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0화
986화
던전이 올라갈 때 이미 지진을 경험했던 지상이다. 던전의 좌초와 베리타스의 발동 역시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거기, 환자들 이송이 최우선이라고! 사소한 짐은 버리란 말이다!”
지진이 발생할 때부터 서둘러 대피 중이던 토벌대였다. 그들은 던전 입구가 푹 가라앉고, 그 부분을 중심으로 땅이 쩍쩍 갈라지는 모습에 혼비백산해 사방을 뛰어다녔다.
특히 점점 넓어지는 균열을 보는 헤머든 백작은 똥줄이 탔다.
보통 때라면 고위 귀족으로서,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황녀가 지켜보고 있는 통에 진지에 남아 직접 상황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렇게 해머든 백작이 나선 덕분에 토벌대 인원들의 후퇴는 빨랐다. 대부분의 짐을 과감하게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비싼 물품도 적지 않았지만, 해머든 백작의 결단력 덕에 빠른 결정이 가능했다.
그 덕분이다.
쿠르르르릉!
갑자기 균열이 빠른 속도로 퍼지며 진지가 있는 곳까지 덮치고, 그 갈라진 틈으로 막사와 임시 창고, 그리고 짐들이 마구 굴러떨어지는 중에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말이다.
“끄, 끔찍하군.”
“조금만 늦었어도 그냥 생매장당했겠어.”
“황녀 전하와 해머든 백작님 두 분이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지. 그나저나 이 흑마법사 놈들,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잖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토벌대. 그들을 잠시 살피던 황녀가 해머든 백작을 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해머든 백작님의 혜안이 아니었다면 희생이 컸을 것입니다.”
“황공합니다. 황녀 전하. 전리품과 귀중품을 잃어 송구스럽습니다.’
안색이 밝지 않은 해머든 백작의 말에, 그의 어깨에 두꺼운 손을 올린 록마틴 후작이 무슨 걱정이냐는 듯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진짜 보물인 제국의 용사들이 무사한데. 게다가 아주 중요한 물건은 이미 마법사들이 따로 챙겨 두었었네. 실제 손해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다는 말이야. 그러니 기대하게. 이런 사태에도 모두가 무사한 것은 온전히 자네의 공이니. 그럭저럭 얌전해 보이던 놈들이 설마 이렇게 강력한 한 방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그나저나 아직 던전에서 나오지 못하신 분들은 괜찮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해머든 백작은 록마틴 후작의 치하에 금방 표정을 풀고는, 비 오는 날 하늘처럼 뿌연 먼지로 가득한 전방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두 탈출하는 동안에도 토벌대를 살린 두 후작 부인과 은색 기사 단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명예 후작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저렇게 땅이 무너지고 있으니, 과연 살아 있을까 싶었던 것.
하지만 그런 우려의 말이 퍼지기도 전에 그들의 머리 위에 나타난 라미아가 답했다.
“당연히 저희는 무사하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리고 땅에 내려서는 라미아. 그 옆으로는 그녀와 함께 가장 늦게 빠져나온 세 사람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황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한데, 명예 후작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혹시 아직도……?”
록마틴 후작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재해 지역을 바라보았다. 거대 협곡의 형태로 변하고 있는 그곳을.
그런 그를 본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 좋게 저희가 찾고 있던 자를 찾았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조금 더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자가 굉장히 거친지라, 전투가 격해지면 여기까지 위험할 수 있어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해머든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그들은 진지를 삼킨 균열의 끝에서 일 킬로미터가량이나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자연적인 대지진도 아니고, 일시적인 붕괴를 피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니요. 충분하지 않아요.”
라미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길게 설명할 시간도 없었다.
“일단 뒤로 후퇴부터 해요.”
그녀는 텅 빈 진지에서 이드를 기다리다, 베리타스의 발동과 함께 던전이 매우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는 이드의 경고를 듣고 달려온 거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라미아의 조바심도 좀 늦었다.
투투투퉁!
신이 이 땅을 드럼 삼아 스틱을 두드리는 듯, 갑자기 땅이 들썩였다. 그리곤 아래로 무너지던 땅이 드러나며 던전이 나타났다.
