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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49화


985화

탑주가 던전에 숨겨진 최후의 마법, 베리타스를 발동시키자 힘없이 부스러지던 붕괴가 멈추고 마탑이 깨어났다.

떨어져 나가던 벽과 기둥이 뭉그러지며 엉겨 붙고, 붕괴된 내부는 생물의 내장처럼 출렁이더니 일정한 형태를 이루며 단단히 굳었다.

그런데 서서히 변화하는 던전의 모습이 참으로 기이했다.

부서진 잔해가 아래로 내려가 하나로 뭉치고, 조각나며 부상하던 상층은 여러 갈래로 찢어져 꿈틀거리는 모습이 꼭 뒤집어 놓은 문어와 비슷했다. 사실 탑주가 발동시킨 베리타스는 마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옥에 서식하는 마물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했다.

이 지옥 출신 마물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매우 강력하고 특이했다.

우선 이놈은 머리를 땅속에 숨기고 산다. 대신 밖으로 꺼내 놓은 천 개의 촉수를 움직여 사냥을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촉수마다 각기 다른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 출처가 불분명한 말이니만큼 잘못된 정보가 섞였다는 것을 감안해도, 촉수에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촉수의 능력을 별개로 두더라도, 강철도 녹이는 용해액과 생긴 대로의 변태적인 재생력, 그리고 크라켄보다 큰 덩치는 그 자체로 위협적이다. 만약 이놈이 중간계로 소환된다면 작은 나라의 절반 정도는 날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일 정도.

탑주의 마법 베리타스는 엄밀히 말해서 마탑을 깨웠다기보다, 이런 마물의 힘을 정신의 관에 덮어씌웠다는 게 더 정확했다. 이윽고 이 난폭한 놈은 탑주가 잡은 고삐를 따라 촉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바박!

이드의 용조와 은빛 송곳니가 복잡하게 얽히다 떨어진다. 그 사이에서 뿜어진 충격파에 벽이 검에 베인 듯 쩍 하고 갈라졌다. 그런 싸움 중에도 이드는 던전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 내고 있었다.

주변 환경은 무엇이 언제 어떻게 전투의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만큼, 그 변동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때문에 파악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는데, 마침 마나의 기괴한 흐름과 움직임이 잡힌 것이다.

“이봐, 이봐. 똥개, 집주인이 불청객 때문에 화난 것 같지 않아?”

“우리 얘길 하는 건가.”

“그럴 리가. 난 정식 초대받았다고. 심지어 집주인도 만났는데, 나가란 말이 없었단 말이지.”

물론 스트레스에 눈이 돌아간 지금의 탑주에게 이런 얘길 했다간 헬파이어를 처박으려 할 테지만 말이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 중에도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당장 이드의 손만 해도 삼십이로의 허초를 만들어 화염을 헤치고 메르시오의 목을 노리는 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발이 쉬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손 이상으로 바빴다. 이드의 발은 공격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동 중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이드가 움직일 때 부딪치기만 하면 가루가 되었고, 메르시오에 닿은 것은 용암이 되어 녹아내렸다.

이미 엉망이 된 싸움터는 단 일 미터도 편히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좀 많이 딱딱한 물속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크아압!”

밀고 밀리는 전투가 답답했는지, 메르시오가 이드에게 따라붙는 듯하더니 갑자기 바닥을 내려찍었다.

원래대로라면 생겼어야 할 구멍은 생기지 않았다. 대신 바닥이 유리처럼 갈라지며 그 사이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지뢰가 터지는 듯한 모양새.

광혼을 태운 강력한 화염에 이드는 발을 천장에 붙였다. 그리곤 태주묵혼의 내력을 뿜어 비단보처럼 펼쳐 회전시켰다. 그러자 일대에 넓게 발생한 인력이 불길을 빨아들였다.

직후 그에 감싸진 청백 화염은 빛을 잃고 검은 구슬처럼 변했다.

팅!!

이어 이드가 그것을 메르시오에게 튕겨 냈다.

메르시오의 발톱에 부딪힌 구슬이 깨지자, 거기서 뿜어진 검은 화염이 메르시오의 어깨를 크게 베어 냈다.

