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39화
975화
두근.
처음 이드의 등장을 알았을 때, 격렬하게 펌프질 하는 심장과 흥분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검을 멈추고 돌아섰다.
존 워스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인의 피 맛을 본 검을 중간에 멈추는 것은 말이다.
그의 초인 혐오는 유명하다. 다른 일에는 사리 분별이 분명하고 경우에 따라 배려할 줄도 알지만, 초인만 관련되면 사람이 달라진다. 오죽하면 그가 일단 한번 초인의 피를 봤다 하면 가족보다 가깝다 할 수 있는 두 검왕도 말리기를 포기할 정도였다.
피 없이 초인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은 철저하게 공적인 일로만 엮여 있을 때가 유일했다.
그런 존 워스가 보통 초인도 아니고, 최고의 초인이라는 발터의 피를 보다 말고 검을 거둔 것이다.
바로 이드를 본 후에 말이다.
그러나 정작 존 워스는 격렬한 심장의 두근거림에 스스로 신기해하는 중이었다.
마치 초인의 피를 볼 때의 느낌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이 되는 감정이 혐오와 분노가 아니라는 점이 달랐다.
오히려 격렬한 호승심과 투지.
이제는 희미해진, 옛날의 순수한 감정에서 오는 설렘인 것도 같다.
존 워스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드가 나타난 것을 보고도 몸을 피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투구 하나 뒤집어쓰고 이드와 마주 선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리고 이드와 처음 검을 나눈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래서일 것이다. 얼굴만 가린 후에 존 워스라는 이름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검법인 플레서블을 쓰는 오류를 범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면 어때서? 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상대로 진짜 검법을 숨기면서 싸우는 병신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
상대는 같은 삼검왕인 마르텔을 꺾은 강자다.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몰라도, 한번 맞붙는 이상 진짜 실력을 숨겨 가며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려 저 고집만 강한 마르텔이 강하다고 순순히 인정한 상대가 아니냔 말이다.’
그래서 전력을 검을 휘둘렀다.
불꽃이 튀고, 살이 갈라지고, 검강에 뼛속이 저릴 정도로.
그럴수록 심장은 오히려 더욱 크게 뛰고, 투지는 끝없이 치솟아 오른다.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고, 이대로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이 무한한 투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자신의 마음속 어디에 이런 불꽃 같은 열정이 살아 있었던가.
존 워스는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를 철벽으로 만든 냉철한 머리는 이 전투를 비관했다.
전투가 이어지고, 상처가 늘어날수록 승패의 흐름과 실력의 고하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하다. 마르텔, 그 친구에게 들은 것 이상으로 강해!’
그리고 자신은 약했다.
그럼에도 꺼지지 않고 뜨겁게 달아오르기만 하는 참을 수 없는 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렇게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 사이의 괴리에 혼란스러워할 때였다.
이드의 검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붉은 검강이 살기만으로 피부를 갈랐다.
아지랑이 같던 강사가 하늘에서 내리는 폭포수처럼 철벽 위로 떨어져 내려, 지금까지 존 워스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철벽을 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금이었지만, 그 범위가 넓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쩌어어억.
폭포수처럼 쏟아진 강사는 빠르게 하나로 뭉쳐지더니, 하나의 붉은 검이 되어 철벽을 반으로 갈라 냈다.
그건 존 워스의 방어뿐 아니라, 전투의 흐름까지 갈라 버린 것이었다.
또 플렉서블이라는 검법의 맥을 끊는 것이기도 했다.
태극검도 그렇지만, 그와 유사한 플렉서블에서 흐름과 맥은 검법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흐름이 멈추는 순간 사람으로 치면 호흡이 끊어지는 것과 같고, 그건 곧 커다란 빈틈으로 나타났다.
서로 격식을 갖춰 겨루는 비무가 아닌 이상, 이드로서는 당연히 그 빈틈을 놓칠 이유가 없다.
서거걱!
휘리리리릭!
붉은 검강이 스치며 존 워스의 가슴이 쩍 벌어졌다. 그를 보호하던 갑옷이 있었지만, 수라참마인은 보호 마법째로 갑옷과 존 워스를 함께 갈라
버렸다.
하지만 수라참마인의 무서운 점은 강력함만이 아니다.
검강이 가슴을 가르는 순간, 하나로 뭉친 강사가 올올이 풀리며 존 워스의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순간 커다란 강에 지류가 이어지듯, 가슴을 가른 큰 상처 주변으로 거미줄 같은 상흔들이 생겨났다.
“으으읍!”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에 순식간에 피투성이로 변한 존 워스다.
끔찍한 고통이 있을 텐데도 이를 악문다. 오히려 내력으로 출혈을 막고 검을 든다.
그 모습에선 끝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있었다.
이드도 그것을 느꼈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어째서 초인기를 사용하지 않는 거지? 저렇게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정체가 철벽의 검왕이라는 것보다 자신이 초인이란 사실이 더 중요한 비밀이란 건가?’
정확히 어떤 초인기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든 사용하면 최소한 탈출을 시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드로서도 순순히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그런데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죽겠다는 것일까? 철벽의 검왕이 마탑과 손을 잡고 토벌대를 노렸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괜찮다는 것일까?
의아했다.
‘하지만 그건 댁 사정이고, 죽고 싶다면 죽여 주지 못할 것도 없어.’
이대로 존 워스를 없애 버린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암살 기사로 오 조를 공격할 땐 사용하던 초인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드는 굳이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정한 이드의 검은 냉혹해 졌다. 일말의 여유를 버리고 오로지 적을 치는 것에 집중한 이드의 검은 빠르고, 치밀하며, 무엇보다 강했다. 쩌저저정!
