌대의 승리를 확신했다. 분명 정신의 관이 철저히 준비하기는 했다. 그러나 정신의 관과 토벌대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규모의 차이가 존재했다.
제국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기사단이 모두 모인 토벌대다. 대부분이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욕심을 내고 있기는 해도 그 힘은 결코 장난이 아니다.
“결국 얼마나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토벌을 마치느냐가 핵심이죠.”
“그리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고집하는 목적도.”
황녀가 쉴라의 의견에 말을 보탰다.
“일단 포로로 잡은 자들을 통해 저들의 목적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토벌대를 상대로 자신들의 마법을 증명하고 세상에 당당히 나서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드가 프리실라들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전하자 황녀가 고개를 저었다.
“거짓일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물론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제가 확인한 바로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드가 소심하게 주장했다. 일리나가 확인해줬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답답함이란 정말이지. 이드가 내심 가슴을 쳤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황녀는 더욱 이상하게 여겼다.
“사실이라도 문제입니다. 지금 세상에 힘자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마법사답지 않은 과격한 방법이지 않나요?”
“설령 그 방법이 통해서 저들의 마법을 탐낸다고 해도 그들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들을 인정한다면 저들이 범한 잘못까지 같이 짊어져야 하는데. 그 어디라 해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할 테지요.”
이드는 고개를 잘래잘래 젓는 쉴라의 말에 동감했다.
마탑이 가진 마법이 탐난다면 차라리 미완의 마탑을 완전히 토벌한 후 마법을 빼앗는 것이 쉽지. 이미 반인륜적인 행위로 토벌의 대상이 된 마탑을 끌어안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토벌의 이유가 된 업보다. 더구나 그 업보가 어디 그냥 업보인가.
다른 것도 아니고 초인과 관련된 업보다.
초인은 기사와 마법사에 이어 대륙의 미래를 가르는 새로운 힘의 축.
미완의 마탑이 행한 인체 실험은 이런 초인 전체의 공분을 사기 충분했다. 특히 초인은 마법사와 기사들보다 유대감이 남달랐다.
이는 초인으로 각성하는 과정이 선택받았다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하는 데다 과거 세상으로부터 차별받고 박해받았던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대감을 기반으로 이들은 초인에 대한 인체 실험과 같이 초인 사회 전체에 피해를 주거나 거대한 불이익을 주는 일에 대해서는 공동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말인즉 미완의 마탑을 끌어안을 경우, 최소한 초인과는 좋게 지내기는 틀렸다는 것인데.
과연 누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였다.
“비올라, 네 생각은 어때?”
“확실히 바보 같은 소리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탑주도 바보는 아닙니다. 오히려 위대한 천재죠. 그리고 자고로 천재는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는 법입니다.”
마법을 위해 생명의 관을 배신했지만, 탑주에 대한 존경은 여전한 모양이다. 비올라가 경쟁심과 경외, 존경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껏 탑주를 치켜세우는 말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이드들은 그 말에 납득했다. 분명 어지간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마탑을 만들고,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는 일은 꿈도 못 꾼다.
하다못해 인체 실험도 보통 머리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은 맞으니까.
“네 말은 그러니까. 탑주가 다른 노림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하기야 탑주를 직접 만나 들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결국 진실이란 얼굴을 마주한 후에야 드러나는 것.
“결국 싸워 봐야 답이 나오겠군요.”
어차피 목적을 안다고 피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명예 후작님의 활약 덕분에 토벌대의 의욕은 높아졌고, 적에 대한 최소한의 경계심은 생겼으니까요.”
은색 기사단장답게 토벌대의 분위기를 읽고 있던 쉴라의 말이었다. 그녀는 전장에서 적을 과소평가할 때 어떤 피해가 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경험한 적은 정말 약자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록마틴 후작님도 그 말씀을 하셨지요. 일단 토벌대의 지휘부가 경각심을 가졌으니 그 아래 기사단이 엉뚱한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방심으로 인해 생기는 피해는 적을 겁니다.”
“다른 기사단이라면 몰라도 은색 기사단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준비가 끝나 있죠.”
기사단의 단장이 경험하고, 동료가 그곳에서 죽을 뻔한 은색 기사단이다. 방심은커녕 동료의 빚을 갚아 주겠다고 누구보다 단단히 칼을 갈고 있는 곳이 은색 기사단의 여기사들이었다.
이드는 만반의 준비를 자신하는 쉴라의 모습에 스폴을 돌아보았다.
“쉴라 단장님이 저렇게 자신하는데, 부단장,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이넬 기사단도 언제든 싸울 준비는 끝나 있습니다. 단장님이 뛰어난 활약으로 본을 보이신 만큼. 절대 지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죠.”
스폴은 자신들을 데려가지 않은 이드를 원망하는 기사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일라이져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마침 내일 하루 휴식 시간이 있으니. 머리도 식힐 겸해서 준비에 대한 점검을 해야겠군요.”
누가 뭐래도 아이넬 기사단의 제일 목적은 황녀의 수호다. 적을 물리치는 것은 그 후의 문제.
