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82화
1018화
현재 이드는 너른 들판을 달리는 중이었다.
팟. 팟. 팟.
그런데 일반적인 달리기와는 그 형태가 조금 달랐다. 이드의 발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간격도 문제다. 매우 짧은 순간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그때마다 이동하는 간격이 백 미터가 넘는다. 과연 이걸 달린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법사라면 분명 그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대신 연속되는 고속 근거리 공간 이동 현상, 줄여서 연속 블링크라고 주장했을 건 확실하다.
그렇게 달리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만들어 낸 이드는.
힐끗.
깔끔하게 허리가 잘려 쓰러진 나무를 보고는 그쪽을 향해 살짝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달렸을까. 거리로는 수 킬로 정도 이동한 이드가 우뚝 멈춰 섰다.
근처에 무엇 하나 볼 것 없는 들판 한가운데. 이드는 그곳에서 마치 앞에 누가 있는 듯 말했다.
그런 그의 시선은 발끝을 향해 있었다.
“놀라지 마라. 변동 사항은 있나?”
흡!
순간 들리는 짧은 숨소리. 그와 함께 그의 앞에 있는 땅이 움직이더니,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놀람과 두려움을 두 눈에 담은 그는 이드를 돌아보고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며, 명예 후작님을 뵙습니다.”
결코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는 검은 돌의 요원으로, 자신을 흙으로 바꿀 수 있는 초인기를 가진 초인이었다.
“놀라지 말라고 미리 경고했는데도 놀란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고.”
사죄하던 요원은 이드의 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귀신처럼 나타나 소리를 내면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라도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특히 그는 흙으로 변하는 초인기를 통해 은신과 감시에 최적화된 요원이었다.
검은 돌에서의 훈련을 통해 초인력까지 감추고 있으면 삼검왕이 자신을 밟고 있어도 알지 못할 거라고 평소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나타났는지 모르게 나타난 이드가 정확히 자신을 보며 말했다. 놀라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다.
비단 놀라운 감정뿐만이 아니다. 그간 가지고 있던 자부심도 산산조각이 났다.
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쉽게 발각되어서야.
대신 이드에 대한 호감도는 올랐다. 자신의 즉각적인 사죄에 담담하게 죄송할 일이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시시비비를 떠나 무조건 아랫사람의 잘못인 양 지적하는 불쾌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명예 후작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일 수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상관없네. 감시자는 들키지 않는 게 최우선이지.”
“감사합니다. 질문에 답하자면 앞서 보고 후 특이한 변동사항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느린 속도로 쉐어 가든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드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 보이는 작은 숲, 그리고 그 사이로 막 그 숲을 통과중인 검은 그림자의 무리가 보였다.
요원의 말처럼 빠르지 않은 속도로 움직이는 그들은 앞선 보고를 통해 짐작했던 대로 마탑의 몬스터와 마법사들이었다.
사실 이드가 이곳에 온 건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그는 원래 쉐어 가든의 초인들과 마스의 기사, 거기에 마탑의 전력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어부지리를 취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상황 전달을 위한 통신에 끼어든 비올라의 말에 바뀌게 되었다.
“병력이 이천 남짓이라고 하셨습니까? 어쩌면 거기에 그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냐고요? 벌써 잊으신 겁니까? 랜달 포스터! 생명의 관에서 제 배만 불리던 돼지 자식 말입니다. 마탑에서 파견한 전력상, 분명 장로급 이상이 한 명쯤 책임자로 끼어 있을 텐데. 제가 파악한 탑주의 성향으로 보면 분명 랜달, 그 인간을 세웠을 겁니다. 정신의 관에서도 별로 한 게 없었으니까요.”
자신을 무시한 랜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담긴 말이었지만, 그래도 가장 마탑에 정통한 비올라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남은 영혼의 관의 위치가 확실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 어디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가 본 적은 없어서 말입니다. 헤헤헤.”
정신의 관이 무너진 뒤 영혼의 관에 대해 묻자 나온 비올라의 답이었다. 그런 비올라가 지목한 건 마스의 동부 일대.
본인도 면목 없는 건 아는지 식은땀으로 젖은 대머리를 머쓱하게 닦았지만.
짜악!
그 뒤통수에 붉은 손도장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손의 주인은 이드였고, 특별히 공을 들인 덕분에 그 손도장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단 범위가 마스의 일부 지역으로 좁혀진 만큼 찾자면 찾지 못할 것도 없지만,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마스가 반대할 경우 제국이 무리해서 나서기도 어려운 일.
이런 상황에서 랜달을 잡을 수 있다면 영혼의 관이 있는 위치는 물론이고, 현재 마탑의 상태, 그리고 마탑과 혼돈의 파편 사이의 연관 관계까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일단 움직여 볼 가치가 있다.
그렇게 판단한 이드는 쉐어 가든의 일을 쉘라와 라미아, 일리나에게 맡기고 본인이 직접 마탑의 전력이 나타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것도 단 이십 분만에 말이다. 보통 사람이면 두 시간 이상 걸릴 거리를 이십 분으로 줄였으니, 말 그대로 날아온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런 이드를 향해 요원이 자신이 파악한 모든 정보를 박박 긁어내 말해 주었다.
“이건 좀 더 확인해야 할 부분이지만, 검은 몬스터의 숫자가 이천을 기준으로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늘었다가, 또 다음에 다시 세어 보면 줄어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파악한 마법사의 숫자는 마흔여섯입니다.”
