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92화
928화
지구보단 못해도 그레센의 환경 파괴도 문제다.
땔감으로, 재료로, 농지 확대로 파괴된 숲이 한둘이 아니다. 엘프 입장에선 그런 개발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어 주는 맹수와 몬스터가 차라리 고마울 정도다.
그런 일리나가 보기에 이 식물을 다루는 초인의 능력은 파괴된 숲을 살려 내는 최고의 능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엘프뿐 아니라 지구에서 어떤 대가를 주고서라도 수입하고자 할 만한 능력이기도 했다. 지구의 환경 파괴 실태야말로 다 할 수 없는 상태니까.
거기에 식물의 형질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일리나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기까지 했다.
그냥 듣기엔 쉬울지 몰라도 이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일이다. 썩지 않는 나무를 키울 수도 있고, 비타민이나, 비싼 약의 희귀 재료가 주렁주렁 열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어디에나 있는 대마법사나, 그랜드 소드 마스터 따위와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천지 차이다.
물론, 차원 수출입이 불가능한 지금은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거기에 지금은 그 귀한 인재 역시도 진짜 재능을 살인에 낭비 중인 적일 뿐이다.
“너무 아쉬워 마요. 그리고 원하면 시온 숲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초인이 있는지 한번 알아볼게요.”
기본적으로 미인인 엘프들이 사는 숲에 취직하는 것이라면 희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초인은 인간 이외엔 될 수 없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다. 흑마법으로 몬스터와 융합해 놓은 초인과 초인기를 사용하는 마수.
정말 인간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라면, 그런 방법으로도 사용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90년간 확인되지 않은 일이 아닌가. 지금은 눈앞의 제초 작업에 집중할 때다.
처음엔 그냥 간단하게 잘라 버리려고 했다. 뽑고 자르는 것이 잡초 제거의 가장 기본이니까.
거기에 이드에겐 넓은 풀숲을 순식간에 스킨헤드로 만들 수 있는 무형일절과 수라섬광단이 있다. 이 두 초식은 면면부절의 길고 끈끈한 검기를 품고 있어 제초작업에는 최고다.
하지만 일리나가 그런 이드를 멈추게 했다.
“한 겹 흙 아래 송곳 같은 독초가 있어요.”
풀숲을 태우면 독연이 뿜어질 터. 수풀을 자를 것도 대비한 것이다. 그에 이드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흙 아래 있는 독초라고 자르지 못할 것은 없지만, 어쩐지 독초가 잘렸다고 얌전히 바닥에 깔려 있을 것 같지 않아서다.
“식물에 관한 초인기를 가진 기사가 있는지 알아볼까요?”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딜런이었다. 그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이드가 가진 수단은 많고, 토벌대 안에 그런 초인기를 가진 기사가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그럴 필요는 없어. 독초라고 해 봤자, 풀이야. 뿌리 내린 판을 엎어 버리면 끝이란 말이지. 우리에겐 범고래가 있으니까!”
‘불렀어?’
범고래가 통, 하고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이름을 말했을 뿐이지만, 어차피 부르려 했던 것. 이드는 히죽 웃으며 범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마침 할 일이 생겼거든. 우리 잡초 제거 좀 하자.”
‘여기 풀에서 이상한 냄새나’
역시나 정령, 자연적이지 않은 것은 귀신같이 알아본다. 동양적인 시선으로 보면 정령도 귀신의 일종이랄 수 있으니, 정확한 말일지도?
“그러니 냄새나지 않게 묻어 버리자. 할 수 있지?”
‘응, 흙에서도 냄새가 나지만, 주인님이 힘내면 할 수 있어.’
그 말에 이제 헛웃음이 나는 이드다. 어둠 속에 심어둔 풀숲에 정말이지 촘촘한 함정을 깔아 두지 않았는가. 던전에 숨겨진 트랩보다 더한 것 같았다.
다만 마탑의 실수라면, 이쪽에 독초를 단숨에 알아볼 일리나와 대지의 정령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랄까.
“좋아. 팍팍 밀어줄 테니까. 완전히 뒤집어 버려.”
말과 함께 범고래에게 단전을 활짝 열어 준 이드다.
순간 라인을 통해 느껴지는 무한정한 힘에 놀랐는지 범고래의 눈이 똥그래졌다. 하지만 곧 그 놀람이 자신감이 된 듯 귀여운 주먹을 불끈 쥐고는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속에 들어간 듯 범고래의 몸이 허리까지 땅에 잠겼고, 범고래는 그 상태로 땅을 내리쳤다.
쿠르르릉!
땅콩 껍데기라도 깨면 다행일 것 같은 작은 주먹 아래서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동시에 풀숲이 바다처럼 출렁이며 범고래의 주먹이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그 주변의 풀들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이 마치 회오리에 휘말린 조각배 같았다. 이대로라면 순식간에 풀숲이 사라지겠다 싶은 순간, 묵직하게 물결치는 바다 같던 풀숲이 폭풍이라도 만난 듯 격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모든 함정을 끌어안고 풀숲이 사라질 위기에 마탑이 막고 나선 것이다.
범고래와 연결되어 있던 이드는 심상을 통해 그 저항이 생생히 느껴졌다. 풀이 자란 풀숲 전체에 퍼져 있는 기운.
그것은 정령인 범고개가 땅을 움직이는 힘을 닮아 있는 초인의 초인력이었다. 바로 이 힘 때문에 범고래가 흙에서 냄새가 난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범고래의 힘과 초인력이 부딪혔다.
