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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96화


932화

안개같이 성긴 것이 돌처럼 단단해지려면 얼마나 압축되어야 할까.

은색 달빛을 닮은 검의 그물이 또 하나의 벽을 감쌌다.

푸스스스-

다음 순간 희미해진 은빛 사이로 잘게 잘린 벽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며 사라졌다. 무극검강의 검막에 수라만마무의 초식 일부를 응용하여 공격용으로 전환한 것이다.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지만, 부서진 벽처럼 멈춰 있는 것을 분쇄하기 좋은 방법이다.

덕분에 순식간에 마수의 몸 20%가 소멸되었다. 방 한구석이 휑해 보일 정도로 뻐끔하다.

마수 놈은 본능적으로 움직여 바람에 휘말려 소멸하는 신체를 막고자 했겠지만, 일부를 지키려다 그 다섯 배의 피해만 봤다. 차라리 정령이 끌어가게 두는 것이 피해가 적었을 텐데.

강하지만, 머리 나쁜 전형적인 바보의 대응 방식이다.

“나야 반가운 일이지만, 음, 아닌가?”

생각해 보니 아닌 것 같다. 그런 바보에게 비웃음을 당했으니 반가울 게 뭔가. 드래곤도 아니고 이런 마수를 잡는데, 천재건 바보건 무슨 상관인가. 꾸어어어억!

그때 마수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사방의 어둠이 요동쳤다. 검강에 솜털이 탄 정도가 아니라, 단번에 몸의 2할을 소멸당했으니 제 몸인 이상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고통은 분노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누구에 대한 분노? 고통을 준 원인에 대한 분노. 이드 말이다.

마수는 소리를 지르며 이드를 공격했다. 찌르고, 할퀴고, 깨물었다.

성질이 다른 마나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마수의 공격은 결코 이드에게 닿지 못했다. 이드의 방어는 놈이 부수기엔 너무 단단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단순히 단단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빙글빙글.

미세하게 각도를 바꾸는 검의 움직임.

그에 마수의 공격이 검이 만들어 낸 흐름과 호신강기의 반탄력을 타고 유리창을 할퀴려다 미끄러지는 고양이의 발톱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콰콰콰콱!

바닥에 닿은 마수의 발톱에 돌바닥에 깊은 고랑이 생기고 흙이 뒤집어졌다. 당장 씨를 뿌려도 좋을 것 같다. 물론 햇빛은 둘째 치고, 마수의 살이 깃들어 말라 죽지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공격이 거세졌다. 한계치에 다다른 속도에 검은 발톱 끝에 미세한 번개가 번뜩인다.

흔들림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가 움직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일라이져의 검로가 바뀌었다.

푸훅!

단단하던 검막이 여인네 치마처럼 푹신하게 변해 사방에 가득한 검은 칼날과 발톱을 한순간에 감싸 버렸다.

마수가 기겁했지만 착의 요결이 담긴 검막은 풀이라도 바른 듯 발톱을 놓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식충 식물에 걸려든 파리가 된 결과는 앞서의 벽과 다르지 않았다.

푸화아아악!

굳이 찾자면 좀 화려했다는 것 정도? 단번에 15%나 되는 마수의 몸체가 검강에 부서지고 타오르니 그 광경이 제법 화려했다. 검막에서 불꽃이 뿜어지는 듯하다.

꾸어어어억~

마수의 비명이 또 길게 이어진다. 참, 멍청하다. 벽을 만들어 그렇게 당해 놓고, 분노에 눈이 뒤집혀 벽과 같은 발톱을 만들어 공격하면 또다시 당할 수 있다는 걸 모르나?

“하기야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면 마수가 마수가 아니지. 그만 닥치고 이거나 더 먹어라.”

