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45화
981화
탈출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기 때문에 마법에 대해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우선 살고 봐야 할 일이니까.
“처음은 황녀 전하부터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먼저 가려는 사람들 속에서 쉴라가 외쳤다.
그녀의 말에 따라 스폴이 이끄는 아이넬 기사단이 황녀를 호위하고 마법진 위에 올랐다. 쉴라와 일리나, 그리고 라미아를 돌아보는 황녀의 눈엔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상한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전투야 용기와 실력으로 극복이 가능하지만, 지진으로 인한 생매장은 하늘에 닿는 용기가 있어도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모두 기사의 품위를 잃지 말고 질서 있게 행동하시오.”
황녀를 보낸 후, 쉴라의 말 때문인가, 아니면 황녀가 무사히 탈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가.
사람들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라미아 님을 향한 눈빛이 뜨겁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대규모 이동 마법에 마법사들과 외교관들이 엄청난 관심을 보여 온 것.
그나마 어떻게 된 건지 묻는 자들이 없는 점이 다행이었다. 라미아를 방해하는 만큼 자신들의 탈출이 늦어진다는 걸 알아서였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생명의 은인에 대한 예의를 알면 좀 참아 주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고소를 띠는 쉴라였다. 호기심에 미친 마법사들과 귀족들 중 염치를 아는 자들이 많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 일리나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이그렌 경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대요. 스폴 경이 떠나기 전에 말했어요.’
그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쉴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바로 이해한 라미아는 혀를 찼다.
“사무엘 백작 일 때문인 거죠? 혹시, 당한 건?”
“최근에 확인한 이그렌의 실력으로 봐서, 그럴 일은 없어요. 대신 변수는 있죠. 스폴 경의 말로는 어떤 기사가 사무엘 백작을 옆길로 유도했다고
했어요.”
‘그 녀석인가?’ 하고 생각하며 턱을 쓰다듬는 라미아였지만,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럼 일리나가 이그렌을 좀 찾아 줄래요? 전 당장 여기 있는 사람들의 탈출이 끝나면 록마틴 후작과 사 조를 찾아서 내보내야 해요. 그 일을 마무리한 후에 바로 돌아올게요.”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저도 돕겠습니다.”
쉴라가 끼어들었다. 라미아와 일리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가 탈출했다.
쿠쿵!
드드드득
순간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축이 부서지는 듯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정신의 관 던전 자체가 기울기 시작했다.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그걸 느낀 세 사람은 서로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은 후, 각자 움직였다.
“이그렌 경을 찾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라미아도 조심해요.”
“두 사람도요. 그리고 따로 떨어지지 말아요. 일리나 말고는 위치를 특정하기 힘드니까!”
세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라미아의 당부를 담은 목소리만 길게 남았다.
한편, 지상도 지하만큼이나 난리가 난 상태였다.
진 중앙에 멀쩡히 서 있던 막사가 갑자기 무너지더니, 그 안에서 축 늘어진 시체 같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솟아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이은 땅 울림과 크고 작은 진동에 토벌대를 걱정하던 사람들로서는 혼비백산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부재중인 록마틴 후작을 대신해 진지의 임시 책임자가 된 해머든 백작의 놀람은 더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저들은 분명 오 조의 초인들이 아닌가!”
그는 보고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시체처럼 널브러진 초인들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서, 설마 전부 죽은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밑에 깔린 사람들의 무게 때문에 곧 질식할 겁니다. 서둘러 옮겨야 합니다.”
해머든 백작의 말에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급히 다가가 말했다.
그 말에 해머든 백작이 퍼렇게 질려서는 주변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진지에 남은 병사와 기사, 그리고 마법사와 신관까지 모조리 불러오라 시킨 것이다.
그런 뒤 직접 두 팔을 걷어붙이고 기사들과 함께 초인들을 들어내려 할 때였다.
“명예 후작님의 명이시다. 적색 기사단은 지금부터 동료 조원들을 구하라.”
“알겠습니다!”
갑자기 한쪽 벽만 겨우 남은 막사 안에서 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곤 거기서 붉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쓰러진 이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초인들을 눕히곤 손발을 묶었다.
“머, 멈추시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오!”
갑자기 등장한 적색 기사단에 놀라고 있던 해머든 백작이 버럭 소리쳤다. 정신을 잃은 동료를 묶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해머든 백작에게 라발이 다가갔다.
“해머든 백작님께 인사드립니다. 토벌대 오조 복귀를 신고합니다.”
“라발 단장. 갑자기 복귀 신고라니. 아니, 할 말은 많지만 다 뒤로 하고, 저게 지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후작 부인의 명령입니다.”
“라미아 후작 부인 말씀이시오?”
“네. 초인기 방해 마법을 아실 겁니다. 그런 종류의 기술에 당한지라, 지금 초인들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일단 후작 부인께서 재우긴 하셨지만, 깨어났을 때 정신을 차릴지 여부에 대해선 확신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니 일단 묶어 두라 말씀하셨습니다.”
“끄응. 알겠소. 그런 사정이라면 돕도록 하리다.”
곤란한 듯 이마를 매만지던 해머든 백작이 뒤늦게 모여든 사람들에게 적색 기사단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이 주변을 비워야 합니다. 나머지 토벌대 역시 이곳으로 이동해 올 겁니다.”
“토벌대를 전부 이동 마법으로? 도대체 던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해머든 백작의 태도도 잠시. 곧이어 황녀가 이동해 오자 모든 의문은 뒤로 밀려났다. 황녀 역시 라발과 마찬가지로 라미아의 말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 조와 삼 조까지 이동한 후엔 더더욱 물을 정신이 없게 되었다.
