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6화
992화
이드는 머리를 폭탄으로 쓴 상대의 엽기적인 탈출 과정에 대해 말했다.
쓰담쓰담.
“아깝다. 그래도 고생했어요.”
“……잔소리 안 해?”
라미아가 의외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하자, 되레 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어쩐 일로 아무 소리도 안 하냐는 표정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잔소리를 왜 해요? 뭐야, 그 눈은! 섭섭하면 지금이라도 해 줘요?”
“아니. 뭐, 내 눈 가지고 맘대로 보지도 못하냐?”
샐쭉해진 눈길에 목을 움츠렸지만, 라미아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이드다.
그리고 그 모습에 조금 기가 막히는 라미아다. 최근 쓴소리가 좀 늘긴 했지만 이유 없이 잔소리를 한 적은 없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따지고 보면 그것도 빨리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 욕구 불만에서 온 투정일 뿐인데. 그걸 몰라 주나.
‘속상한 이 맘을 어떻게 갚아 주지?’
물론 당장은 아니다. 지금 집중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으니까.
아까 이드의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이상하게 여겼던 부분이다.
“계속 생각했는데, 메르시오가 탈출한 모습이 굉장히 이상해요. 뭔가 부자연스럽다고 할까?”
가장 기묘한 건, 메르시오의 몸을 뚫고 나온 팔이다. 웨어울프의 몸에 웬 인간의 팔?
이드는 라미아가 자신도 수상히 여기던 부분을 정확히 집어내자 그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쩜 메르시오가 도주하게 된 건, 메르시오 본인의 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상한 게, 외부에서 제삼자가 개입했으면 이드가 몰랐을 리가 없다는 거죠.”
누구보다 이드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라미아다.
이드가 마법에 대해 빈틈이 있긴 하지만, 마법을 일으키는 마나의 변화에까지 둔감한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그쪽으로는 마법사보다 더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이드 모르게 외부에서 메르시오를 조종한다는 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그럼, 밖이 아니라 내부면 어때?”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드가 말했다.
“내부면・・・・・・ 메르시오 안에 다른 존재가 있다고요?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혼돈의 파편을 안에서 조종하는 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것도 없지. 혼돈의 파편이 대단하긴 하지만, 같은 혼돈의 파편이 개입하는 거라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
이드는 그 말과 함께 메르시오의 몸에서 잡음처럼 느꼈던 이질적인 기감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워낙 짧고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기에 착각이라 여겼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라미아의 말을 듣고 보니 잘못 인지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라미아는 이런 이드의 말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고, 한쪽 볼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가능성 있는 이야기예요. 의심이 가는 인물도 있고.”
이드는 마침 자신도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 있었기에 바로 이름을 말했다.
“존 워스지?”
“맞아요. 중간에 메르시오가 채 가면서 갑자기 없어진 그가, 메르시오 안에서 쉬고 있다가 위기 상황에 개입했다고 하면 앞뒤가 맞죠.”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에 가정을 더한 가설일 뿐이다.
존 워스에 대한 의심이야 태산만큼 쌓였지만, 그렇다 한들 현재 내놓은 전제 중에서 증명된 건 없었으니까.
“그런데,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이라면 정말 충격일 것 같아요.”
“그렇지. 몇 번이나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아니, 그거 말고, 오늘 혼돈의 파편을 둘이나 놓친 거요. 메르시오만 놓쳤다고 생각할 때하고 느낌이 많이 다른 거 있죠.”
“아, 그래…….”
역시 백인백색. 아무리 라미아라고 한들 생각이 항상 같을 수는 없나 보다. 이드는 묘하게 어긋나는 감상에 쩝 하고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라미아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놓쳐 버린 혼돈의 파편들을 당장 뭘 어떻게 하겠는가.
“혹시 모르죠. 진짜 존 워스가 메르시오와 함께 빠져나간 거라면, 다시 소드 팰러스도 돌아올지도.”
“그럴 리가.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절대 안 돌아오지.”
존 워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나. 이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렇게 쉽게 단정할 순 없다고 봐요. 검왕이란 타이틀이 그렇게 가벼운 것도 아니고, 혼돈의 파편씩이나 되어서 검왕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걸 보면, 뭔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건데. 중간에 그만두긴 쉽지 않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게다가 존 워스가 나타나면, 나는 가만히 있겠어?”
“그렇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검왕이란 이름이 있으니까 이드도 마음대로 날뛰긴 조금 그렇잖아요.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증거가 왜 필요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면 그만이지.”
눈앞에서 메르시오와 혼돈의 파편으로 의심되는 존 워스를 놓쳤기 때문인가. 위험한 발언을 서슴없이 꺼내는 이드였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저들이 검후를 납치했듯, 이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그런 방법을 쓸 수 있다.
무엇보다 진짜 일을 벌일 경우 은색, 적색, 흑색 기사단은 물론이고, 황녀에, 어쩌면 록마틴 후작까지 이드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어디까지나 존 워스가 나타나면, 의 이야기지만.”
“그럼, 존 워스의 복귀를 두고 내기 어때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콜!”
가볍게 꺼낸 라미아의 제안을 바로 물어 버리는 이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존 워스의 복귀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고, 최근 라미아에게 부탁할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같은 시각, 멀리 떨어진 숲에서 존 워스가 메르시오를 앞에 두고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내기지만.