쩌저저적.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톱을 붙잡아 안으로 웅크려 들었던 검막에 금이 갔다. 아니, 갈라졌다. 틈이 생겼다 싶은 순간 만개한 국화처럼 활짝 피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떻게 보면 넓게 펼친 옷자락처럼 보이기도 하는 검기가 다시 사방에 멈춰선 마수의 육체를 소멸시켰다.

“역시 재생 기능이 있는 모양이네.”

흐려지는 검강의 그림자 너머로 마수의 상태를 확인한 이드가 말했다. 벽과 발톱에 이어 이번 공격까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신체를 파괴했는데도 아직 방은 마수로 가득했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면 이드의 주변 십 미터 안에는 마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주 깨끗하게 비었다.

방금 공격으로 소멸된 것도 있지만, 마수가 이드에게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놈이 물러갈 것도 아니고, 이드가 불쌍히 여겨 봐줄 것도 아니다. 마침 마수의 비웃음에 답해 줄 검공도 준비되었으니.

“달려 보자!”

부운귀령보를 밟은 이드가 무극검강의 검막을 둘렀다. 십육방위를 점한 은빛 검막은 허공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 같았다. 다만 움직이는 모습은 UFO가 따로 없다.

츠츠츠츳-

커다란 검막에 닿은 마수의 몸이 사정없이 녹아내렸다. 이미 세 번이나 검막에 당했던 마수가 도망을 가자 이드가 그 뒤를 쫓았다. 어차피 한정된 공간이고, 마수의 육체는 방에 가득했다. 거기에 속도도 느리다.

이대로면 10만 번 휘두를 필요 없이, 1분이면 충분히 마수를 소멸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가장 강력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마수였다.

강력한 적에게 생명의 위기를 느꼈을 땐 도주가 최고의 방법이겠지만, 마수가 받은 명령 중에 도주는 들어 있지 않았다. 반대로 강력한 적에 대한 최종 대응 매뉴얼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최종 매뉴얼을 실행할 때였다. 이 상태로는 힘에서, 속도에서, 능력에서 모두 이드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콰콰콰콱!

메뚜기 무리처럼 이동하던 마수가 바닥을 찍어 멈춰 섰다. 비명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급한 제동에 출렁일 법한 몸이 빠르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에 따라 마수에 가려 있던 방의 모습이 나타났다. 매끈한 바닥과 벽, 저 끝에 설치된 웅장한 제단.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세 개의 문. 이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당연히 하나여야 할 문이 세 개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13층은 이 방을 더하더라도 다른 층의 평균 크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 저 문 뒤에 또 이런 방이 있는 것일까?

여러 궁금증이 일었지만, 우선은 마수부터 처리하고 볼 일.

그사이 놈은 덩치가 크게 줄어든 것과 반대로 풍기는 마나가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다. 이것도 일종의 변신이라고 봐야 할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이드의 눈빛이 건조하다.

다음 순간 이드가 바닥을 차며 앞으로 나갔다. 사정은 알겠지만 애니 속처럼 약속된 설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놈의 변신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 줄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드였다.

약한 놈이 노력하면 봐줄 만도 하지만, 적인 이상엔 그런 배려는 일절 없다. 이렇듯 냉정한 것이 바로 어른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드가 마수에 가까워질 때였다. 갑자기 압축 중인 마수의 신체 일부분의 마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이드를 향해 무언가가 쏘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마수를 만든 마법사들은 낭만 없고, 야비한 어른의 세상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쏘아진 것은 탄환이었다.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문제라면 하나하나의 크기가 오크만 하다는 것일까?

그래 봤자 아까 부순 문보다 작다. 저걸로는 이드의 발길을 1초도 붙잡을 수 없다. 마수를 향하던 일라이져가 움직였다.

동시에 둥근 탄환이 접시 형태의 회전 톱날로 변해 방향을 꺾으며 회피를 하는 것이 아닌가.

피잉-

“어쭈.”

갑작스러운 변화다. 하지만 그래 봐야 부처님 손바닥. 반응하지 못할 속도가 아니다. 허공을 가르던 일라이져를 보통 사람이라면 따라 하지도 못할 기괴한 각도로 꺾은 이드는 거기서 나온 반동으로 회전 톱날을 베었다.

