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94화
930화
벽은 이상할 게 없다. 벽이 없으면 지하에 이런 공간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위층에서도 사방이 벽이었다. 대신 위층과 다른, 절대적으로 이상한 점이 있었다.
“문이 없네요?”
일리나의 말대로, 지금까지 매 층 끝에 다다르면 있던,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 그게 보이지가 않았다.
“저희들이 찾아보겠습니다.”
기사들과 함께 딜런이 나섰다. 넓은 벽을 손끝이 얼얼할 정도로 하나하나 더듬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없는 문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사방을 샅샅이 뒤진 딜런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그나마 발견한 이상한 점을 알려 왔다.
“이때까지 던전의 벽은 모두 거친 돌로 되어 있었는데, 여긴 유리처럼 매끄러운 것이, 평범한 재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벽이라. 흐음. 참, 그러고 보면 여기, 위층보다 규모가 작은 것 같지 않아?”
딜런의 말을 되새기던 이드가 난데없이 규모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내용 전환에 딜런이 눈을 껌뻑거렸다.
“입구에서 여기까지 직선으로 5.668킬로, 평균 9킬로였던 층들에 비하면 확실히 절반의 크기네요.”
“미터 단위까지 나오니? 난 5.5킬로인 줄 알았는데.”
이드가 혀를 내둘렀다.
그냥 직선거리도 아니고, 중간에 구부러진 길도 있었고, 코너도 있었다. 지하에 있는 미로라면 그 자체로 거리 감각이 애매해진다. 거기에 여긴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닌가.
그런데도 정확한 직선거리를 뽑아내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이드도 한쪽에서 딜런과 기사들이 입을 벌리고 보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들이 보기에 라미아나 이드나 다를 것이 없었다. 차이라고 해봤자 168미터의 차이다. 이미 거리는 고사하고, 시간 감각까지 애매해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그저 놀라울 뿐인 것이다.
“무인의 감각이 아무리 예민해도 계측하는 부분에선 마법사를 따를 수 없죠. 그리고 황녀 전하께 달아 놓은 표식도 있고.”
아무래도 자신과 일리나까지 이드를 따라나서게 되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둔 것 같다.
‘여하튼 철저하다니까.’
만약을 대비하는 건 마법사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이드로서는 그런 점이 그저 든든할 뿐이다. 그때, 벽 같지 않다는 말과 다른 층의 절반이라는 말에서 답을 찾은 일리나가 말했다.
“그럼 여기가 끝이 아닐 수 있다는 거네요.”
“물론 문이 숨겨져 있을 수 있지만, 가능성은 높죠.”
말을 마친 이드가 딜런과 기사들을 뒤로 물리고는 벽에 손을 댔다. 딜런의 말처럼 매끈한 돌이 손에 착 달라붙었다.
차가운 냉기가 느껴지는 것이 대리석류의 돌이 아닌가 싶었다.
“돈도 많지. 이걸 벽으로 쓰다니.”
혀를 찬 이드가 끝에서 끝까지 찬찬히 벽을 쓸며 걸었다.
딜런과 기사들이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보았다. 행여 이드가 무엇을 찾을까 싶어서다. 막힌 벽에서 단서를 찾으면 기쁜 일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샅샅이 뒤졌음에도 찾지 못한 것을 이드가 찾는다면 기분이 참 복잡할 것 같아서다.
이드의 대단함이야 지겹도록 보아 잘 알지만…….
“라미아. 여기 빛 좀.”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마음도 몰라 주고 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파앗.
잠시 후 이드가 말한 공간에 빛이 들어와 어둠이 물러가고, 벽이 나타났다.
느꼈던 대로 매끈하게 깎인 돌로 만들어진 벽인데, 그 중간이 삼 미터가량 툭 끊어져 있다. 그 공간엔 검은 벽을 이룬 재질과는 확실히 다른 검은 유리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저거 암만 봐도 돌은 아니지?”
“기가 막히는군. 아무 감각도 없었는데.”
어느 기사가 허탈한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고된 수련으로 거칠고 두꺼운 손이지만, 검을 다루는 그 손의 감각은 일반인들보다 몇 배 민감하다. 그 작은 감각의 차이에 목숨이 오가기 때문에 피땀 흘려 단련하는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능력이 못나서가 아니라 계속 조장인 이드를 실망시키는 것 같아서다.
“돌이나 유리가 아니군요?”
“혹시 위험할 수 있으니까 손대지 말아요. 어둠이 사라져서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요.”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리자 이드가 다시 검은 벽을 살폈다. 일리나의 말처럼 돌도 유리도 아니다.
안쪽에서 음습한 마나가 일렁이고 있다. 그래서 알아봤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드도 몰랐을 것이다. 이드도 손의 감각으로는 돌과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미간을 모으고 검은 돌을 노려보던 이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알겠네.”
“뭔지 알아냈나요?”
“겉을 보면 알 수 없지만, 깊이 살피니 알겠네요. 이거 마수에요.”
이드가 그 말을 한 순간이다.
마치 이드의 말을 알아들은 듯 검게 번들거리며 벽 행세를 하고 있던 그것이 실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처럼 출렁이기 시작한 것이다.
촤촤촤촹!
“라미아 님을 보호하고 전투 준비!”
그와 함께 딜런과 기사들이 라미아를 둘러싸며 검을 뽑았다. 자신들보다 라미아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인 임무를 망각하진 않은 것이다.
이드는 등 뒤의 움직임을 느끼며 출렁이는 어둠 속으로 수도를 찔러 넣었다.
“이드!”
그 모습에 일리나가 놀란 듯하자 이드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놈들에 대해서는 잘 아니까. 이놈은 밖에서 때려 봤자 소용이 없어요. 안에서 때려야지.”
