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63화
999화
말없이 랜달을 바라보는 탑주.
원래라면 이렇게 조용할 일이 아니었다. 평 마법사나 싸울 줄 모르는 연구 마법사라면 몰라도, 무려 부관주가 위기 상황에 발을 뺐다.
이건 배신이나 다름없다. 꼭 등에 칼을 꽂아야만 배신이 아닌 거다.
마탑의 고위 마법사와 장로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처벌을 논의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엔 현재 상황이 좋지 못했다.
피해가 너무 컸다. 두 개 관이 붕괴되고, 그런 와중에 정신의 관의 부관주는 사망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 랜달을 처벌하게 되면 전력에 너무 큰 공백이 생긴다.
그에 탑주는 고민 끝에 랜달에 대한 처벌을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한 번 넘어간 일은 다시 꺼내지 않는 것이 관행인 만큼, 사실상 용서라고 봐야 했다.
랜달에겐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1번 시나리오대로 갔다는 그의 생각과 달리, 탑주의 선택은 3-2 시나리오의 변형으로,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였으니까.
그럼에도 탑주가 처벌을 유예시킨 이유는 간단했다.
‘초인 마법의 완성과 마탑이 제대로 자리 잡는 일이 최우선이다. 이놈에 대한 처분 따위 그 후라도 언제든 할 수 있다.’
거기에 이드는 물론이고 메르시오라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존재까지 마탑을 노리고 있다.
그나마 이드는 그 정체와 목적이라도 분명하지, 메르시오는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런 존재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랜달이라는 강력한 전력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명심해라. 이건 용서가 아니라 유예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본 후 유예했던 이번 건에 대한 결정을 내리겠다.”
“더 이상 실망을 안겨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부디 믿어 주십시오.’
“믿음을 강요하지 말고, 이번 일을 통해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라.”
결연한 랜달의 말에 탑주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랜달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이더비히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탑주를 바라보았다. 랜달의 문제가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보다 이어질 탑주의 말이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진정한 이유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명해 주십시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처리해 보이겠습니다.”
아래 마법사를 부리는 부관주가 아니라, 마탑 소속의 많고 많은 마법사처럼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며 묻는 랜달. 그 모습에 탑주가 이더비히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이더비히 부관주는 소드 팰러스로 가라. 그리고 랜달은 쉐어 가든으로 가라.”
“소드 팰러스.”
“쉐어 가든.”
랜달은 자신의 목적지를 되새기며 탑주의 의도를 읽어 보려다 포기했다.
소드 팰러스야 워낙 유명한 곳이고 많은 부분이 엮여 있지만, 쉐어 가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스의 쉐어 가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 대륙에 다른 쉐어 가든도 있더냐?”
“죄송합니다.”
랜달의 의문에 탑주의 가시 돋친 대답. 랜달은 탑주의 분노가 풀린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어깨를 움츠렸고, 탑주는 그런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했다.
“……검후가 필요하다.”
자세한 설명은 하나도 없는 짧은 한마디. 하지만 탑주 앞에 있는 두 사람은 그 짧은 말 속에 든 다양한 의도 정도는 쉽게 읽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의도를 몰라도 일단 뭐라도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검후가 언급되었으니까.
‘검후가 쉐어 가든에 있었나?’
특히 바벨 소속이기도 한 랜달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검후의 감금 장소를 탑주가 알고 있는 것도 문제고, 그런 검후가 필요하다는 탑주의 발언도 문제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그 검후를 자신이 빼 와야 한다는 거다.
심지어 이건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임무였다.
“검후를 빼앗으려는 거군요.”
“빼앗는 건 아니지. 어차피 검후가 놈들의 것은 아니니까.”
그리 말하면서도 탑주가 이더비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더비히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오랜 시간 탑주의 제자로 함께한 경험과 뛰어난 두뇌가 금방 그럴듯한 결론을 꺼내 놓는다.
“탑주님이 풀어 놓으셨던 기초 이론 부분과 연관이 있는 거로군요? 검후 말이에요.”
“…….”
정답이다.
탑주는 바벨에서 삼검왕에 협력 후 검후를 확보한 이유를 벌써 파악해 둔 상태였다.
설마 그 폭주가 초인 마법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지만, 오랜 시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을 쏟은 바벨이 해결책으로 선택한 검후다. 탑주는 이런 노력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결정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할 생각이다.
검후를 빼앗긴 바벨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어차피 토벌을 통해 완전히 돌아선 마탑과 바벨이다.
거기에 뜬금없이 발견된 초인 마법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서 마음이 많이 급한 탑주기도 했다.
“검후를 살아 있는 상태로 내 앞으로 데려오는 것. 그게 네 일이다. 할 수 있겠지?”
굳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매우 어려울 게 뻔히 보이는 일이다. 검후를 감금하고 있으니, 얼마나 경비가 삼엄할지도 상상이 되었다. 문제는 위험하다고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현재 랜달은 어떤 위험한 임무라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거기에 어떤 일이라도 완벽히 처리하겠다고 큰소리쳐 놓은 것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해서 못하겠다고 하면? 탑주가 당장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어차피 선택해야 한다면 생존율이 높은 쪽을 고르는 것이 인지상정!
“물론입니다. 탑주님 앞에 검후를 데려와 보이겠습니다.”
눈을 똑바로 뜬 랜달의 말에 몇 장의 보고서를 꺼내 랜달에게 미는 탑주다.