앞세워진 수백의 촉수는 마치 아름드리나무처럼 커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땅 밑으로 떨어지던 낙하물들이 던전에 부딪혔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당연히 그중 일부는 토벌대 위로도 떨어져 내렸다. 라미아가 즉시 양손을 펼치며 마법을 사용했다.
“와이드 리버스 그래비티!”
“와이드 리버스 그래비티!”
순간 겹치는 마법과 시동어.
어느새 라미아의 옆에는 지팡이를 들어 올린 토리빈 마법사가 있었다.
“내 비록 후작부인처럼 굉장한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순 없어도, 경험과 연륜은 넘친다오.”
그에 라미아의 눈이 반달이 되는 순간. 두 사람의 마법에 잡힌 바위와 흙더미가 물 위 기름처럼 둥둥 떠 부유했다.
직후 한발 늦게 움직인 토벌대에 의해 허공에 뜬 부유물과 먼지가 치워졌다. 그러자 깨끗해진 시야에 지상으로 올라온 던전이 나타났다.
“저게…… 던전이라고?”
그건 토벌대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쿵. 쿠쿵.
여전히 바위와 흙더미가 비처럼 쏟아지는 곳.
그 중심에 나타난 것은, 도저히 토벌대 땀 흘려 공략하던 던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우선 주변에 끓어 넘치는 붉은 용암은 둘째 치더라도, 던전이면 최소한 건축물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데 지금 나타난 던전에는 건축물의 모습이 그야말로 전혀 없었다.
다만 하늘로 솟은 촉수가 한데 모여 있는 것이, 꼭 가시를 한쪽으로 모은 성게 같았다.
그렇게 토벌대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순간, 베리타스가 움직였다. 하늘로 우뚝 솟아 있던 촉수가 하나씩 흐늘거리며 늘어지기 시작한 것.
꽃이 피는 모습에 비유할 수도 있지만, 꿈틀거리는 촉수가 주는 혐오감은 무의식중에 그런 이미지로의 연결을 철저히 틀어막았다.
자칫하면 남은 생 동안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지 못할 만한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비스듬히 서서 멈추는 촉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입술을 쓰다듬었다.
“설마, 이게 끝은 아닐 테고?”
거창하게 판을 벌여 내놓은 결과가 겨우 고속 엘리베이터라면 탑주라는 인간에게 매우 실망할 것 같다.
하지만 이드가 본 탑주는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잠시 주변을 살피던 이드는 뭔가 알아차린 듯 손가락을 튕겼고,
퍽!
촉수에는 깊은 구멍이 났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촉수에서 끈적이는 용해액이 흘러나왔고, 붉은 용암이 그 촉수를 타고 오르며 벽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용암의 벽 안팎으로 마나의 그물이 이어지며, 훌륭한 결계가 완성되었다.
어떻게 보면 서커스에 있는 맹수의 우리로도 보였는데, 안에 있는 이드와 메르시오의 위험도를 따져 보면 맹수 중에서도 아주 위험하고 사나운 종류라고 할 수 있었다.
“초전이 공간 결계라면 분명 쓸 만하지만…….”
결계의 정체를 파악한 이드가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계라면 천하의 메르시오도 간단히 찢고 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막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메르시오의 재생력을 생각할 때 지금쯤이면 온전히 부상을 회복했을 것이다.
물론 태주묵혼의 기운이 회복을 막기는 했으리라. 하나 어깨를 잘라 낸 그 과감한 손길을 볼 때, 가슴이라고 그 상처가 오래가지는 않을 터였다.
“아우우우~!”
화르르르륵!
아니나 다를까. 때마침 신랑의 형태를 한 메르시오가 촉수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밀고는 화염을 뿜으며 결계를 태우려 했다.
그러나 이드의 예상처럼 결계는 단번에 녹아내리지 않았다. 대신 멈춰 있던 촉수가 움직이며 메르시오를 휘감았고, 용해액과 화염이 반응하며 노란 연기와 함께 역한 냄새를 뿜어냈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인 법이지.”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드는 훌쩍 몸을 날렸다.