쿠궁!
쩌저저적!
“으헉! 지진이다!”
“땅이 갈라진다!”
작은 땅 울림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지진이 진지를 뒤흔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던전의 입구 저 뒤쪽 땅이 협곡처럼 쩍쩍 갈라지는 모습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만약을 대비해 진지를 후방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하게도 해머든 백작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진의 강도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몰랐다. 이 인공적인 지진이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파앗,
바이트 타블렛이 사라진 조용한 석실에 흐트러진 모습의 탑주가 나타났다. 그는 바이트 타블렛과 메르시오가 뚫어 놓은 바닥의 구멍을 확인하고는 침중한 표정이 되어 다시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그런 탑주가 다시 나타난 곳은 마법사들이 떠나고 연기만 가득 남은 석실이었다. 마법사들의 탈출은 이미 계획되어 있던 일이기에 그가 분노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발을 굴렀을 뿐.
그러자 사방의 벽이 짧게 빛나더니, 불이 꺼지고 연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엉망이던 석실 내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수정구 역시 복구되어 있었다. 탑주는 자연스레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찾는 것은 바로 바이트 타블렛과 해더웨이.
메르시오를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탑주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메르시오의 힘에 오히려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저 남의 던전이나 터는 좀 강한 좀도둑 정도로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강자였다.
메르시오가 자신의 발을 묶어 놓고 향한 곳은 바이트 타블렛이 있는 최하층.
만약 해더웨이가 아직 바이트 타블렛을 옮기지 않았다면? 메르시오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기에 애가 탄 탑주였다.
급히 뒤엉킨 마나의 폭류를 해소하고 복귀한 던전. 하지만 그가 왔을 때, 바이트 타블렛과 해더웨이의 생명 반응은 사라져 있었다. 분명 바이트 타블렛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리긴 했다. 하지만 그 둘이 어디에 있든 탑주는 그 존재를 감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자연 메르시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탑주였다. 무엇보다 석실 바닥에 생긴 구멍이 가장 큰 증거가 아닌가!
탑주가 곧장 마법사들의 석실로 이동한 까닭은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선 던전 안의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로 확인해 보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해더웨이의 생명 반응이 끊어진 위치를 찾아낸 탑주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해더웨이가 죽은 곳을 중심으로 날뛰고 있는 두 존재. 이드와 메르시오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 둘이 저 자리에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절대 아닐 것이다.
이드라면 몰라도, 최소한 바이트 타블렛을 쫓던 메르시오는 아닐 것이다. 탑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론은 나왔다. 바이트 타블렛은 저 두 사람 중 하나가 가지고 있다.
“허! 허허허허!”
탑주는 차라리 웃고 말았다. 웃지 않으면 가슴에 든 분노에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이드에게서 바이트 타블렛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겼단 말인가.
탑주는 그 자리에 서서 최소 삼 분은 해더웨이를 욕하고 저주했다. 지옥에 떨어진 해더웨이가 들었다면 지옥에서 다시 자살했을 만큼 끔찍한 말들을 읊조리면서.
그 덕분에 금방 안정을 찾은 탑주는 다시 수정구를 살폈다.
수정구에 비치는 이드와 메르시오. 그 둘은 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존재가 맞을까 싶을 정도였다. 마치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한 듯 보였다.
“저런 자를 고작 삼검왕과 비교했단 말인가.”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인간은, 웨어울프는 절대 저렇게 땅속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없다.
둘이 교차할 때마다 그 충격에 어김없이 벽이 뜯겨 나가고, 천장과 바닥이 무너진다.
땅속에서 부딪힐 땐 깊은 지하에 지름 수십 미터의 둥근 공간이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존재 자체가 자연재해. 그런 그들이 저기서 싸우고 있다는 건 곧 정신의 관의 멸망을 알리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버릴 곳이었다. 탑주는 당장 던전이 무너지는 것에는 상관치 않고, 이드와 메르시오의 힘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강제로 빼앗기는 어렵다.”
탑주의 자존심상, 그리고 초인 마법에 대한 믿음 때문에라도 순순히 인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분명 저들에게서 바이트 타블렛을 억지로 탈취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으로는 과거 이드와 싸우지 않고 협상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자찬했다. 만약 강제로 회수하려 했다면, 그날 정신의 관은
무너졌으리라.
“부디 해더웨이가 저 웨어울프에게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긴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
이드가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생명의 관에서 빼앗긴 바이트 타블렛과 같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물론, 이드가 돌려주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는 탑주의 생각이다.
반대로 저게 만약 메르시오의 것이라면 제법 골치 아픈 일이 된다.
저만한 힘을 가진 자에게 다시 받아 오는 것은 힘들었다. 게다가 상대의 정확한 정체조차 알 수 없다. 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인지라도 알아야 이후에나마 찾아올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저자가 바이트 타블렛을 빼앗은 거라면, 무조건 지금 되찾아 와야 한다.’
그러자면 혹시라도 이동 마법 등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동시에 저 미쳐 날뛰는 힘도 꺾을 필요가 있다.
깊은 생각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탑주가 결심을 굳힌 듯, 수정구에 얹은 두 손에 마나 집중했다. “정신의 관을 부상시킨다.”
구우우우우우우~
순간 수정구를 타고 전달된 탑주의 마나를 받은 중심 핵이 축적된 모든 힘을 뿜어내며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