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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47화


883화

반짝반짝.

기대를 품은 이드의 물음에 라미아가 손가락 하나를 펴 입 앞에 댔다.

“쉿!”

거기에 눈을 대신한 안광이 가늘어진 것이, 째려보는 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안, 하던 거 계속해 방해 안 할게.”

예민한 작업인 걸 알면서 조급하게 굴었던 이드는 조용히 찌그러졌다. 그렇게 시무룩할 때 일리나가 옆구리를 찔렀다.

돌아본 일리나의 입술이 실룩거리며 이쁘게 휘어진다. 언제나 온화하고 고운 얼굴이 갑자기 심술궂게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혼났네요?’

‘큼큼. 집중하는 걸 방해서 그런 거죠.’

‘지금 표정이 비 맞은 강아지 같아요.’

순간 정말 그런가, 얼굴을 만져 볼 뻔했다.

‘에이, 강아지는 무슨. 제가 왜 그렇겠어요?’

‘혼났으니까요. 가만 보면 이드는 저나 라미아와 있을 땐 아기 같아요.’

좀 마음이 많이 풀어지긴 하지만 아기라니. 그건 너무 심한 말 아닌가? 땡깡을 부린 적도 없는데.

막 그렇게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랜턴을 비춘 듯 안광이 번뜩이더니, 봉인된 악마의 울음소리같이 분노에 찬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중요한 일 하는 거 안 보여요? 조용히! 쫌!”

“미, 미안.”

“흥!”

반사적으로 사과를 한 이드였지만, 곧 억울한 마음에 몰래 가슴을 쳤다. 시끄럽다니. 그와 일리나 사이의 이야기는 눈과 표정으로 나눈 것이었다. 입을 연 것도, 전음을 통해 마나를 흔든 것도 아니다. 소음이라고는 있으려야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자리에서 왕은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라미아인 것을.

고개를 돌리자 일리나가 입을 가리며 웃는다. 시끄럽다고 혼이 나고서도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인지. 어쨌든 일리나와 작은 장난도 못 하게 된 것.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이드는 일리나가 앉을 수 있도록 한쪽 다리를 내어 주고는 라미아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라미아의 경고대로 조용히.


한마디 말로 이드를 침묵시킨 라미아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일전에 도청할 때처럼 자신의 본신을 한 줄기 실처럼 만들어 지하로 뻗어 내리고 있었다. 지하에는 돌도 있고 벽도 있었지만 그녀의 전진이 막히는 일은 없었다.

비록 실처럼 가늘어졌지만, 그 첨단은 본신인 검의 날과 같이 날카로워 돌이 아니라 강철이라도 두부처럼 파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본신이 그레이드론의 신검을 모티브로 정수를 쏟아 탄생시킨 최고의 아티팩트이자, 마검이라는 사실이 엉뚱한 곳에서 증명되고 있었다.

프리실라와 베일록이 내놓은 정보에 따르면 정신의 관은 17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17개 층은 이전에 말한 대로 다시 30개 구역으로 나뉜다고. 또한 전체적인 형상은 일직선의 탑형이 아닌 1층부터 17층까지 45도 정도 기울어진 형태라고 했다.

이런 건축법은 소형보다는 대형 던전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크면 클수록 아래층이 받게 되는 하중과 충격을 분산할 필요가 있기에 고안된 방법이었다. 실험과 전투 등으로 충격받을 일이 많은 던전이니. 충격 분산은 필수 사항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의 관이 경사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은 당연했다. 당장 2층의 넓이만 보아도 대형 던전이 분명하니까.

라미아는 이 정보와 1층, 2층 던전의 위치를 기준으로 탐침을 내려보냈다. 대략 깊이만도 백오십 미터가 넘는다. 그렇게 얼마나 뻗어 냈을까. 스르르륵.

은갈치처럼 거침없이 땅속을 헤치던 탐침이 갑자기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어느 지점을 앞에 두고 딱 멈춰 섰다.

그 앞은 여전히 흙과 돌뿐인 축축한 땅속이었다. 하지만 탐침을 통해 그 주변을 감지하고 있는 라미아의 감각에는 아니었다.

‘마나의 그물이야. 방어망? 아니, 그러기엔 너무 약해. 침입자를 감지하는 용도겠네.’

보이지 않는 마나의 그물은 땅속에 뿌리 내린 얇은 실뿌리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탐침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결과 대략 16, 17층과 그 아래, 바이트 타블렛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공간까지 마나의 그물이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라미아는 그 앞에서 더 나가지 못했다. 뚫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적에게 침입이 발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라미아의 마법 실력을 생각하면 그녀를 막아 낸다는 것은 실로 대단했다. 그녀 앞에서 어지간한 마법은 쉽게 풀려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발상이라고 할까. 이 감지망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기초적이고 빈약했다. 마나의 흐름도 약했다. 라미아였으니 발견했지, 일반 마법사였다면 감지망의 존재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마나가 약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약하기 때문에 조금만 건드려도 흐름이 당장 무너질 것 같았다. 일반 마법이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이라면, 이 탐지망은 세워진 지 수백 년이 지나 서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낡고 낡은 오두막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도 그 작은 진동에 무너져 버릴 오두막 말이다. 

‘누구 생각인지 몰라도 변태 같은 짓을 해 놨네.’

어지간히 생각이 꼬여 있지 않으면 보통은 떠올리기 어려운 방법이다. 보통은 위로 올라가려 하지, 내려갈 생각은 잘 하지 않으니까. 좀 더 튼튼하고, 강한 걸 추구하는 경향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

‘거기다 그 변태 같은 생각을 실행한 실력도 대단하고, 이건 단단한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보다 어려운 작업이니까.’