콰드드득!
붉은 검영이 번뜩이고, 사방에 난화십이식의 꽃잎이 난무한다.
치밀어 오르는 고통에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악문 존 워스가 억지로 플렉서블을 전개하지만, 그 반항은 한순간에 조각조각 분해된다.
이미 실력에서 한참 앞서는 이드다. 그저 존 워스가 가진 비밀을 보자고 여유를 부리던 때와는 다르다.
그 상태에 이미 플렉서블의 구성과 흐름의 파악까지 끝났다. 존 워스가 제대로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허무하게 무너진 방어벽을 넘은 낙화가 존 워스의 요혈들에 떨어져 내리며 동전만 한 구멍을 만든다.
“크악!”
뼈에 구멍이 생긴 고통만은 참기 어려운 듯, 입술을 깨문 존 워스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진다. 그러면서도 힘겹게 들어 올리는 검.
이드는 내심 그 투지를 인정하며 본인도 검을 들었다. 투지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가가가가각!
xld!!
검과 검이 격렬하게 얽히고설키더니 맑은 쇳소리와 함께 한 자루의 검이 허공으로 튕겼다.
검의 주인은 존 워스,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검을 잡은 손은 지진에 갈라진 땅처럼 허연 뼈가 드러날 정도로 갈라져 있다.
단순히 힘이 부족해 놓친 것이 아니었다. 검을 타고 역류해 들이친 회오리 같은 검경에 손아귀 근육과 힘줄이 끊어지며 검을 더 잡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한 수로 철벽의 검왕은 검을 잃었다.
검을 잃은 검왕을 검왕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클래스는 영원하다지만, 상체가 피투성이가 되고,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하늘을 향하던 이드의 검이 내려온다. 검이 향하는 곳은 존 워스의 목.
“지금이다!”
그리고 외침이 터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파이어 자벨린!”
“언리얼 바인드!”
“허리케인!”
이드를 향해 이 층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쏟아 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위기감이 가득했다. 설마 존 워스가, 철벽의 검왕이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이야.
그들은 내심 존 워스가 이드를 이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의 상황이 오면 존 워스를 지원하려 했다. 그런 생각에 아래층에 있는 마법사들에게는 전투 중에 은밀히 발터와 후작 부인을 노리라는 메시지도 전달한 상태.
그러나 존 워스와 겨루는 이드는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존 워스를 지원하고 싶어도,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드를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겨우 두 사람이 멈추고 타깃 설정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존 워스의 상체가 피로 물든 다음이었다.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 전혀 본 것이 없었지만, 누가 피를 흘리고 있는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답이 보였다.
존 워스를 죽이고 나면 저 검은 누구를 향할 것인가.
자연히 떠오른 질문에 마법사들은 마나를 쥐어짰다. 한마음으로 쏟아 낸 마법은 마치 폭격 같았다.
공간을 가르는 마나의 압력에 공기가 떨렸다.
하지만 이드는 그 무시무시한 마법의 폭풍에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존 워스의 목을 향하던 검의 방향을 바꿨다.
턱.
그렇게 검이 향한 곳은 존 워스의 머리. 검면이 닿았기에 머리가 쪼개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 존 워스는 머리를 잡힌 인형처럼 맥없이 검에 딸려 공중에 떴다.
이드는 그 상태로 종이 인형처럼 흔들리는 존 워스를 등 뒤로 던졌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마법의 폭풍 앞으로 말이다.
“멈춰!!”
설마 존 워스를 방패로 던질 것을 예상하지는 못한 듯, 장로가 기겁해서 외친다.
하지만 발동한 마법을 중간에 해제시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멈추는 건 그보다 더하다.
무엇보다 이드를 단숨에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던가.
“못 멈추겠습니다!”
“으아악!”
울상이 된 마법사들의 비명과 함께.
퍼펑!
파이어 자벨린의 불꽃을 시작으로 온갖 위력적인 마법들이 존 워스의 몸을 두드렸다.
장로는 그 모습에 질끈 눈을 감았다.
‘존 워스는 포기다.’
판단은 빨랐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존 워스다. 그 위에 자신들의 마법까지 떨어졌다. 이대로면 걱정하던 대로 이드의 검이 자신들을 향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밀어붙이자.
“멈추지 마! 모조리 쏟아 내! 명예 후작을 죽이란….!”
그렇게 소리치던 순간, 갑자기 그 앞으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석실에 가득한 마법광과 폭발의 빛 때문에 상대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그 그림자의 손에 들린 짧은 검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석실 아래서 뛰어오를 만한 기사가 누가 있을까. 하나뿐이다.
‘명예 후작, 빌어먹을.’
서걱.
순간 이드의 일라이져가 장로의 목을 베었다. 그 역시 정신의 관의 장로로 세 가지 보호 마법이 자동으로 그를 보호했지만, 검강은 마법까지 두부처럼 베어 버렸다.
이드는 뒤로 넘어가는 장로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이 층 난간 위를 미끄러졌다. 두려움에 마법을 쏟아붓던 마법사들은 이드의 존재도 인지하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그렇게 모든 마법사가 머리 없는 시체가 되고 마법의 폭발이 사라진 순간.
석실 구석에 걸레처럼 구겨진 존 워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놀랍게도 그는 그 마법의 폭풍 속에서도 숨이 붙어 있었다.
그 질긴 생명력엔 이드도 혀를 내둘렀다. 그때였다.
“이드! 부관주예요!”
낭랑한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