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46화
982화
탑주가 깨운 중심핵은 마탑의 심장이었다.
마법사들이 두뇌라면, 마법사들의 뜻에 따라 정신의 관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마나를 공급하는 것이 중심핵의 역할이었다.
즉, 거대한 마나의 저장고가 중심핵의 정체였다.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마탑의 동력원.
그러나 지금까지 중심핵이 백 퍼센트 전력으로 가동된 적은 없었다.
수천 토벌대가 왔을 때도 전 층의 모든 시설을 한꺼번에 가동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며, 예기치 못한 순간 최후의 한 수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실 탑주는 토벌의 끝에 정신의 관을 버리고 떠날 계획을 세우면서도, 중심핵을 완전히 깨우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임시로 폐쇄했다가 미완의 마탑이 대륙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았을 때 다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중심핵만을 따로 떼어 남은 영혼의 관에 써도 괜찮고 말이다.
하지만 바이트 타블렛을 탈취당했으니, 계획한 모든 게 바뀐 셈이다.
지금은 바이트 타블렛이 먼 곳으로 이동하는 걸 막는 게 최우선이었다. 설령 중심핵과 정신의 관을 포기할지라도.
탑주는 깨어난 중심핵에 서른세 구절로 이루어진 시동 주문을 박아 넣었다. 다음 순간.
뿌우우우-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마나가 뿜어지며 고래 울음 같은 커다란 소리가 났다.
뒤이어 중심핵에서 시작된 마나가 힘찬 박동과 함께 정신의 관 17개 층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999개의 마법이 발동했다.
쿵쿵, 쿵쿵, 쿵쿵.
중심핵을 통해 하나로 이어진 마법들이 공명하며, 정신의 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에 있던 입구가 무너지며 아래로 가라앉았고, 바이트 타블렛이 숨겨져 있던 최하층이 지상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탑주의 의도대로 정신의 관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잠수정도 아니고, 커다란 던전인 정신의 관이 움직였다. 안팎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그건 정신없이 싸우던 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메르시오와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사방을 부수며 날아다녔다고는 해도, 지금 이 떨림은 수준이 달랐다.
당장 광견병 걸린 늑대처럼 달려들던 메르시오의 공격이 주춤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놈도 정신의 관에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파악한 것이리라.
다만 메르시오와 자신의 차이점이라면, 혼자인 메르시오와 달리 자신은 의견을 구할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이드는 즉시 라미아를 찾았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도 의아한 노릇이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모두 무사히 탈출했는지도 궁금했다.
‘라미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이런 이드의 물음에 즉각 라미아의 답이 돌아왔다. 그녀도 지금의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여기 마법사들은 정말 미친 게 확실해요. 이 작자들이 지금 정신의 관을 지상으로 끄집어내고 있어요.
‘내가 느끼기도 그래. 빠르지는 않지만, 공간 전체가 위로 움직이고 있거든. 근데, 그뿐이 아니야. 기울어지기도 하고 있다고.’
‘당연하죠.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준비했어도, 이 커다란 정신의 관을 어떻게 아무 이상 없이 통째로 움직이겠어요?’
그렇게 말한 라미아는 현재 정신의 관의 상태를 놀이터에 있는 시소에 비교했다.
현재 이드가 있는 최하층을 지상으로 끌어 올리는 대신, 지상에 가까운 상층을 땅속으로 내려 버리는 것.
쉽게 말해, 정신의 관 자체의 무게를 이용해서 위치를 바꾸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보통은 불가능할 그 일은, 미리 준비된 999개의 마법과 중심핵의 마나가 가능하게 만든 거고.
‘이미 다 끝난 시점에 이러고 있는 이유는 짐작이 가?’
‘설마요. 전 정상이라고요. 다만, 그래도 굳이 예상해 보자면 바이트 타블렛이 탈취당했다는 걸 알고 눈이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죠.’
그리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으니까요.’라고 말을 덧붙인 라미아.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이런 대담한 짓을 할 사람이 탑주 말고 누가 있겠나.