그런데 스폴의 말을 들어 보면 제일 목적이 어느새 뒷전이 된 것 같으니, 단장으로서 교정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도를 알아차린 스폴은 곧 황금 같은 하루의 휴식시간이 지옥으로 변할 기사단의 기사들을 위해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이드의 일이 꼭 필요한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를 말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교정에 자신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단장님을 대신해 이만큼 기사단을 추슬렀으면 나에겐 충분히 쉴 자격이 있는 거지. 아무렴!’
내일 하루. 절대 이불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몰래 다짐하는 스폴이었다.
“결국 돌아왔군.”
모이엔은 멀리 기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은색 기사단의 숙소 안으로 사라지는 이드를 바라보다 창문을 닫았다.
몸을 돌린 그의 앞에는 게일과 함께 청색 기사단의 부단장이 앉아 있었다.
그의 청색 기사단은 상당히 큰 숙소를 배정받아 쉬고 있었다. 은색 기사단보다는 못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은색 기사단의 숙소는 아이넬 기사단이 함께 사용하고 있고, 무엇보다 황녀가 머물고 있지 않은가. 청색 기사단에 배정된 것보다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숙소조차 없이 여전히 막사 생활을 해야 하는 기사단도 수두룩한데, 그에 비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숙소의 상태를 탓하는 것은 토벌대를 위해 집을 내어 주고 여관으로 자리를 옮긴 집주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미완의 마탑이 가진 힘이 생각보다 별로인 모양이야. 홀로 떨어진 후작 하나 처리하지 못하다니.”
모이엔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집주인이 가구에 꽤 신경을 쓴 듯, 푹신한 의자가 모이엔의 몸을 한껏 감싸 그의 불만을 삭여 준다.
마주 앉은 두 사람에겐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스럽게 명예 후작을 해치울 좋은 기회였는데, 정말 아쉬운 일입니다.”
“뭐, 마법사들의 일 처리가 그렇지. 더구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이름값도 있고, 너무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도 좋지는 않아.”
“…..”
도대체 어쩌란건지. 부단장은 왔다 갔다 하는 모이엔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그는 이렇게 생각이 오락가락할 때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모이엔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으니까.
그때 모이엔이 품속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하나는 스크롤이고, 하나는 마나석이 박힌 원형의 판이다.
부우욱!
모이엔은 스크롤과 원형판 순으로 내장된 마법을 작동시켰다.
사사사삭ᅳ
하나는 감지 마법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 결계 형태의 차단 마법이다.
마법이 발동된 순간부터 창문을 닫은 후에도 들려오던 외부의 소리가 끊어졌다.
모이엔은 마법을 발동시키고 나서도 잠시 침묵하며 마법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모습이었다.
“부단장. 내가 지시한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명령하신 일은 완벽하게 이행 완료했습니다. 이전부터 교감이 있던 적색 기사단의 기사들에 대한 회유도 완벽합니다. 모두 단장님과 검왕님의 뜻에 따르기를 희망했습니다. 언제든 단장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좋군. 보안은 철저하겠지?”
“토벌대 안에서 같은 오색 기사단의 기사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하는 부단장의 대답에 모이엔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서, 보안이 철저한가를 물었네만?”
네. 작업이 끝난 후에도 확인을 했습니다.”
“좋아. 그럼 한번 흔적이 남지 않았는지 확인하도록 하고. 게일 경.”
부단장의 신경을 쫀득하게 쪼아 준 모이엔의 눈이 이번엔 게일을 향했다.
앞서 라미아가 이드에게 깔깔거리며 고자질한 사건 이후, 그렇지 않아도 모이엔의 눈치를 보던 게일의 입장은 더욱 낮아져 있었다.
“예. 단장님.”
“난 아직도 수일 전 자네가 했던 실수를 이해할 수가 없다.”
“죄송합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은 필요 없다. 실수는 그만한 공으로 만회해야 할 것이고. 곧 그럴 기회가 생길 테니 그때 자네가 얼마나 활약하는지를 보겠다.”
“믿어 주시면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게일은 내심 답답한 심정을 누르고 눈에 힘을 주며 답했다.
“믿겠네. 자네라는 미끼가 잘 움직여 주어야. 적색 기사단과 초인파라는 크고 작은 물고기를 단숨에 잡을 수 있다. 두 물고기를 잘 잡느냐 못 잡느냐는 오로지 자네에게 달렸어.”
두 번 세 번 강조하며 압박하는 모이엔이다.
그에 게일은 묵묵히 침묵으로 답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자신에게 손을 내밀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감하기는 했지만.
‘설마 소드 팰러스가 자랑하는 오색 기사단의 적색 기사단을 버리려 할 줄이야.’
정말이지 꿈에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다. 지금은 그저 삼검왕이라는 이름과 오색 기사단을 믿고 기대는 수밖에.
‘그때의 실수만 아니었어도.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을 것인데. 이드 명예 후작. 어째서 그때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인가!’
게일은 가슴 속에 차오르는 모든 짜증을 이드에게 돌리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책상 아래. 나노 단위의 얇은 은색의 털실 같은 것이 살랑살랑 몸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