성질이 바뀌긴 했어도 같은 화염이라 스며들기 쉬워서였는지, 상대적으로 쉽게 베였다.

어깨에서 피가 흘렀지만, 메르시오는 신경 쓰지 못했다. 구슬과 함께 이어진 이드의 공격 때문이었다.

아무리 상처가 빠르게 아문다고 해도, 뼈가 보일 정도로 베인 것은 사실이기에 이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퍼퍼퍽!

집중적으로 어깨를 노린 철황십사격이 길을 열고, 그 사이로 철황포가 터졌다.

그러자 이어 붙으려던 어깨가 덜컥하고 떨어졌다. 그나마 근육 몇 조각에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떨어지기 직전. 게다가 메르시오의 예상보다 회복도 느렸다.

가만히 보면 피로 물든 어깨에 태주묵혼의 검은 흔적이 보인다.

“마나 오염. 이런 능력도 있었나?”

“내가 좀 다재다능한 편이지. 이전엔 쓸 필요가 없었을 뿐이고, 침투경의 맛이 좀 맵지?”

“그래. 좀 많이 맵군.”

그런데 얼굴은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다.

메르시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경이 침투한 어깨를 통째로 잘라 내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회복력을 생각한다면 팔 하나 재생하는 것쯤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팔과 어깨에 검게 물든 부분을 잘라 이어 붙이면 더 재생이 빠를 테고.

물론 당장 한 손으로 이드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만, 두 다리가 멀쩡하니 잠시 회피하는 정도는 가능하리란 생각일 터. 당연 이드는 그 꼴을 그냥 둘 생각이 없다.

쩌저저정!

가뿐하게 메르시오가 올린 팔을 쳐 낸 이드에게서 철황권의 폭풍이 쏟아지며, 종이 쪼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 손 방어로 이드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는 일. 그 대부분이 메르시오의 방어를 뚫고 들어가 박혔다. 가볍게 스치는 손짓 하나에조차 작은 돌산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위력이 깃들어 있었다.

메르시오의 화염이 워낙 강해 견디고 있지, 만약 다른 존재였다면 한 방에 물 풍선처럼 터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단단한 메르시오라도 쌓이는 타격에는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잠시 흔들려도 약해지지 않던 청백 화염의 기세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메르시오 내부를 두드리는 힘의 전달이 수월해진다. 즉, 그가 받는 충격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아우우~”

돌아가는 상황이 아무래도 불리하다고 생각한 듯, 거칠게 어깨를 밀어붙이는 메르시오.

동시에 약해졌던 화염이 그의 발에서부터 강렬히 타오르며, 전신이 불덩이로 변해 흩어지려 했다.

일종의 정령화, 즉, 일시적 후퇴를 선택한 것이다.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전투광이.

역시 매에는 장사 없다는 말은 진리다.

화르르르르~

“어딜!”

하지만 불행히도 그 정도는 이드의 예상 안이었다. 그레센에 와 얼마나 기기괴괴한 놈들을 상대했던가. 게다가 형태는 달라도 비슷한 형태를 보이는 환술 역시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드다.

푸욱!

내력 발출로 흩어지는 화염의 맥을 잡아낸 이드는 그 중심이 되는 공간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와 동시에 태주묵혼의 내력을 투사하며 공간을 잡아 비틀어 당겼다.

순간 흩어지던 화염이 실에 연결된 듯 순식간에 하나로 뭉치더니, 급격히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그 형체가 온전히 완성되는 속도보다 이드의 주먹이 더 빨랐다.

태주묵혼의 내력이 담겨 있기에 두꺼운 철판이 우는 것 같은 소리는 없었지만, 다름 아닌 철황권의 철관심인이었다.

다음 순간, 복부를 관통당한 메르시오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푸화화화확!

내부에서 요동치는 태주묵혼에 메르시오가 뒤로 튕겨 났다. 그를 휘감은 청백의 화염 또한 비에 씻긴 먼지처럼 떨어지며 주변을 녹였다. 콰릉!

뒤이은 충격파에 커다란 공동이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충격파에 만들어진 동공 중 가장 큰 것으로, 이것만 잘 연결해도 훌륭한 개미집이 탄생할 것 같았다.

물론 어차피 금방 부서지긴 하겠지만 말이다.

