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578화


1014화

라미아가 뽑은 리스트를 통해 확인한 내성의 방비는 철저했다.

기사가 힘으로 밀고 들어 왔을 때, 마법이 사용될 때, 초인기를 이용해 침입하려 할 때 등등 실로 다양한 상황을 가상한 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가짓수를 보면 이곳이 쉐어 가든의 내성인지, 왕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나마 왕실과의 차이라면, 내성에 준비된 대부분의 대응 방법이 초인의 초인기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성의 실질적인 운용을 바벨에서 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개중에서도 특히 이드의 눈을 잡아끈 부분은, 공간 이동을 이용한 기습에 대한 방비였다.

“우리가 걱정하고 있던 부분을 실제로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군.”

그렇게 리스트를 살피고 있을 때 보고가 들어왔다.

“내성에 50명의 기사가 들어가고 나머지 기사들은 짐 상자가 있는 숙소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드는 에린의 말에 재미있다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일지, 호랑이를 집으로 들인 것일지 지켜보면 알겠지.”

“현재 불리한 쪽은 타란 백작과 기사단입니다. 내성에 들었다 해도 쉽게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에린이 말했다.

분명 50명의 기사가 들어서긴 했지만, 내성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그 이상이다.

하물며 성 밖에 대기 중인 기사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내성은 그들이 쉽게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연 왕실과 타란 백작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내성이 얼마나 단단한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드의 질문에 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입성해선 전력에 밀려 눈치만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으면, 들어갈 이유가 없다.

“당연히 계획은 있을 겁니다. 저희가 확보한 리스트처럼 내성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도 분명 적을 흔들 방법이나 검후님을 빼낼 구멍을 찾았다는 것일 테니까요. 다만, 그러는 과정은 쉽지 않을 테죠.’

“그렇겠지. 지켜보는 눈이 한둘도 아닐 테고.”

이드가 창 너머 내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길어지면 좋지 않은데 말이야.”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저택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은색 기사단이 지루해할 것 같아서.’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닌게 아니지. 잘못하면 참다못한 스폴 경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거든.”

거기에 꼴뚜기 따라 뛰는 망둥이처럼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그런 스폴의 뒤를 따라올 테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라미아, 저택에 통신 좀 열어 줘. 폭주하기 전에 미리미리 말을 해 둬야겠어.”

“알았어요.”


정체불명의 적 때문에 바쁜 것일까. 파라켈 후작과의 통신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한참을 기다려 결국 그와 통신을 한 브리더 자작은 다시 두 남작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후작님과는 이야기를 해 보셨습니까?”

위리더 남작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두 사람 역시 결과가 어지간히 궁금했던 것이다.

“일단 앉게. 앉아서 이야기하지.”

“쯧, 별로 좋은 이야기가 없는 모양이군요.”

분명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한데 브리더 자작의 얼굴은 며칠 밤을 샌 듯 피곤해 보였다.

그런 그의 낯을 본 두 남작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기사들이 머물 곳은 안내해 주었나?”

“그쪽은 걱정 마십시오. 철저하게 처리했습니다. 타란 백작은 물론이고 구른 단장에도 양해를 구하고 기사들과 같은 구역에 방을 내어 줬습니다.”

“다른 구역으로 연결된 문마다 경비도 철저히 세웠으니, 실수라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두 남작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움직였는지, 방을 배정받은 기사들 중에 자신들이 죄수가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이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네들이라도 믿음직하게 일해 주니 고맙군. 휴우~”

“아, 한숨만 쉬지 마시고 말씀을 해 보십시오. 답답해 죽겠습니다.”

위리더 남작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두드리자, 나란히 앉은 피더스 남작이 조용히 물었다.

“정체불명의 적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습니까?”

“그렇네. 사실이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급히 타란 백작에 일을 맡겨 보낸 것이고. 실로 그의 말 그대로였네. 문제는!”

천천히 말을 꺼내던 브리더 자작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목소리를 높이더니,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두 남작은 말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계속된 발언은 과연 두 사람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무래도 후작님께서 타란 백작과 왕실에 검후에 대해 언질을 하신 것 같네.”

심각한 얘기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검후와 관련된 정보가 새어나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두 남작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

“그・・・・・・ 말씀이 정말입니까?”

입만 딱 벌린 위리더 남작을 대신해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피더스 남작이 물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얼굴엔 브리더 자작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했다. 이곳에 검후가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보호해야 할 기밀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스의 후작으로 바벨에서도 발언력 있는 파라켈 후작이 공개했다니.

이건 파라켈 후작을 믿고 이곳에 검후를 감금한 바벨과 수많은 초인의 믿음을 배신한 것이며, 욕심 많은 마스를 움직이게 만들 미끼를 던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 봐야 브리더 자작이 썩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이네. 후작님의 말씀을 좀 더 정확히 옮기자면, 검후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하셨네. 다만 이곳에 마스가 놀랄 만한 보물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머물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해야 한다고 하셨다는군. 하지만…….”

후작의 말을 옮기는 브리더 자작. 하지만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 피더스 남작은 허탈하게 웃으며 눈가를 눌렀다.

분명 검후의 존재는 밝히지 않았다는데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결국 결론이 뭔가? 검후에 대해 깠다는 건가, 아니란 건가?”

위리더 남작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묻자 피더스 남작이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마스가 알았네. 검후에 대해서.”

“그럼 검후 자체는 비밀로 하고, 그저 중요 인물이라고만 했다는 후작님의 말은?”

“거짓이지.”

사실인 양 단정 짓는 말에 이상하지 않냐는 듯 고개를 내젓는 위리더 남작이다.