꾸르르륵-
독초가 땅속으로 사라지던 것이 멈췄다. 대신 두 힘이 부딪히며 독초와 검초, 그리고 온갖 풀들이 물 위에 떠도는 스티로폼처럼 이리저리 떠다니기 시작했다.
혼자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상급 정령의 속성 지배력에 대항하고 있다니. 제법이 아닌가.
“하지만 그래 봤자지. 우리 범고래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응! 아무것도 아니야!’
평범한 정령사였다면 제법 힘에 겨웠을지 모른다. 속성에 대한 지배력은 확실히 우위에 있지만, 힘의 규모에서 차이가 나니까. 일부라면 몰라도 풀숲 전체를 뒤집는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평범한 정령사였다면 말이다. 정령사 이드가 범고래에게 줄 수 있는 힘의 규모는 말 그대로 무진장한 것.
그리고 범고래는 상급 정령답게 그 힘을 잘 쓸 수 있었다.
‘끙차!’
범고래가 귀엽게 힘을 썼다.
콰르릉!
그러자 저 앞 풀숲 한 부분의 땅이 통째로 뒤집어졌다. 그 일은 범고래가 힘을 쓸 때마다 반복되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라미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던전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마탑에서 미리 준비해 둔 것 이상의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전엔 마탑의 함정도, 마법도, 기습도,
딱 미리 준비한 것이 끝이었다. 적이 준비한 함정을 돌파하고, 불길을 제압하고, 매복한 이들을 쓰러트리고 나면, 그 이상의 지원은 없었다. 그런데 그 규칙이 이 풀숲에서 처음으로 깨어졌다. 원래라면 범고래의 손에 뒤집어졌어야 할 풀숲이 외부의 지원에 의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탑에서 지금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이드가 라미아를 돌아본 것은 그 확인을 위한 것이다.
이에 이런 이드의 마음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라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보고 있는 눈은 없어요. 아무래도 살아 있는 식물이라서 관리를 위해 라인만 열어 두고 그걸 통해 힘을 쓰나 봐요. 설마 제가 있는데 또 들여다보겠어요?”
작게 죽으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듣지 못한 척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가 있는데. 또 눈이 뽑힐 생각이 아니라면 들여다볼 생각은 못 하지.”
맛보기 층이 끝나고 6층부터였을 것이다.
마탑에서는 던전에 진입하는 토벌대를 훔쳐보려 했다. 침입자를 대비해 함정도 깔고, 마법도 설치했는데, 눈을 숨겨 두는 정도야 당연한 일. 하지만 다른 조는 몰라도 이드와 라미아는 그런 눈을 그냥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훔쳐보는 것 자체도 못마땅하고 이쪽 전력을 노출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래서 라미아가 나섰다.
그냥 나선 것도 아니다. 그쪽에서 훔쳐본다면, 이쪽에서 들여다볼 것도 각오했겠지? 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숨겨진 눈을 뽑아 라인을 타고 역류해 들어간 것이다.
그에 훔쳐보려다 오히려 낱낱이 까발려질 상황에 기겁한 마탑에서는 라인을 차단해 버렸다. 거기에 차단한 라인을 파괴까지 했단다. 마탑이 얼마나 놀랐는지 잘 알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하겠다.
그 후, 딱 한번.
더 훔쳐보려는 시도가 있었고, 또 똑같이 역추적당한 후, 다른 조는 몰라도 삼 조는 마탑의 감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이에 다른 조에서도 이 이야기를 듣고 삼조를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강력한 전력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지만, 적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여간 찝찝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다른 조도 대책 없이 모든 전력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의 실력 좋은 마법사들을 각 조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마법을 통해 일부나마 마탑의 시선을 피하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래 봤자, 삼조만 못하지만.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드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이 어둠에 기대어 지켜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들여다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없겠지만, 기분의 문제랄까?
“우리 범고래, 속도 좀 올려 볼까?”
‘얼마나?’
“가볍게 10배 정도만?”
우웨에에엑ᅳ
내장까지 쏟아내는 듯한 소리와 함께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입뿐이 아니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가 쏟아져 나온다.
“빌어먹을! 바꿔!”
“옙!”
짜증 가득한 째지는 목소리에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초인들을 끌어내고, 초인들을 새로 집어넣었다. “끄어어억!”
그에 초인들은 영혼이 뽑힐 듯한 탈진감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법사는 아무도 없었다.
초인들을 끌어낸 마법사들은 한쪽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죽은 자들의 등을 갈라 그들에게 초인기를 부여하고 있던 아티팩트를 뽑아내고 있을 뿐이다.
“퀼른 님, 이제 남은 초인들도 얼마 없습니다. 이제 그만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이곳의 책임 마법사 퀼른 옆에 있던 부책임자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 쾰른이 하고 있는 행동은 그의 독단이기 때문이다.
상부에서는 단 한 번도 지옥 정원으로 적을 공격하라는 말이 없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당신은 우리 지옥 정원이 기사 놈을 단 하나도 사냥하지 못하고 그냥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 자존심도 없어?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내가 어떻게 키운 정원인데!”
눈이 벌게진 퀼른이 이를 갈며 씩씩거렸다. 도저히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부책임자가 그렇게 판단할 때였다.
“클클. 이게 무슨 피 냄새냐?”
“자, 장로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나타난 노파. 그 모습에 바삐 움직이던 마법사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그건 퀼른도 마찬가지.
“흐음. 지옥 정원을 움직이고 있었느냐?”
무슨 일인지 듣지도 않고, 방 안을 슥 둘러본 것이 끝이었다. 그것만으로 노파는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모두 안 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