당장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을 만든다? 말은 쉽지만, 어쩌면 튼튼한 건물을 올리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냥 돌아서기는 아쉽다.

라미아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생각으로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고, 분석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했다. 강력한 힘에 밀린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가 쓰다듬어도 무너질 것 같은 감지망 하나 해결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다니.

‘쩝.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대신 좋은 거 하나 배웠으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한 라미아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라미아가 결심하는 순간 탐침은 순식간에 회수되었다.

반짝.

라미아가 눈을 떴다.


“……”

앞서 혼난 것 때문에 라미아가 눈을 떴지만, 이드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 일리나가 톡톡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가갔다. “끝난 것 같은데, 결과가 좋지 않나 봐요? 표정이 좋지 않은데.”

이드는 일리나의 말에 라미아를 돌아보고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본래 그녀의 얼굴 형태를 본뜬 가면으로 모양을 바꾸고는 있지만, 인간처럼 표정이 드러나는 것도 아닌데.

잘도 라미아의 표정을 읽어 내는 일리나가 신기했다.

“원하는 건 얻지 못했는데. 다른 수확은 있어서 좀 묘해요. 그보다・・・・・・ 이드는 궁금하지 않아요?”

“아니, 당연히 궁금하지.”

“후후. 혼내지 않을 테니까 이리 와요.”

삐친 꼬마를 달래는 것 같은 라미아의 태도에 이드는 떼쟁이 아이가 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구시렁거리며 다가갔다.

“미리 말하는데, 혼났다고 삐친 거 아니야. 그리고 수고했어.”

“고마워요. 그런데 바이트 타블렛 도굴은 실패했어요.”

“괜찮아. 어차피 되면 편하고 좋은 정도였으니까.”

포로의 정보 때문에 시도해 본 일이다. 되면 좋고, 아니라도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면 그뿐.

라미아는 우선 그 무너지기 직전의 오두막 같던 독특한 감시망에 대해 설명했다.

“일종의 허허실실이려나? 그런데 수확이 있다는 건 무슨 말이야?”

“그 감시망 때문에 침입은 불가능했지만, 한참 분석한 덕분에 기묘한 구멍은 발견했어요.”

“구멍? 개구멍 말하는 거야?”

“맞아요. 허락된 존재만 통과 가능한 샛길이요.”

“그럼 샛길, 개구멍에서 뭐 알아낸 거라도 있는 거야?”

이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개구멍이란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땅속에 있다는 것은, 곧 땅속으로 이동해 올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면, 안에 있던 자가 땅속으로 나가거나.

하지만 자기 집에서 개구멍을 통해 나갈 필요가 있을까? 물론 지금처럼 침입해 온 토벌대를 피해 달아날 용도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용도를 위해서라면 다른 마법도 많다. 굳이 침입자를 감지하는 감지망에 개구멍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미아가 알아낸 사실이 궁금했다.

개구멍을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인하려면, 그 개구멍에도 이용자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담겨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물론이죠. 제가 누군데요.”

자신만만한 목소리와 함께 라미아의 눈가가 휘어진다. 감시망 앞에서 아쉽게 발길을 돌릴 때의 패배감은 잊은 듯하다.

“누구긴 누구겠어. 위대한 라미아 님이지. 그래서 그게 뭔데?”

“혼돈의 파편이요. 좀 더 정확히는 메르시오 같아요.”

메르시오.

기대는 했지만, 이 시점에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이름이다.

이드는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세 사람을 감싸는 기막을 펼쳐 누구도 엿듣지 못하게 조처했다.

“정말이야?”

“완벽하진 않아요. 정확도를 따지면 대략 71% 정도?”

“높기는 한데, 좀 애매한데?”

“조금 그렇죠? 하지만 이 정신의 관 지하의 감시망에 등록될 늑대인간, 그것도 혼돈의 기운을 가진 늑대인간이 메르시오 말고 또 있겠어요?”

“절대 없지.”

아무렴 절대 없다.

산과 들, 숲을 달려도 모자랄 웨어울프가 드워프도 아니고, 뭐가 아쉬워서 수백 미터 땅을 파고 들어온단 말인가.

특히 그는 무슨 꿍꿍이인지 생명의 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전적도 있지 않은가. 그의 능력이라면 수백 미터 땅속 지하를 파고 들어오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대대적으로 토벌대를 모으고 미완의 마탑 토벌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지금과 같은 단서를 얻기 위해서다. 솔직히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는 얻을 가능성이 가장 적겠다 싶었는데 운이 좋은 것인지 메르시오에 대한 단서를 가장 먼저 얻었다.

물론 메르시오를 직접 확인하거나 그의 행보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분명한 성과다. 그리고 이제 고작 2층이 아닌가. 

“당연히 좋아해야죠. 대신 좀 더 주의해야 할 것 같아요. 황녀도 있고.”

“그래야지.”

어디 황녀뿐인가. 그녀보다 더 중요한 일리나도 있다. 라미아야 소환하면 당장 자신의 곁으로 올 수 있지만, 일리나는 아니다. 그녀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메르시오를 상대로 얼마나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이드는 일리나를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우선 황녀의 호위를 좀 더 단단히 하고. 어지간해서는 두 사람 모두 황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하자.”

결론을 내린 이드가 일어났다.

슬슬 다 쉬었는지 하나둘 이쪽으로 시선을 향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르시오도 메르시오지만, 일단은 이 던전의 공략이 먼저였다.

“이거 예상 이상으로 기대되네. 벌써 메르시오면 더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나오려나. 시르피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욕심이에요.”

이드의 혼잣말에 일리나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소소하게 소드 팰러스나 초인파의 스폰서 증거라도 튀어나오기를 바라 볼까?

“토벌대 충분히 쉬었나?”

“예!”

“그럼 다시 정의를 위해 달려 보자!”

“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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