“후작님이 그런 일을 하실 이유가 없잖은가?”

“그럼 지금 내성에 있는 타란 백작과 수도 기사단은 뭐라고 할 건가? 이 어리석은 친구야, 정말 중요한 사람이란 그 한 마디에 수도 기사단이 움직일 것 같으냔 말이야.”

수도 기사단이 왜 수도 기사단인가. 전쟁이 나도 수도를 수호할 뿐,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전력이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수도를 지키는 것이 아닌, 그 안에 있는 왕궁과 왕을 지키는 임무를 가진다.

전장에 나간 왕자가 위기에라도 빠져 있지 않은 이상, 아니, 그렇다 해도 신하들의 반대를 꺾은 왕의 명령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바로 수도 기사단이다.

한데, 그런 수도 기사단이 후작의 한 마디에 움직였다? 이상하다 못해 의심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잠깐만, 꼭 중요 인물이 아니라도, 정체불명의 적도 있잖나.”

“그래, 말 잘했다. 정체불명. 즉 강한지, 약한지, 적인지 아닌지도 정확하지 않은 상대지. 그런데 왜 제국기사단도 아니고, 수도 기사단을 움직이나? 그리고 정말 상대의 정체를 모른다면 탐색이 먼저지. 쉐어 가든을 노리고 있다니, 당장 우리가 움직일 수도 있는 일이고, 우리가 그런 것도 못 할 정도로 약한가?”

“아니지. 어떤 놈들이 와도 문만 걸어 잠그면 버틸 수 있지.”

“그런데 타란 백작에 수도 기사단까지 움직였지. 이게 검후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서 설명이 되는 상황이라고 보나?”

“…… 빌어먹을.”

위리더 남작이 씹어뱉듯 욕설을 날렸다.

어떻게든 부정해 보려 해도, 아가리를 벌리고 쑤셔 넣는 사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사실과 사실을 이은 합리적인 의심은 제정신인 이상 부정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사실은 그런 요소들 끝에 있는 하나의 답이었다.

“후작님이…… 바벨을 배신했다고?”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피더스 남작의 말과 달리, 정말 현 쉐어 가든의 전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랬다면 최소한 이런 일이 있다고 연락을 했어야 했고, 그게 아니라도 브리더 자작과의 통신에서 설명을 해 줬어야 했다.

검후의 정체는 비밀로 하고, 중요한 사람이라고만 포장했다는 엉터리 변명이 아니라 말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네. 자작님도…… 그러신 듯하고.”

힐끗 눈이 마주치자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브리더 자작이다.

위리더 남작은 눈앞이 아찔했다. 어쩌면 그건 파라켈 후작을 크게 존경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후작을 처음 본 것은 바벨의 정기 회합 때였다. 그때 멀리서 본 후작은 마스인 특유의 기질에 호탕한 남자 중의 남자였고, 위리더 남작은 그런 모습에 단숨에 반해 버렸었다.

한데, 그런 그가 바벨을, 초인을 배신하고 검후의 존재를 마스에 알렸다니.

믿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친구인 피더스 남작처럼 지혜롭진 못해도, 그 역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후 대책은 어쩌면 좋겠나?”

위리더 남작이 쓰린 마음을 뒤로하고 대책을 물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타란 백작과 기사단을 내성에 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후작님이 올 때까지 기다려 진실을 듣는 것이지만.”

“그러긴 이미 틀렸지.’

“맞네. 이렇게 되면 결국 남은 길은 둘이네. 맞서 싸워 지키느냐, 혹은 적이 움직이기 전에 검후를 먼저 빼돌리느냐가 되겠지.”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쥐도 새도 모르게 검후를 빼돌리는 것이지만, 사실 이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장거리 공간 이동이 가능했다면 문제는 없지만, 그렇지 못한 현 시점에 적이 어떤 대비를 해 뒀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조심스레 옮겨야 하는 검후도 문제다. 보통 포로나 죄수가 가장 탈출하기 좋은 때가 바로 이송할 때인데, 감금된 후 한순간도 탈출 시도를 쉬지 않은 검후가 이때를 놓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위기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의심에서 나온 추론이지, 실제 위험이 아니다. 이 상황에서 검후를 빼돌리기 위해서는 바벨의 허가가 필요했다.

검후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조금의 위험도 피함이 옳지만, 과연 바벨도 같은 생각일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바로 며칠 전 바벨에서 보내 준 전력을 수혈받은 쉐어 가든의 입장에선 이런 말을 꺼내기 쉽지 않다.

현재 전력이라면 타란 백작과 기사단을 상대해 볼 수 있는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 검후를 빼돌리자고 한다면 ‘겁쟁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쉽지 않은 상황에 고민하던 브리더 자작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일단 성에 들인 기사들에 대한 감시를 더하고 지켜보도록 하지. 확실한 저들의 의도가 드러날 때까지. 행동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는 이 결정을 통해 마스와 후작에게 바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을 거라는 경고를 보낼 작정이었다.

물론 조용히 지나가면 그게 가장 좋고.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준비시킬 필요는 있겠지. 피더스 남작이 현 상황에 대해 바벨에 보고해주게. 갑자기 세이프 포인트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

“위리더 남작은 바로 경비 인원을 늘려 주고. 음……탑으로 가는 길은 며칠은 폐쇄하도록 하지.”

“예.”

마음은 답답했지만, 브리더 자작의 명령은 거침이 없었다.

두 남작은 빠르게 방을 나섰다. 브리더 자작의 결정에 큰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남자, 그리고 브리더 자작도 비슷한 시간 내성에 들인 타란 백작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았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 밖에서 움직이는 짐 상자는 두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