또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삼점검망으로 회전 톱날을 감싸 곱게 부수기까지 했다. 좀 귀찮아도 마수의 특성 때문에 빼먹을 수 없는 작업이다.

거기까지 4초가 걸렸다.

그르르르릉-

울음소리가 달라졌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와이번 정도의 크기를 가진 티라노를 잘 닮은 괴수가 있었다. 녀석은 뿌연 빛을 받고 서 있었다.

“빛?”

이드가 한발 늦게 반응했다. 맞다. 캄캄하던 방 안에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에 가득하던 마수가 하나로 압축되었는데도,

블라인드니스의 음침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벽 너머 이 방까지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빛은 어디서 오는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무한의 고리가 끊어질 때까지 빛나라. 샤이닝 라이트.”

입구에 빛의 보호막을 만들고 있던 라미아다. 그녀의 마법에 무한대를 그리는 빛의 띠가 생겨나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그에 따라 마수의 모습도 분명해졌다. 옥으로 만든 듯 티 없는 검은색에 가죽은 마치 벨벳을 보는 것 같았다.

솔직히 이드도 제법 멋지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까웠다. 저택에 세워 두면 좋을 것 같은 저놈은 이제 곧 죽어 사라질 테니까.

쩌엉!

호흡이 멈춘 다음 순간, 바닥에 남은 선명한 족적과 함께 이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마수의 머리 위. 이드는 그곳에서 검의 비를 내렸다. 단숨에 마수의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을 만한 공격.

짜자자자작!

그러자 변신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듯 마수의 전신에서 번개가 뿜어지며 공격을 막아 냈다. 동시에 입에서 불을 뿜고,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왔다.

이드는 불을 피하고 꼬리는 철황권으로 튕겨 냈다. 그러자 주먹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놈이 더 이상 안개가 아닌 분명한 형체를 가진 존재로 변한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드의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안개 형태를 하고 있을 때나 까다롭지, 때릴 수 있고 부술 수 있는 분명한 형체를 가지면 제깟 놈은 밥이다. 일라이져를 허공으로 휙 던져 버린 이드가 검게 물든 철황권과 분뢰보를 이용해 마수의 전신을 압박하며 공격했다.

쾅! 펑! 쾅! 펑!

일격 일격에 집채만한 바위가 부서지는 폭음이 났다. 마수가 갈대처럼 휘청인다. 번개를 두르고, 불을 뿜지만 이드를 잡기엔 너무 느리고, 주먹을 막기엔 너무 약했다. 중간에 변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예의 그 탄환도 쏘아 냈지만, 오히려 틈이 되어 이드의 공격만 더해졌다.

분명 변신으로 인해 공격력이 수 배 높아졌지만, 분명히 말해 이드를 상대로는 역효과만 낼 뿐이다.

그렇다고 다시 안개로 형태로 돌아가도 답이 없다.

그저 희미한 본능에 명령만 때려 박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마수의 눈에 암담한 절망이 느껴진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런 눈빛을 봤다고 중간에 공격을 멈출 이드는 아니다. 오히려 주먹에 힘이 더해졌다.

“비웃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불쌍한 척하면 봐줄 줄 알았냐!”

콰르르릉!

철사분영편. 팔이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검은 기운이 마수를 꼼짝 못 하게 둘렀다. 마수가 괴성을 지르며 요동치지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 상태로 마수의 전신을 두드린다. 폭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하기 때문에 무서운 철연영의 경력이 가죽은 물론 그 안까지 흔들었다. 내부가 폭풍을 만난 듯 흔들리자 마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완벽히 정지된 순간.

턱.

비행 중이던 일라이져가 날아내렸다. 이드는 그대로 마수의 머리 위에 커다란 검막을 펼쳤다. 그리고는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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