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85화
1021화
공간을 넘어 나타난 이드의 눈엔 가장 먼저 라미아가 보였다. 그녀를 향한 이동이었으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당연. 라미아가 둥지를 찾은 새처럼 그의 머리 위로 날아내렸다.
이드가 주변을 살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수십 분 전 떠났던 식당의 별채.
“일리나와 쉴라 경은?”
“랜달이 쉐어 가든에 들어와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갔어요. 지금은 내성의 주요 길목을 지키고 있을 거예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지만, 또 당사자의 마음은 다를 테니까. 일리나는 그런 쉴라를 돕고 싶었을 테고.
“그런데, 랜달을 찾으려면 두 사람보다 라미아가 나서야 하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숨어만 있다면 저도 당장은 방법이 없어서요. 거기다 이드가 언제 절 부를지 모르잖아요.”
이드는 그 말에 납득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직전까지 앉아 있었던 것 같은 에린이 어느새 서 있었다. 끊임없이 들어온 정보를 분석한 듯, 그녀 앞에는 수십 개의 쪽지들이 시간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명령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에린이 물었다. 과연 정보를 잘 다루면 눈치도 빨라지는 건지, 잠깐 눈이 마주친 걸로 그걸 잡아낸다.
“당장 검은 몬스터들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 줘야겠는데 말이야.’
이드는 그녀에게 들판에서 있었던 짧은 전투와 네 명의 포로에 대해 말했다. 그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명령서를 작성하더니, 대기 중인 요원에게 넘기고는 말했다.
“우선 안가로 이동시킨 후 조용해지면 제국으로 옮겨 바닥까지 쥐어짜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내성에선 한바탕 난리가 날 것 같습니다. 적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적이 사라진 쉐어 가든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 불안하긴 해도, 현상 유지만 하면 되니까. 반대로 저들과 손을 잡은 타란 백작은 답답할 것이다. 물론 마법사와 몬스터를 직접 끌고 온 랜달은 그 이상일 테고 말이다.
“바라던 바지. 변수가 발생하면 마음 급한 쪽이 먼저 움직이게 되어 있는 법이고, 우린 그때 움직인다.
이드는 말과 함께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내성과 세 개의 탑.
하지만 그보다 더 이드의 눈을 끄는 건 내성에서 일렁이는 투기와 살기다. 다만 앞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밖이 아닌, 내부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네.’
6 대 6.
묘한 침묵 속에서 살벌한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으
난데없이 그사이에 끼어 버린 기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참에 피더스 남작이 물었다.
“정체불명의 적이란, 검은 몬스터를 말하는 것이겠지?”
고개를 끄덕여 답하는 기사.
그에 타란 백작을 향한 피더스 남작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어떻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내심 기분 좋은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아직 타란 백작이 인정하진 않은 상태지만, 그는 이미 정체불명의 적이 그들과 한편임을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 안과 밖으로 손을 잡은 적들 중 외부의 적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니.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
반대로 타란 백작은 머리가 복잡하다.
쉐어 가든을 압박해야 할 마탑이 예상치도 못한 존재와 싸우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그들을 공격하고 있단 말인가.
이 상태로 마탑이 빠지면 곤란해진다. 파라켈 후작에게 듣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쉐어 가든의 전력은 강했다. 마탑이 없다면 검후를 탈취하는 일도 결코 만만치는 않을 텐데.
생각 같아서는 기사의 보고를 거짓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전달된 내용은 그게 끝인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게.”
타란 백작이 추궁하듯 묻자 기사는 브리더 자작을 보았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답했다.
“의문의 강자는 일인으로, 검을 사용하고 있으며, 갑자기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 마법사와 몬스터가 섞인 적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무력을 보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타란 백작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이다. 그에 반해 브리더 자작은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말했다.
“그건 차차 알아볼 일이겠지요. 다만 쉐어 가든을 노리는 적을 공격하고 있으니, 저희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오만.”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는 타란 백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출전은 일단 멈추고, 쉐어 가든의 방어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타란 백작이 내심 혀를 찼다. 역시나 그렇게 나오나.
“그 의문의 강자 역시 적일 가능성도 있소.”
“그러니 더 단단히 준비를 해야지요. 저는 이천의 몬스터보다 한 명의 절대 강자가 더 무섭습니다.”
브리더 자작이 수성하는 입장에 있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막말로 보고된 강자가 몰래 성에 숨어들어 와 검후를 노린다면, 그건 진심으로 이천 몬스터보다 무서운 사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답은 간단하군. 검후를 이쪽에 넘기게 우리가 림몬으로 안전하게 옮겨 주겠네. 검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나?”
“그랬지요.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몬스터와 마법사들이 사라진 이상, 오히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타란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이라도 들판에서 그런 강자를 상대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 검후를 내놓지 않겠다는 건가?”
“저희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겠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혹은 마스에서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솔직히 불쾌하군.”
“타란 백작께는 죄송하게 되었지만, 저도 이건 물러서기가 힘든 일입니다.”
첨예하게 부딪히는 두 사람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당장이라도 피를 보는 일에 불을 붙일 것 같지만, 어쩐지 쉽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 시발점에 불이 붙는 순간, 어느 쪽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서로 마주 앉아 노려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서로가 검후를 감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서 왔음을 밝혔다.
