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07화
943화
세 자루의 검.
“비유요? 아니면 진짜 검?”
“믿고 있던 검의 애검에 찔렸으니, 비유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오.”
그 말에 이어 탑주가 ‘중상일 뿐 죽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이드는 그 말을 한 귀로 흘렸다.
삼검왕이 배신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판을 깔고 지원한 정도라고 여겼는데, 직접 찔렀을 줄은 몰랐다. 과연 그때 검후의 심정은 어땠을까?
특히 이드의 이미지 속 검후는 어린 소녀의 모습 그대로다. 그런 작은 소녀가 호위이며, 동료이고, 제자와 같은 자들의 배신을 당했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진짜 개자식들이네.”
욕이 절로 나온다. 마주 앉은 탑주를 보며 혀를 찼다.
그 눈에 비난의 기색이 있음을 알지만, 탑주는 침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시의 공격이 비겁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당시 도망치지 않고 당당했던 검후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고.
“그래서 검후가 쓰러진 후에는 어찌했소?”
“초인들은 쓰러진 검후를 데리고 떠났고, 마탑도 적당한 대가를 받았소. 우리가 떠날 때까지 삼검왕은 숲에 남아 있었지.”
“삼검왕은 어째서 남았소?”
“비밀로 해야 할 일이니, 전장을 정리하고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겠소?”
“그럼 그 후 그 숲이나 검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 것은 더 없소?”
“없소.”
딱 잘라 즉답하는 탑주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탑은 이후 있었던 은색 기사단에 대한 초인의 기습에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대신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가 마탑을 얼마나 아래로 보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뭐, 새삼스러울 건 없다. 오랜 시간 지원을 하고, 받는 관계였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리라.
물론 마탑에서도 그 관계를 인정하느냐는 둘째 문제일 테고.
당일의 상황을 파악한 이드는 좀 더 자세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날 소드 팰러스에서 나온 자들은 누구누구요?”
“삼검왕. 그리고 청색과 황색 기사단의 기사들. 거기에 더해 양 기사단에 속하지 않은 소수의 정예 기사들이 있었소.”
“소수 정예라면?”
“알 수 없소. 나라고 소드 팰러스의 기사들을 모두 아는 것이 아니진 않소.”
이드는 어깨를 으쓱이는 탑주를 추궁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 소드 팰러스에 있는 기사들을 모두 아는 것은 검후나 삼검왕이라도 불가능할 일이니까.
‘소수 정예라. 삼검왕의 호위병력인가?’
가장 쉬운 추측이다. 아니면, 삼검왕이 숨겨 둔 전력인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많다.
이드는 이 문제는 뒤에 따지기로 하고 초인파에 대해 물었다.
“소드 팰러스와 반대로 초인파는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소. 놈들의 대장도 처음 보는 황금색의 특이한 눈을 가진 자였지.”
“황금색? 발터가 아니라?”
“초인 기사단장을 말하는 것이라면 없었소. 황금안을 가진 자는 라울이라는 자였소.”
“라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이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과거 황궁 파티에서 자신을 라울이라고 밝히며 다가왔던 초인. 이후 발터와 함께 움직여 초인파의 중요 인물로 짐작되던 자였다.
설마 그가 검후를 공격하는 자리에 초인들의 대장 격으로 왔었다니. 문득 파티 후에 그를 놓친 것이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이드였다.
‘어쩌면 초인파의 핵심을 알아낼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친 거네. 이럴 줄 알았으면 파티장에서 두드려 패서라도 잡아 놓을 걸 그랬나.’
물론 그랬다면 파티장이 뒤집어졌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발터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캐다 보면 라울에 관한 정보 역시 자연히 튀어나올 터.
라미아가 본 대로라면 발터와 라울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 같으니, 발터가 라울에 대해 아는 것도 당연할 테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마탑에서는 탑주가 움직이셨소?”
이드가 물었다. 라울 이외의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다시 묻지 않았다. 자신 대신 열심히 기억하고 있을 라미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베이스가 아닌 그녀의 기억력은 거의 컴퓨터에 캠코더 급이니, 믿을 수 있었다.
“아니오. 한데 이미 토벌 중인데 여기까지 알 필요가 있소?”
역시 마탑 이야기라 그런지 반응이 다르다. 소드 팰러스나 초인파에 대해서는 숨기는 것은커녕 거침없이 잘만 말하더니.
“그럼 토벌 중인데 굳이 숨길 필요는 있소?”
“음…….”
“좋소. 어차피 지원 전력이었다고 하니, 자세할 필요는 없지. 대신 누가 당시 마법사들을 이끌었던 것인지만 알려 주시오.”
“……랜달 포스터. 생명의 관 부관주요.”
순간 이드가 무릎을 쳤다.
“이런 아깝군.”
설마 생명의 관 부관주가 검후를 공격한 마탑의 대장이었다니. 잡아 족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가.
라울도 그렇고, 랜달 포스터도 그렇고.
‘중요한 놈들을 다 놓쳤네. 따로 발을 묶을 방법을 찾아 놓든지 해야지. 이거 참.’
쩝 입맛을 다시는 이드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탑주는 서둘러 다음 거래 조건으로 넘어가려 했다. 소드 팰러스나 초인파라면 몰라도 마탑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나오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서로 죽이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 아닌가. 그런 중에 적에게 아군의 정보까지 뭉텅이로 내어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랜달의 이름 하나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럼 마지막 거래 조건인 웨어울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갑시다.”