몬스터는 둘째 치고, 마법사가 마흔여섯이라면 절대 적은 수가 아니다.
어쭙잖은 애송이 마법사를 이런 일에 내보내진 않았을 거고, 그렇다는 말은 그 마흔여섯이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라는 의미일테니 말이다.
‘현재까지 파악한 숫자’라는 건, 아직 모두 파악한 게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마탑에서도 이번 일을 가볍게 본 건 아닌 듯했다. 확실히 비올라의 말대로 이만한 전력이라면 마탑의 장로, 혹은 랜달이 직접 나설 만하다.
일단 그 정도는 되어야 쉐어 가든이나, 타란 백작 어느 쪽에 검후가 잡혀 있더라도 빼앗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법사는 최소 마흔여섯 이상. 좋은 정보 고맙네. 그나저나, 조금 있으면 크든 작든 싸움이 날 것 같은데?”
불똥이 튈 수 있으니 피해 있으란 소리다. 몬스터 무리와의 거리는 대략 삼 킬로미터 정도.
보통 이 정도 간격이라면 충분히 안전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일 뿐.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에 따라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어 한 말이다.
“허락하신다면 보고를 위해 남고 싶습니다.”
그러나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이드의 힘을 실제 눈앞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요원이었다.
이드는 그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요원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런 일의 전문가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긴 이드가 앞으로 나갔다. 그가 앞으로 내민 발아래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압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크흡!”
가까이 있던 요원은 갑자기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력에 신음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강한 힘에 질끈 눈을 감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영문 모를 압력이 사라졌다.
그에 의아함을 느끼고 눈을 뜨자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이드 역시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 무리로부터 들려오는 폭음.
요원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몬스터 무리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는 붉은 번개와 그 번개를 쏘아 내는 이드였다. 꽈르르릉!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수천의 변초가 중복되며 만들어 낸 검뢰. 그렇지 않아도 거칠고 빠른 검뢰가 수라검강을 기반으로 폭발하는 모습은 마치 분노한 뇌신의 벼락 같았다.
……!
그 한 번의 벼락에 이백의 몬스터가 반항은커녕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다. 쉽게 죽지 않는 놈들이건만 재생할 기회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죽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
“적이다!”
“크허허헝!”
이백의 몬스터가 증발한 후, 그제야 상황을 인식한 마법사와 몬스터들이 혼비백산하여 소리를 질러 댔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반응이 좀 느린데.”
이드가 상대했던 마탑의 장로들이나 랜달이 이끌고 있다기엔 뭔가 조금 어설프다는 느낌이다.
그러는 사이 적들이 이드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마법이 쏟아지고, 몬스터들이 달려든다.
그 와중에 마법사들이 기묘한 형태의 진형을 만들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듯 몬스터들이 주변을 막아선다.
그러나 이드의 눈엔 그런 애쓰는 모습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생명의 관에 쳐들어갈 때와도 다르고, 정신의 관을 토벌할 때와도 다르다.
그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적당히 힘 조절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아니다.
검후를 코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고, 미완의 마탑과 혼돈의 파편도 확인 후 수면 위로 끌어 올려 둔 상태다.
즉, 이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토벌 마지막 날 메르시오를 상대로 하늘을 뚫고, 땅을 쪼개는 검강을 뿜어내는 모습을 본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화르륵.
붉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검로를 따라 풍화의 꽃비가 내렸다.
진력이 담긴 난화십이식은 이전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스스스슥.
고기도 아니다. 마치 두부를 가르는 칼처럼 몬스터의 살을 가른 검화는 정확하게 몬스터의 핵을 쪼개 버렸다.
이드를 향해 달려들던 수십의 몬스터가 녹아 내리며 풍기는 검은 연기에 한순간 그의 모습이 가려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검화는 멈추지 않았고, 이드가 다시 땅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그의 주변에 남아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저 괴물은…도대체 무엇인가.”
그 모습에 겁을 먹은 마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의 마법사는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꿈이 아닌가 싶어서다.
자신들이 어떤 고생 끝에 만들어 낸 몬스터인데, 저렇게 쉽게 연기처럼 잡아 버린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물론 그렇게 부정해 봤자 허벅지의 고통이 사라지는 일은 없고, 눈앞의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압도적인 힘을 재인식하자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약한 소리 말고, 싸울 준비나 하게!”
“저런 무서운 상대는 싸우기보다 피해야지요.”
“그보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는 사람 없어?”
이드에 대한 두려움에 술렁이기 시작하는 마법사들이다. 그러자 이 무리를 책임지는 마법사가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그 소리에 마법사들이 하나둘 입을 닫자 마법사가 이드를 향해 무거운 눈을 들었다.
“이름 모를 강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우리를 막고, 공격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드는 대답 대신 마법사들을 살폈다. 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드의 안력 앞에 로브는 소용이 없었다.
“흐음. 없나? 거기 대장 마법사, 마법사는 여기 있는 이들이 전부요?”
대답 대신 돌아온 이드의 일방적인 질문.
마법사는 기분이 나빴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기분을 맞춰서 피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대답해 주고 피해야 하는 위험한 상대였다.
“도대체 누굴 찾으시는 것이오?”
“전 생명의 관 부관주, 랜달 포스터. 그를 잘 아는 어떤 남자가 말하기를 그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소만.”
“…..!”
“반응을 보니 확실히 관계는 있는 모양이오.”
이드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상대의 표정에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