마지막 카드를 깐 것이다. 간을 보는 시기는 지났다. 전진만 있을 뿐 후진은 없다.
방 안의 긴장감이 빠르게 높아졌다.
밖에서 그 모습을 살피던 기사들의 투기 역시 빠르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한없이 부풀면서 터질 듯 터지지 않는 풍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 정작 불꽃은 다른 곳에 먼저 피어올랐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내성이 보이는 곳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랜달은 급히 장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내성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내성 안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니다. 대신 멀리까지 보는 마법으로 성벽 위에 있는 병사와 기사들, 그리고 성 앞에 대기해 있는 기사들의 모습은 훑을 수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공동의 적을 상대로 벌어질 전투에 긴장감을 높이던, 그들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살기를 뿜고 있다.
특히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활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 어떻게 봐도 외부의 적을 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천의 몬스터를 이끌고 접근 중인데 저럴 수는 없는 일이다.”
랜달은 조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걸 누르며 수정구를 꺼내고 마법진을 그렸다. 아무리 급해도 적진이고,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다.
외부의 감지를 차단하고 들판에 있을 마탑의 전력을 불렀다.
당연히 이드에게 죽거나 생포된 마법사들은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랜달은 몇 번이나 통신을 시도했고, 결국 다섯 번이 넘어서야 포기했다.
“제길. 쉽게 풀리는 일이 없군.’
수정구를 회수한 랜달의 얼굴은 꺼멓게 죽어 있었다. 마탑의 전력이 빠지면 탑주에게 명령받은 일을 완수하기 쉽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랜달이 다른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그건 바벨과만 연락할 수 있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지금이라도 라울에게 알려야 하나.”
랜달은 갈등했다. 마법사로의 욕심과 바벨에서 받은 임무에 따라 미완의 마탑에 속했던 그다. 당장이라도 마탑을 배신할 모든 조건은 갖춰진 상황. 그러나 그 결정이 쉽지가 않다. 바로 욕심 때문이다.
그가 선뜻 마탑에 속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초인 마법과 그 정수를 녹여 빚어 낸 바이트 타블렛 때문이 아니던가.
현재 마탑은 그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다. 갑자기 탑주가 검후를 빼앗아 오라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에 실패하면 더 이상 바이트 타블렛에 다가갈 자격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장 바벨로 돌아가도 마찬가지.
“아직, 아직이다. 혼란을 틈타면 아직 기회는 있다.”
갈등을 거듭하던 랜달은 겨우 마음을 정하고는 꺼내 들었던 수정구를 집어넣었다. 대신 마법진을 변형시키고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쉐어 가든과 마스 모두 화끈하게 타서 잿더미만 남길 바라며, 정해진 시동어를 외웠다.
“베인! 베란! 베인! 깊고 어두운 흑암의 불길이여, 오라!”
쿵!
충격은 갑작스러웠다. 마주 앉아 긴장감을 높이던 여섯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지금 충격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멀리서 전해진 충격도 아니었다.
여섯 사람은 이게 내성에서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그와 동시에 열린 문을 통해 비명 소리와 함께 급박한 외침이 들리더니, 기사 하나가 달려오며 고함을 쳤다.
“의문은 폭발과 함께 치솟은 불길이 내성을 녹이고, 벽에 구멍을 뚫었습니다!”
“마법!”
피더스 남작이 소리쳤다.
내성의 벽은 돌이다. 평범한 불이 돌을 그렇게 빠르게 녹일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내성은 화공을 대비한 방화 대비가 잘 되어 있는데? 당연히 평범한 불이 아니다.
무엇보다 철저히 관리되고 있는 내성이다. 불이 날 것도 없고, 폭발할 물건도 없다. 그런데 안에서 폭발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는가?
“타란 백작과 두 단장을 잡아라!”
순간 브리더 자작이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타란 백작과 두 기사단장이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는 중에도 타란 백작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연신 욕설을 날리고 있었다.
‘도대체 그 물건이 왜 혼자 폭발한단 말인가!’
타란 백작은 그냥 내성이 든 것이 아니었다. 외부에서는 공간 이동을 막을 준비를 했다면, 마찬가지로 내부에서는 내성의 단단한 방어를 무효로 돌리기 위해 마탑에서 미리 준비한 마계의 불꽃을 받았다.
그걸 작게 나눠 기사들이 장신구처럼 가지고 들어왔고, 쉬는 사이 그걸 다시 합체해 놓은 상태였다. 언제든 상황이 되면 사용할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절대 지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폭탄을 터트릴 스위치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도대체 누가!
하지만 그런 의문은 지금의 위기를 넘긴 뒤에 할 일.
타란 백작은 다리에 힘을 더하며 검을 빼 들었다.
번뜩.
뒤이어 불쌍하게 분위기에 휩쓸려 자리를 뜨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던 기사의 목이 떨어지고, 세 사람이 문을 빠져나갔다.
한발 늦게 피더스 남작과 위리더 남작이 각자의 초인기를 사용했지만, 세 사람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이 방에서 빠져나온 즉시 방 밖에서도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조되던 긴장감 속에 검을 반쯤 빼 들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일까. 서로를 향해 공격하는 모습이 냉혹하기만 했다. 타란 백작은 그 속에서 검을 빼 들며 외쳤다.
“급속 후퇴! 밖에서 진입하는 기사단과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