“후우~ 역시 실전만큼 좋은 수련이 없어.”

벽 깊이 처박힌 메르시오.

하지만 이드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보다 정확히 흑백으로 물들어 있는 팔이 이드를 더 기쁘게 했기에.

언제부터인지 그의 온몸이 그런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몸살처럼 찌뿌둥하던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현재 광인멸혼류와 태주묵혼의 비율은 5:5.

열혈 사춘기 때의 라이벌처럼 다투기만 하던 두 기운이, 메르시오라는 강적을 상대로 의기투합에 성공해 온전히 균형을 이루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좀 전까진 시작도 아니었다면, 이제 온전히 출발선에 섰다고 할까?

겨우 균형을 이루었을 뿐, 필요에 따라 비율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어야 완벽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복부에 구멍이 뚫린 메르시오에게 치명타를 가하기엔 지금도 충분하다.

투퉁!

허공을 친 이드의 주먹에서 뻗어 나간 격공의 경력에 무너진 돌이 쪼개졌다. 그와 동시에 메르시오가 나타났다.

그 가슴에는 축구공 크기보다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어깨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태주묵혼에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때문인가, 어깨와 마찬가지로 가슴의 구멍은 전혀 회복되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데 앞서 부숴 놓은 어깨가 이상하다. 어느새 어깨의 일부와 팔의 상박은 잘려 나가고, 70% 정도 남은 팔이 거의 목 부근에 붙어 있다. 

“바위 이불 덮고 그 안에서 꼼지락거리더니, 약은 수를 쓰네.”

“크르르륵. 늑대는 원래 머리가 좋은 생물이지.”

피를 토하는 중에도 약 올리듯 말하는 메르시오. 그 몸 위로 이드의 철황권이 떨어졌다.

철황유성탄과 철황포.

미사일과 포탄 같은 두 공격에 가슴의 구멍이 더 넓어진 메르시오가 이리저리 튕기며 다시 벽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이드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치명상을 입어 움직임이 둔한 메르시오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내려는 움직임. 이드가 메르시오 앞에 거의 다가갔을 때다.

퍼퍼퍽!

갑자기 사방 벽을 뚫고 잡동사니들이 뭉쳐 만들어진 촉수들이 빼곡하게 쏟아져 나오더니, 둘 사이를 갈랐다.

“탑주?”

그 움직임에서 탑주의 의도가 느껴졌다. 자신의 뜻을 벗어난 행동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그걸 확인시키듯, 앞을 막아서던 촉수가 휘어지며 이드를 감싸 가뒀다. 동시에 그 끝은 이드를 향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광인멸혼류의 광혼에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제압과 공격을 동시에 하겠다는 속셈. 거기에 촉수가 휘감은 땅까지 빠르게 어딘가로 움직인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있다 싶었는데, 드디어 시동이 걸린 모양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야! 거기다 쿨 거래해 놓고 난 왜 잡고 늘어지는 건데!”

불끈 치솟은 짜증과 함께 이드는 촉수의 벽을 부쉈다. 벽 너머 느껴지던 메르시오의 기감이 급격히 작아졌기 때문이다.

출렁이며 버텨 보려던 벽은 바로 무너졌다.

메르시오도 견디지 못한 태주묵혼의 힘을, 한낱 촉수 따위가 받아넘기려 한 것 자체가 실책이었다.

무너진 벽을 넘은 이드는 혀를 찼다.

당장 메르시오를 쫓으려 했지만, 실시간으로 장소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엇갈리는 이 속도, 이건 메르시오뿐 아니라 자신의 위치도 계속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이래선 당장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이드가 혀를 찬 다음 순간.

쿠우우우우~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일더니, 몸이 살짝 떴다. 중력이 약해진 것이다.

주변에 가득하던 잡동사니가 배수구에 물이 빨려 들 듯 사방으로 흡수되어 갔다.

그리고 이게 뭔가 싶은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서 쏟아지기 시작하는 빛. 인공적으로는 절대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결국 지상까지 올라온 건가? 메르시오는 이번에 잡아야 하는데.”

괜한 탑주의 방해에 메르시오를 놓칠까 걱정이 되는 이드였지만, 탑주가 들었다면 분명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로서는 두 사람 다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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