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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59화


995화

같은 시각.

다른 막사 역시 시끄럽긴 마찬가지였다. 토벌에 참가했던 각국의 귀족들로 인해서였다. 오늘 있었던 일들은 제국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수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초인 마법에서부터 던전의 붕괴, 그리고 메르시오에 이르기까지.

다만 토리빈 마법사가 우려하던 도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실 그런 계획이 있어도,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으리라. 여기서 누구 하나 돌아서서 아나크렌에 알리게 되면 큰 문제가 될 테니까. 뿐만 아니라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당히 말하기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귀족으로서, 도굴이라니.

이야깃거리는 많았지만, 그중 핵심은 두 가지였다. 바로 탑주와 메르시오다.

이들과 함께 이드의 이름도 오르내리긴 했다. 하나 명예 후작으로서 제국에 속해 있다 여겼기 때문인지, 탑주와 메르시오에 밀리고 말았다. 지금 주된 논의 주제는 탑주였다.

탑주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제국과는 달랐다. 그를 토벌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한 세력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포섭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은연중 내비친 것이다.

마스를 중심으로 한 중소 왕국들이 특히 그러했다.

“분명 초인 마법과 미완의 마탑은 이 대륙을 뒤흔들, 새로운 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위대한 발견을 몇 건의 납치와 인체 실험을 이유로 무시하고 파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이 힘은 무공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아나크렌과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무게추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숫자가 많은 만큼 어지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왕국들이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의견을 통일한 듯 한마음 한뜻으로 마스의 의견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뿐 아니라 마스에 질 수 없다는 듯 마스 이상의 과감한 발언을 내놓으며 미완의 마탑과 탑주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제국, 그것도 아나크렌의 의지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마스의 주장처럼 아나크렌과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계기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웃긴 것은, 라일론과 카논의 두 제국은 이런 주장에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그 반대로 제국이 말하면 왕국이 고개를 끄덕이는 흐름인데 말이다.

사실 좋은 의미의 침묵은 아니었다. 이번 일의 책임을 왕국들에 전가하는 것이니까.

아무리 초인 마법의 힘이 탐이 나도 초인을 납치해서 인체 실험이라는 금기를 범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초인 마법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언제까지 아나크렌의 독주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리곤 던전 속에서 짧은 시간이나마 은밀했던 마탑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따로따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모두 마탑이 자국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마스에서 온 귀족이 흐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성공이군. 이 정도면 아나크렌에 대한 충분한 방패막이는 되겠어.’


“…….”

쉴라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그래 봤자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드는 그 모습에 수풀에 머리만 숨기고 있던 오리가 떠올라 웃음이 날 것 같은 걸 참으며 말했다. 

“푸흠, 쉴라 경 목소리가 참 크네요.”

“죄송합니다~”

정수리에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항상 당당하던 그녀에게 이런 귀여운 모습이 있었던가. 언제 이동했는지 스폴이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껄껄 웃었다.

“유후~ 오랜만에 듣는 와이번의 비명이네요.”

“와이번의 비명이 뭐죠?”

낯선 단어에 이드가 물었지만, 스폴은 답하지 못했다. 귀신처럼 움직인 쉴라의 손에 목덜미가 잡혔기 때문이다.

얼마나 강하게 잡았으면 스폴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져 있었다. 스폴이 억지로 입을 열려고 했다가는 목이 부러질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다. ‘와이번의 비명’이라는 단어에 그 정도로 부끄러운 비밀이 있나 싶을 때였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 덕분일까. 보통은 이런 장난에 끼어들지 않는 라발이 스폴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쉴라 단장이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이 흥분했을 때 가끔 튀어나오는 것인데…………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굉장히 목소리가 크고, 본능적이죠. 그러면서 또 듣고 싶어지게 만드는 기묘한 비명이라고 듣기만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라, 라발 단장님! 아아~”

차마 라발의 멱살까지는 잡지 못한 쉴라가 붉다 못해 익어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감싸 버렸다. 그 뒤에서 스폴이 졸린 목을 만지며 캑캑거리고 웃는다.

과연 이후 쉴라의 분노를 어떻게 감당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드는 그 모습에 문득, 어쩌면 저런 스폴이 꼴도 보기 싫어서 자신에게 떠넘긴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 스폴은 이번 일이 끝나면 돌려보낼까.’

아무래도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도 쉴라와 같은 고생을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는 이드였다.

그렇게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라발이 말을 꺼냈다.

“그러면 구출 작전은 언제 시작하실 것입니까?”

“굳이 언제랄 것도 없습니다. 토벌대가 수도로 갈 때, 우린 마스로 갈 겁니다.”

“황제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승전식에 빠지시는 겁니까?”

라발이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말했다.

승전식은 단순히 승리를 축하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논공행상은 물론이고, 권력의 흐름에도 관계되는 복잡한 정치적 쇼다. 특히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승전식이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데 그런 자리에 이번 토벌의 중심이자, 핵심인 이드가 빠진단다.

앙꼬 없는 찐빵도 정도가 있지. 과연 황제가 좋아할까?

“물론 언짢아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그렇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제국 정치에 참여할 것도 아니고.”

명예 후작? 그런 거 없어도 그만이라며 배짱을 부리는 이드의 태도에 할 말을 잃는 라발이다. 제국의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이드의 말도 틀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승전식에 빠진 이유가 검후 때문이라면, 차후에라도 문제가 될 일은 없다. 되레 상을 내린다면 모를까.