‘결국 저 똥개하고 내가 목표라는 거네. 그럼 문제없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히려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면 어떤 것이든 헤치고 나갈 자신이 있는 이드였다.
차라리 자신만 노려 주면 마음도 편하고, 움직이기도 쉽다.
마침 메르시오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뿜어내는 마나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이드가 사라진 구십 년, 놀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 회심의 한 수쯤은 있으리라.
그리고 그걸 상대하다 보면 지금까지 이상으로 주변에 충격이 갈 것이고, 자연스레 이것저것 부수게 될 것이다.
‘큰일이네. 저놈 이제 몸풀기 끝난 모양인데. 다들 탈출은 마친 거지?’
‘이제 막 록마틴 후작과 사조를 내보냈어요. 여기도 피해가 적진 않네요. 그리고 지금 일리나를 데리러 갈 생각이에요.’
‘일리나는 먼저 내보낸 거 아니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리나가 아직 이 엉망진창인 곳에 있다는 말에 급히 묻는 이드였다.
그에 라미아가 이그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랬구나. 그럼 최대한 빨리 세 사람을 찾아서 빠져나가. 그리고 만약 아직도 이그렌을 찾지 못했다면, 그레이에겐 미안하지만 이그렌은 포기해.’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이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 사방이 뒤집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불의의 사고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법이다.
‘그 말은 그대로 전할게요.’
‘나가거든 말해 주고. 마침 똥개 온다.’
‘확실하게 된장 발라 버려요!’
이드는 지극히 한국적인 라미아의 응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무극신기를 풀어냈다. 고요히 가라앉았던 무극신기가 움직이는 순간 일주천이 끝났다.
전신 경맥을 모두 도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무극신기의 운용이 그만큼 능숙하다는 것이며, 또 무극신기가 온몸 어디 하나 빈 곳 없이 그득하게 채워져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주천. 또 일주천.
무극신기가 경맥을 지나는 횟수가 더해질 때마다 이드의 등 뒤로 반딧불처럼 희미한 후광이 별빛처럼 부서져 내렸다.
무섭다기보다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어떤 위대한 존재를 마주한 듯, 영혼이 압도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지금의 이드였다. 이 모습을 보았다면 제국의 황제라도 감히 이드를 ‘명예 후작’ 따위로 삼겠다고 나서지는 못했으리라.
다만 문제는, 이런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드뿐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와 거리를 두고 멈춘 메르시오.
놈의 은빛 털이 마치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이드의 손에 잘리고, 그을린 모습은 어느새 흔적도 없어졌다.
은빛 털 위로 흐르는 무형의 힘에 주변 형상이 아른거리며 일그러져 보일 정도다.
“솔직히, 걱정을 좀 했었다. 네가 과거의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실력이라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아하~! 그런 시답잖은 걱정을 하셨어?”
“그래. 헛된 걱정이었지. 그리고 지금 네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오래 기다린 만큼, 즐겁게 싸울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마냥 기쁜 모양인데, 기다려. 곧 된장 발라 줄 테니까.”
“된장이 뭔진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발라 주도록 하지!”
“모르면 말을 하지 마!”
인간이 된장을 왜 바르냔 말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노려보는 시선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콰득.
동시에 이드와 메르시오가 디디고 선 바닥이 부서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초속의 세계로 진입했다.
어지간해서는 눈으로 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 이드와 메르시오는 그 속도의 한계를 기본으로 넘나들고 있었다.
오로지 그 빠른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충격파만으로 주변을 파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세계. 그 안에서 그보다 더욱 빠르게 수라삼검의 강사가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음속을 넘어선 붉은 강사는 산허리를 휘감은 노을처럼 자연스레 메르시오를 덮쳤고.
파사사사사
불꽃처럼 일렁이는 메르시오의 은빛 털에 부딪혀 종이가 타들 듯 맥없이 사라져 버렸다.
몇 초 전까지 메르시오의 털을 잘라 버린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니, 과연 단순한 분위기 전환용 변신은 아니라는 것일까.
그렇게 이드가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크르르릉! 그따위 공격은 이제 날 벨 수 없다!”