“좋소. 일전에는 놈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하셨는데. 이젠 좀 알아보셨소?”
검후와 함께 가장 중요한 메르시오에 대한 말이 나왔다. 이때만큼은 이드도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때 본격적인 말을 꺼내기 전에 탑주가 길게 한숨을 쉰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이드는 조바심이 나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말을 꺼내기 전 먼저 못 박아 둘 것이 있소. 이에 대해서는 절대 감추고 있는 것이 없다는 거요. 오히려 나는 이 문제를 알려 준 명예 후작에게 차라리 고마울 뿐이오.”
“흐음. 무슨 뜻인지 알지만, 좀 꺼림칙하군. 보통 그런 말을 하면 의외로 별것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오.”
“후우~ 짐작하신 대로요. 사실 명예 후작이 말한 웨어울프에 대해 알아낸 것이 많지 않소. 하지만 확인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명예 후작은 충분히 만족할 거라고 보오.”
“일단 들어 봅시다.”
“우선 웨어울프가 왜 생명의 관에 있었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오. 확인도 할 수 없소.”
“알고 있소. 생명의 관이 파괴되었으니까.”
파괴한 장본인으로서 모를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불만도 말하지 못하는 이드다. 아쉽다는 생각도 들지만, 잘못했다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곳도, 이곳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곳이니까.
“탈출한 마법사들 중 정보를 가진 마법사도 없었소. 부관주 역시 웨어울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소.”
“그럼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오?”
“생명의 관과 연계된 정보는 그렇소. 대신 전혀 인지하지 못한 존재가 생명의 관에 있었다면, 다른 곳도 안전할 수 없다는 의심으로 정신의 관을 점검했소. 그리고 소득이 있었소.”
말을 마친 탑주는 목이 타는 듯 찻잔에 차를 채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서 찻잔을 내려놓은 탑주의 표정은 참혹했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속에 기생충이 바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느낌일까?
“우선 웨어울프가 정신의 관에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소.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정신의 관을 보호하는 마법에 구멍이 있었고, 거기에 놈의 흔적이 있었소.”
그 말에 이드는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이거 네가 말하던 그거지?
-제가 감지하지 못한 방어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요. 메르시오에 대한 정보가 있는 상태로 의심을 가지고 살펴서 알아냈겠죠.
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탑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탑주의 말은 빠르게 진행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탑에 구멍이 있고, 외부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은 때문이리라.
“또 생명의 관과 마찬가지로 폐기장에서 놈의 흔적을 발견했고, 동시에 같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소.”
“알 수 없는 의식이라.”
“그렇소. 마탑에서는 알 수 없는 의식의 흔적이었소. 다만 폐기장에서 사라진 것은 없소. 폐기품들을 포함해서.”
폐기품이라면 인체 실험에 실패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드는 그 단어가 거슬렸지만 당장은 메르시오가 중요하기에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어떤 흔적인지 알고 싶소만?”
“그럴 줄 알고 영상을 준비했소.”
그러면서 영상을 저장한 수정구를 지도가 든 원통 옆에 올려 두는 탑주다.
“그럼 웨어울프의 흔적은 그것이 끝이오?”
“분하게도 그렇지 않소. 놈의 흔적은 서고와 실험실 두 곳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 세 곳 역시 폐기장과 마찬가지로 분실된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소. 다만 서고는 초인 마법을 정리한 곳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어졌다고 장담할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서고는 지식의 창고다.
지식의 특성상 꼭 책이나 연구 보고서를 가져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지식을 훔쳐 갈 수 있다. 그렇게 훔쳐 간 지식은 티도 나지 않는다. 장담할 수 없다는 탑주의 말은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동시에 탑주가 또 하나의 수정구를 탁자에 올려 둔다.
“놈이 서고에 침입한 모습을 담아 놓은 수정구요. 복사본이며 원본은 내가 가지고 있소.”
우우웅!
말과 함께 탑주가 수정구를 작동시키자 느긋한 모습으로 서고를 뒤적이는 메르시오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긴 주둥이로 살을 뜯어 피를 볼 것처럼 생긴 웨어울프가 유심히 책을 읽는 모습은 코믹하기도 하고,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그레센 대륙 어디를 뒤져 봐도 책을 읽는 웨어울프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곧 사라졌고, 그 뒤를 따라 탑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명예 후작에게 줄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가 다요. 한마디 더 하자면 이놈이 어떤 놈인지, 어디서 온 놈인지는 알 수 없으나, 허락 없이 마탑에 침입하고, 마탑의 지식을 훔친 이상. 세상의 끝까지 놈을 추적하여 죽일 것이오. 그런 의미에서 놈의 존재를 알려 준 명예 후작과 후작 부인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바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품위 있게 감사를 표하는 탑주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다만, 감사의 마음보다 메르시오를 향한 분노와 살기가 더 진해서 인사를 받는 입장에서 헷갈리는 게 문제랄까. 그리고 다시 앉은 탑주가 말했다.
“이것으로 명예 후작이 요구한 조건에 대한 지불이 모두 끝났으니, 바이트 타블렛을 돌려받았으면 하오만.”
감사는 감사고, 거래는 거래라는 듯 바이트 타블렛을 보며 뜨겁게 눈을 번뜩이는 탑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