“혹시 이렇게 빨리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우선 손을 잡고 있던 소드 팰러스와 마탑, 그리고 초인파의 연합이 이번 일로 깨어졌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인파만 따돌림당했죠.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에서 마탑을 밟으려다가 오히려 소드 팰러스가 마탑과 손을 잡고 초인파의 통수를 친 상황인데. 초인파 입장에선 열 받는 일이겠죠? 게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겁니다. 두 세력이 손을 잡고 돌아섰으니, 두 세력에 드러난 초인파의 비밀도 안전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리고 이 비밀 중에는 검후가 감금되어 있는 쉐어가든도 포함이 되겠죠?”

당연하다. 그 비밀을 넘긴 것이 탑주가 아니던가.

그리고 초인파에서 쉐어가든의 비밀이 새어나간 것을 모른다고 해도 문제다.

초인파에서 움직이지 않더라도, 과연 소드 팰러스와 마탑이 그냥 둘까? 특히 검후를 배신한 소드 팰러스 입장에선 검후를 완전히 없애 버리고 싶을 텐데?

“그러니 어느 쪽이든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검후를 구출해야죠. 마침 딱 좋은 기회도 만들어졌으니까요.”

“분열 말씀이군요.”

얼굴을 식히고 조용히 이드의 말을 듣던 쉴라가 끼어들었다.

“초인파 입장에선 곧 시작될 소드 팰러스와 마탑과의 전투를 대비하다 보면 아무래도 없던 구멍도 생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우린 그 구멍을 노려서, 누구보다 빨리 검후를 빼내는 것. 그것이 이번 구출 작전의 핵심인 겁니다.”

끄덕.

이드의 말에 쉴라와 라발이 마음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드 님의 말씀에 따라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단단한 라발의 음성이 당장이라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술판을 뒤집어 버릴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드의 입에서 라발의 기합이 무색해지는 소리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 준비는 은색 기사단만 하면 됩니다. 적색 기사단에겐 다른 일이 있어요.”

“며, 명예 후작님?”

소드 팰러스와 검후에 충성을 맹세한 오색 기사단이다. 그런 기사단에 검후의 구출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그런 중요한 임무에서 빼고 다른 업무를 하라니!

아무리 묵묵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라발이라도 이번만은 강하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그래 봤자 바뀌는 건 없지만.


귀족들은 고민에, 그 아래 전사들은 술에 빠진 밤이 지났다.

밤새 얼마나 마셨는지, 곳곳에 숙취에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마나와 내공, 초인력을 가지고도 저럴 정도면 마셔도 보통 마신 것은 아니리라.

“시, 신관님, 제발 우웁~ 사, 살려 주십시오~~ 우웨엑~~!”

그중 몇은 신관을 잡고 늘어지기도 했지만, 신관들은 혀를 찰 뿐 치료를 해 주진 않았다.

고작 숙취에 신성력이라니. 낭비도 그런 낭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신관들도 숙취 해소를 위해 신성력을 쌓은 것이 아니다. 당장 치료할 환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일은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밤새 회의를 마친 대로 빠르게 황제에게 명령을 받고, 토벌대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그중 일부는 명령에 따라 현장에 남겨졌다.

그들에겐 황제가 따로 상찬을 내리기로 했으며, 빠르게 그들을 대신할 기사단을 파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토벌대는 당일 정오에 수도를 향해 출발이 결정되었다.

그 소식에 이드는 곧장 록마틴 후작을 찾았다.

전날 말했던 대로 검후의 구출을 위해서다.

당연히 토벌대에서 이탈한다는 이드의 말에 록마틴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펄쩍 뛰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예 후작이 빠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절대! 절대 허락할 수 없소!”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허락을 구하고 있지만, 이건 형식일 뿐. 록마틴 후작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결정된 일을 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담담한 이드의 말에 록마틴 후작은 현기증이 찾아온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오? 명예 후작이 이렇게 빠지면 황제 폐하의 진노를 나 혼자 어찌 감당하라고. 정말 너무하시오.”

“거듭 록마틴 후작께는 죄송하단 말씀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 지금 제가 이탈하는 이유는 메르시오를 추적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 설마, 그 메르시오를 말이오?”

록마틴 후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건 일방적인 결정에 불만을 말하려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이름을 아신다니, 황녀 전하께 들으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그 메르시오입니다. 제겐 승전식보다는 아무래도 이쪽이 더 급한 만큼 황제 폐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허허.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 괴물 때문이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아무렴 황녀를 통해 메르시오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것이 괜한 일일까.

이런 반응이 이드가 원했던 것 중 하나다.

“명예 후작은 놈을 추적할 방법이 있는 모양이오?”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라미아를 통해 희미하게 남은 마나의 흔적을 추적할 것입니다. 겨우 찾은 놈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지요. 황녀 전하께는 말씀드렸지만, 후작께서 저 대신 황제 폐하께 고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니… 도저히 잡을 수 없구려. 알겠소. 그럼, 명예 후작만 움직이는 것이오?”

록마틴 후작은 전력이 더 필요하지 않는지는 묻지 않았다. 메르시오의 힘을 본 이상, 기사단 하나가 통째로 가더라도 이드에게 도움이 된다고 자신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에 이드가 쉴라와 어느새 준비를 마친 은색 기사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은색 기사단이 함께할 겁니다.”

“과연, 그런데 적색 기사단은?”

“적색 기사단은 복귀해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모두 빠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지금에 와서 예의를 찾는 건 한참 늦은 일이지만.

그런 이드를 라발이 깊은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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