“쉐어 가든에 대한 정보다. 이것으로 작전을 짜고 필요한 전력은 요청하도록 해라.’
랜달에게 보고서를 던져 준 탑주가 이번엔 이더비히를 돌아보았다.
“제 차례네요.”
두근거리는 기대감의 표현으로 눈을 반짝이는 이더비히의 모습이 어린 소녀 같다. 탑주는 익숙한 듯 그런 모습에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정신의 관이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은 갑자기 침입해 온 웨어울프다. 심지어 이놈은 구멍을 뚫어 생명의 관과 정신의 관을 무단으로 침입했다.”
“영혼의 관엔 아직 발을 들이지 못한 걸 확인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지. 그런데, 이 웨어울프가 존 워스를 구했다. 과연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를 구했겠느냐?”
살랑살랑.
이더비히가 고개를 저었다.
“첫눈에 반한 사이도 아닐 테고, 그럴 리가요.”
“그래. 이전부터 알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신의 관의 붕괴에 소드 팰러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책임을 져야지.”
“쉽게 인정하지 않을 텐데요?”
이더비히의 말에 랜달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 팰러스에 책임을 묻겠다니, 생각만 해도 진땀 나는 일이다. 미완의 마탑도 불과 얼마 전까지 소드 팰러스와 바벨에 눌려 지내지 않았던가. 물론, 연구 자금과 재료의 수급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긴 했지만 말이다.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곧 복귀를 마친 초인파에서 존 워스에 대한 책임 추궁에 나서게 될 테니까.”
“아하~ 당연히 소드 팰러스에선 초인파의 주장을 부정할 것이고, 그때 우리 마탑에서 그 주장을 인정해 버리면 존 워스, 아니 소드 팰러스에 대한 거대한 스캔들로 번지겠네요. 그걸 원하지 않으면 저희 요구를 거부할 수 없겠지요.”
“그런 거다.”
“그래서 무엇을 뜯어내면 되나요?”
“존 워스를 끌고 오면 가장 좋다. 그게 힘들다면 존 워스에 대한 모든 것과 함께, 그를 구해 간 웨어울프에 대한 정보 일체를 요구해라.”
“정신의 관이 무너졌는데, 겨우 그것만요?”
완벽하다고 생각한 초인 마법의 구멍과 관련된 일이니 ‘겨우 그거’라고 할 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탑주만 아는 일.
거기에 이더비히의 말을 듣고 나니, 탑주는 자신에게 귀금속을 뜯어 갔던 이드와 라미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머지는 부관주에게 맡기지.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뜯어내라.”
“맡겨 주세요. 정신의 관을 다시 지을 비용을 받아 낼 테니까요! 덤으로 검후 탈취에 협조하도록 해 볼까요?”
탑주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을 끼우는 건 위험하다. 초인파에 검후를 넘긴 것도 거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넘긴 것이다. 기회만 되면 놈들은 검후를 죽이려 할 것이다. 검후는 그들에게 존 워스의 사건 이상으로 감춰야 할 최악의 죄업이니까.”
“알겠습니다.”
이더비히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게 각자 할 일을 받아 든 두 사람이 연구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던 탑주가 뒤늦게 생각난 듯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검후가 쉐어 가든에 있다는 사실을 마스가 알고 있느냐?”
“음…… 아마 알지 못할 것입니다.”
“좋군. 알 수 있도록 정보를 넘겨라.”
“그렇게 되면…… 검후를 확보하려고 날뛸 텐데요? 랜달 부관주님의 일에 방해가 될 겁니다.”
힐끗, 랜달의 표정을 살핀 이더비히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힘에 대한 욕망에 충실한 마스다. 몰랐으면 모르지만, 자신들의 땅에 검후가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순간 검후를 빼앗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탑주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아니, 오히려 적당하다. 이제 바벨 놈들도 이번 일을 통해 소드 팰러스와 우리가 손을 잡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당연히 검후에 대한 방비도 단단해질 테지. 하지만 그렇게 경계하던 중에, 막상 달려온 것이 마스라면 어떨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바벨의 입장에서야 도둑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마스는 또 다르다. 검후를 잡아 두고 있는 땅의 주인이 바로 마스이니까. 대충 탑주의 의도를 헤아린 이더비히와 랜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엔 오지 마라.”
닫히는 문 사이로 흘러나온 탑주의 말을 들으며 이더비히와 랜달이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일을 처리하려면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당일 저녁.
두두두두.
국경 방위 기사단이 쉐어 가든을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탑주의 명령이 떨어진 지 반나절 만에 일어난 일이다.
이더비히의 일 처리가 빠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마스의 급한 성질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미친 듯 빠른 진도였다.
한편,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드들은 한데 모여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아쉽네요. 쉐어 가든 내부에 대한 구조도 나와 있으면 좋은데.”
에린이 자신들이 가진 지도와 탑주에게 받아 낸 지도를 비교하다 말했다.
“쉐어 가든 내부에 대한 지도를 구할 순 없소?”
“대략적인 구조도라면 구할 수 있죠. 문제는 여기 쉐어 가든의 중심부에 대한 구조는 현재까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검후가 감금되어 있다고 추정되는 곳이 바로 쉐어 가든의 중심부이기도 하다.
“그럼 일단 탐색부터 해 봅시다.”
이드가 쉐어 가든의 중심부를 짚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