어쩌겠나. 아무리 강해도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일을 모두 알 순 없는 것을.
이드와 라미아는 갑자기 성사된 내기에 대한 증거로 마법 영상까지 남긴 후, 토벌대로 복귀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옆으로는 깊은 협곡과 이어진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탑주의 공간 분쇄에 의한 흔적이었다.
현재는 용암이 끓고 있었지만, 나중엔 제법 아름다운 호수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생각에 문득 이드가 물었다.
“그나저나 사상자는 어때?”
“말했잖아요. 모두 안전하게 탈출시켰다고.”
“아니, 우리 조 말고, 다른 조원들 말이야. 특히 사 조는 가장 늦었잖아.”
“전혀요. 오히려 사조 피해가 제일 적더라고요.”
의외의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드는 곧 그럴 수 있겠다며 납득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서 엮여 있던 다른 조와 다르게 사조는 복잡한 사건에 엮이지 않았다. 그런 만큼 순수하게 던전의 공략에 집중할 수 있었을 거다.
“그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예요.”
“무슨 각오?”
“토벌대 사람들이요. 제가 여기로 오기 직전까지 전부 입 떡 벌리고 놀라고 있었거든요. 저러다 턱뼈 부서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무래도 이드가 실력 발휘하는 모습은 처음 봤을 테니까요.”
라미아는 못된 장난을 준비한 악동처럼 히죽거렸다. 이드를 앞에 두고 쩔쩔맬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이드의 실력은 검왕급이다. 마르텔과의 대련에 기준을 두고 나온 말이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된 것도 아니고, 단발의 대련임을 들어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중에 지하 깊은 곳에서 솟아난 이드와 메르시오의 전투가 그들 앞에 짠 하고 나타난 거다.
어마어마한 마나를 뿜는 공간 분쇄의 결계. 꿈틀거리는 거대 촉수, 끓어 넘치는 용암, 신화 속에 나올 것 같은 거대 늑대. 부딪힐 때마다 마나로 인해 생기는 살 떨리는 충격파.
어느 하나도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 이름 높은 검왕이라도 힘을 쓰지 못할 것 같은 그 싸움터에 이드가 있었다.
그것도 힘없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모습으로.
검후를 찾고, 혼돈의 파편을 경계하고자 여태껏 조심해 온 이드의 힘 일부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드는 한숨이 나왔다. 과연 토벌대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까.
“사람이…… 아니다.”
마법사들과의 모든 전투가 끝이 나고 메르시오까지 도주했지만, 토벌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 가장 앞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한 젊은 귀족의 입에서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
제국의 명예 후작을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걸 두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은 놀라움을 갈무리하기도 바빴고, 일부는 그 말에 공감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의 대부분은 기사였다.
그들 입장에선 검왕도 하늘처럼 높기만 했을 것이다. 한데 자신들로서는 가늠조차 힘든, 높은 수준의 전투를 보았으니 그런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뭐라 할라치면 여지없이 용맹한 여기사들의 눈빛이 쏘아져 왔기 때문이다. 몇 번의 전투를 이드와 함께 하며 도움을 받은 은색 기사단은 친근한 이드의 모습을 알기에 인간이 아니라는 식의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한편, 록마틴 후작은 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저 멀리서 나란히 걷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명예 후작이 저런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실력자였다니. 제국의 실수다.”
제국은 이드에게 명예 후작의 작위를 주었다. 오래전 마인드 마스터가 세운 공을 그 후손에게 치하한다는 명목에서였다.
이때 황제는 이드의 활동을 배려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속을 들여다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이유 말고도 무언가 더 있겠지만,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좋은 의도였기에 록마틴 후작도 조용히 지지를 보냈었다. 그때만 해도 이드의 가치는 마인드 마스터에게 물려받았을 무공에 있었다.
비록 마르텔을 이긴 검왕급의 강자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무공에 대한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세 명의 검왕을 보유한 제국이었으니까.
한데, 그 판단이 틀렸다.
메르시오와의 전투에서 보여 준 이드의 모습은 분명히 말해 삼검왕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어쩌면 검후님보다도……………..’
오죽하면 록마틴 후작이 가장 존경하는 검후보다 강해 보였을까.
이만한 강자라면 무공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실력만 판단해서라도 꼭 잡아야 하는 중요 인물이다.
다시 말해 명예 후작 같은 어중간한 작위가 아니라, 진짜 후작이나 공작의 작위를 내려 완벽한 아나크렌 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국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제법 깊은 록마틴 후작은 이 문제를 절대 섣불리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도 봐라. 토벌에 참가한 타국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저들도 이드의 힘을 본 것이다.
그걸 직접 목격했다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까지 제국의 눈치를 봐서 친분만 쌓으려 했다면, 이제는 진심으로 자국에 이드를 끌어들일 생각을 해도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더욱 이대로 지나갈 수는 없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록마틴 후작은 가장 먼저 토리빈 마법사를 불렀다. 나설 때 나서더라도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고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이드와 라미아가 토벌대에 합류했다. 다만 라미아가 예상하던 열렬한 반응은 없었다.
“아니, 왜?”
너무 거대한 존재감에 되레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라미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