느긋한 목소리. 하지만 몸속을 도는 내공은 노도와 같다. 순식간에 전신 혈맥을 돌며 덩치를 키운 경력이 이드의 손목을 타고 검은 어둠 속에 찔러 넣은 이드의 손끝에 모이더니 철황권의 검은 강기를 머금고 화끈하게 폭발했다.
우우우-
어둠 속의 폭발이라 폭음은 없었지만, 낮은 진동음만 들려왔다. 그러나 소리만 작았을 뿐 그 여파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쩌억.
진동이 모두 가라앉기 전, 벽인 척하던 검은 기운이 수박처럼 쩍 갈라지더니, 이드의 손을 중심으로 폭탄이라도 맞은 듯 움푹 패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그어어어억!
동시에 고래의 그것을 닮은 울음소리가 났다.
강력한 충격에 굳은 듯 움직이지 않던 검은 기운이 성난 파도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이드를 향해 덮쳐들었다.
마치 자신을 아프게 한 것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형체는 없지만, 십 미터 높이에 폭 삼 미터의 벽이 쏟아지는 모습은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여 오금이 저렸다. 그에 기사들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후작 부인인 라미아와 일리나가 조용한데, 기사인 자신들이 호들갑을 떨어 정신없게 만들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능력이 모자라 일은 완벽히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상황 판단 못 하고 날뛰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명예 후작님의 강함은 몇 번이나 봤다. 저분을 믿고 자리를 지키자.’
딜런과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이드를 믿는 일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먼저 길막하고 있던 놈이 누군데. 성을 내고 지랄이야.”
조금 말이 경박하긴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언제 뽑혔는지, 누구도 보지 못했지만, 어느새 이드의 손에 자리한 일라이져가 무형기류의 초식에 따라 은색 빛무리 같은 검강을 뿜어냈다.
쿠우우웅!
검은 기운과 은빛 검강이 부딪히며 폭음과 함께 공기가 깨져 밀려났다. 두 기운 모두 질량을 가지지 않았을 텐데도, 마치 천근 같은 압박이 주변을 덮었다.
그리고 같은 무게라면 아무래도 버티는 쪽보다 누르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 그러나 무게 이전에 힘의 크기가 먼저 아니겠는가.
콰과과과
두 기운이 부딪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은빛 검강의 내부에서 회오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드릴처럼 검은 기운을 분쇄하는 것은 물론 천천히, 그러나 압도적으로 검은 기운을 벽 안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자, 안에 누가 있는지 좀 보자.”
두꺼운 돌벽을 지나 넓은 공간이 나왔다. 동시에 묵묵히 검은 기운을 밀어내던 무형기류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무형일절의 초식으로 연계되어 사방으로 쏘아졌다.
꾸워어어-
그러자 고래를 닮은 비명성이 다시 터지며 이드를 밀어내려던 검은 기운이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로 어둠이 찾아들었다.
라미아가 빛을 밝힌 공간을 벗어나자 다시 시야가 차단된 것이다.
하지만 빛의 유무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이드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잠시 움츠러 들었다 다시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진 마수와 은밀하게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
“라미아. 여기 몰카범이 있는 것 같은데.”
“이미 조치 중이에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대답에 이드가 마수를 향해 성큼 걸어났다.
“역시 우리 마나님. 일 처리는 완벽하단 말씀이야.”
그렇게 이드가 마수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라미아는 어둠과 마법의 뒤에 은밀히 숨겨진 몰카범의 단말에 접속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뜨거운 맛을 보고도 또 시도하다니. 그 도전정신은 인정하지만, 불가능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지.”
이 방을 지켜보는 단말은 마법진에 달려 있는 손톱만 한 수정이다.
저 작은 크기에 어둠으로 가득 차서 뭐, 보일 게 있나 싶겠지만, 무시하지 마라.
현대 과학과 달리 마법은 물리 법칙을 넘어서는 힘.
같은 뿌리를 둔 어둠은 수정에 담긴 주신의 힘을 전혀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어둠과 강력한 마수에 기대어 그간 살피지 못한 이드를 관찰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어림도 없네요.’
라미아는 가장 먼저 수정구의 시야를 차단했다. 이드의 모습이나 정보는 단 하나도 주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단말에 대한 파훼와 간섭은 그다음이었다.
“과연 이번엔 어디까지 막을 수 있나 보자고.”
아무쪼록 이번엔 일찍 포기하지 말고 버티다 얼굴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그 생각과 함께 라미아가 단말에 마나를 찔러 넣었다. 동시에 그보다 한참 아래쪽에서 비명과 같은 외침이 터졌다.
“마나가 역류합니다!”
“3번 방화벽까지 단숨에 뚫렸습니다!”
“마나 출력을 한계까지 올리겠습니다.”
하나를 시작으로 보고가 끊이지 않는다. 동시에 미리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마법사들이 철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모두 핏발 서 벌게진 눈으로 각자의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황녀와 이드가 속한 삼 조를 훔쳐보려다 번번이 실패하길 몇 번이던가. 실패도 그냥 실패가 아니다. 적이 마나 라인을 타고 추적해 들어와 물리적으로 마법진을 파괴해야 했다.
그건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인정하는 행위였다.
마법사도, 기사도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에게 지는 것은 좋은 경험으로 여겨 순순히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들은 오로지 주시에 특화된 마법만을 판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주시 마법에서 만큼은 고위 마법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철저하게 깨어졌다.
자신들이 그 뒤로 그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던가.
“뿌드득. 내 명예를 걸고. 이번만큼은 절대 지지 않는다.”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