메르시오가 웃음소리 같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재주를 넘듯 회전을 했다. 그러자마자 그의 전신에서는 은빛 물결 같은 파동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었다.
그리고 이드의 모습이 다시 드러나기도 전, 메르시오는 전방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 행위가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허공에 그와 똑 닮은 늑대 주둥이가 나타나 이드가 있던 공간을 물어뜯었다.
단단한 석벽이 크림치즈처럼 뭉개지고, 전방 수백 미터 공간이 압착기에 눌린 듯 찌그러졌다.
수천 군사를 단숨에 몰살할 수 있을 만큼 가공할 위력이지만, 이드는 이미 회피한 뒤였다.
그는 다치긴커녕 오히려 뒤틀린 공간 뒤에서 검강을 쏘아 냈다.
뇌력을 담은 검강이 일그러진 공간의 표면을 타고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뻗어 나가며 메르시오의 가슴과 등을 두드렸다.
퍼퍽!
역시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충격은 받은 듯하지만, 여전히 은색 털 한 터럭도 잘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 이드다. 방금 공격은 허초, 진짜는 따로 있다.
그 순간, 압착된 공간을 넘은 이드가 비혼잠영의 연환기를 쏟아 냈다.
느린 대신 무겁고, 끈끈한 힘을 숨긴 검영.
앞서와 같이 무시하려던 메르시오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듯 몸을 비틀었고,
푸스스스~
불길처럼 일렁이던 어깨의 털이 허공으로 뜯겨 날아갔다.
동시에 목표를 잃은 검영이 뒤에 있는 벽에 구멍을 만들었는데, 얼마나 깊게 뚫렸는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깝네. 하도 자신감 넘치길래 그런 널 위해 따로 준비한 공격인데. 그걸 피하냐. 좀 더 힘만 센 바보짓을 해 주지 그랬어.”
“크흐흐흐. 이래야지. 이래야 재미있지!”
큰 웃음을 터트리는 메르시오. 어깨가 잘려 나갈 뻔했는데도, 오히려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는다.
“피곤한 스타일이야.”
혀를 차며 다시 검을 든 이드.
번쩍.
무형대천강이 두 개 층을 뚫어 내며 메르시오 머리 위로 떨어지고, 금백적의 삼대 지공이 그 틈을 노리고 유성처럼 날아든다.
메르시오는 웨어울프 특유의 움직임을 보이며 변형된 실버 쿠스피드를 휘두른다.
남는 게 힘밖에 없는 건지, 그가 팔다리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벽이 무너지고, 위층과 아래층이 합쳐졌다.
이러다 17층 던전이 1층짜리 던전으로 변할 기세다.
거기에 중간중간 감초처럼 심심하면 쏘아 대는 스칼렛 버스트의 열선은 기본 네 개 층을 관통하는 구멍을 뚫어 대며 공간을 뜨겁게 달군다. 좀 전보다 한 차원 격렬해진 전투,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한 파괴 범위는 세 배 이상 넓어졌다.
그러던 중, 멸혼향을 품은 검극과 장검처럼 길게 뻗은 손톱이 또 한 번 충돌할 때였다. 머릿속에 갑자기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그렌을 찾았고, 지금은 진지가 있는 지상으로 탈출하는 것까지 끝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 걱정하지 말고, 단숨에 끝내 버려요!’
박력 터지는 목소리에, 조그만 주먹을 붕붕 휘두르는 라미아의 모습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한창 재밌는 중에 설마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툭 하고 허공을 차며 갑자기 거리를 벌리는 이드에 메르시오가 바짝 따라붙으며 소리쳤다.
“그런 걱정은 말라고, 더 재밌게 해 줄 테니까. 전에 이런 거 본 적 있으려나? 광인멸혼류라고 하는데.”
씨익.
상쾌한 웃음을 지어 보인 다음 순간, 이드가 흡사 태양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전신에서 눈을 멀게 만들 만큼 강한 빛이 뿜어졌다. 한데 착각일까.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이드의 모습을 마주한 메르시오의 입이 느슨하게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표정 속에 담긴 감정은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보단 오히려 기다리던 순간을 드디어 마주했을 때의 환희에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