변형된 던전이 메르시오에게 달라붙고는 있지만, 저 정도로는 잠시 발목을 잡을 뿐, 그 이상은 힘들기 때문이다. 차라리 저렇게 빈틈을 보일 때 직접 노리는 쪽이 낫다.
그런 기색을 느꼈음인가.
몸부림치며 촉수를 떨쳐 내던 메르시오가 이드를 향해 스칼렛 버스트의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하지만.
“노려보면 어쩔 건데?”
관통당하는 듯하던 이드의 모습이 순간 수십 명으로 늘어났다.
빠르게 움직여 내보이는 잔상이 아니었다. 빛을 만드는 광인멸혼류의 공능과 광혼으로 만들어 낸 분신이었기에, 메르시오로서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덕분에 허공을 가른 스칼렛 버스트는 결계만 두드리게 되었다.
그사이, 밝은 빛에 비례해 더욱 깊어지는 태주묵혼의 검은빛을 휘감은 이드가 주먹을 들 때였다.
“두 분은 소란을 잠시 멈춰 주셔야겠소.”
담담하려 애쓰는 탑주의 목소리와 함께, 촉수로부터 피 칠을 한 원령이 튀어나와 이드와 메르시오에게 달라붙으려 했다.
당연히 고작 원령 따위에 잡힐 이드와 메르시오가 아니지만, 두 사람 주변에 쌓이기를 반복하는 원령의 영압에는 잠시 주춤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두 사람이 싸움을 멈춘 사이 탑주가 굵은 촉수 위에 나타났다. 그가 든 지팡이 위에 떠 있는 피투성이 수정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크릉. 감히 내 전투에 끼어들다니. 죽고 싶은 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탑주를 향해 몸을 돌리는 메르시오.
그러자 그를 휘감고 있는 촉수 몇 가닥이 힘없이 투두둑 끊어져 떨어졌다. 끊어진 자리에는 금방 새 촉수가 올라와 흐느적거렸다.
메르시오의 사나운 말에 탑주가 한 호흡 쉰 후 입을 열었다.
“후~ 이름 모를 강자여, 그대의 강함은 인정하지만, 오만하구려.”
“강자의 권리지.”
“내게 그대는 불법 침입자이자 도둑일 뿐이오만. 뭐, 좋소. 당신에게 강자의 품위를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잠시 말을 끊은 탑주가 이드와 메르시오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
“탈취한 바이트 타블렛을 내놓으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두 분은 이 자리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오.”
가슴의 화를 누른, 떨리는 목소리.
바이트 타블렛의 도난과 정신의 관의 붕괴 때문일까.
이드는 거래를 위해 만났을 때와 탑주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다. 지금은 마치 조금만 자극해도 터질 폭탄 같다고 할까?
하지만 메르시오는 아무래도 좋은 것 같다.
그는 신랑의 모습에서 웨어울프 형태로 변하며 탑주를 비웃었다.
“제 물건도 간수하지 못하는 자가 탑주라니. 내놓지 않으면 뭘 어쩌겠다는 거지? 고작 인간 마법사 따위가.”
부르르!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다.
지팡이 위에 떠 있던 수정구가 떨리더니, 주변 가득한 촉수에 음울한 마나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강렬한 저주의 마나였다.
“약속드리지. 가장 꼴사납고, 치욕스럽게 죽여 드리겠다고. 그러니 순순히 바이트 타블렛을 내놔!”
계속 삐딱선을 타는 메르시오에 반쯤 뚜껑이 열린 듯 뿌득뽀득 이를 가는 탑주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혹시나 명예 후작이 가지고 계시오?”
그 박력에 이드가 움찔하며 태연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일이오. 게다가 만약 내가 가지고 있다면, 탑주와 거래를 하면 끝날 일이지 않소.”
이미 바이트 타블렛을 두고 거래를 한 전적이 있는 이드의 말이니, 설득력이 높다.
그렇지 않아도 메르시오를 강하게 의심하던 탑주였다. 그리고 그 말에 아예 확신을 가지고 메르시오를 노려본다.
아무리 눈이 돌아갔다고 해도, 평소의 그답지 않은 성급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