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86화
1022화
와르르르.
새파랗고 검은 불에 내성 한 쪽이 녹아내렸다. 직후 한결 더 강해진 화력에 구멍은 더욱 커졌다. 성벽을 녹이는 불이라니. 색깔을 봐도 그렇고, 이 세상 불이 아니다.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 당황하고 있을 때다. 문 앞에 대기 중이던 기사들은 오히려 눈을 번뜩였다.
“전군 전진! 지휘관 세 분과의 합류를 최우선으로 한다.”
“막는 놈들은 모조리 베라!”
자리를 비운 단장들을 대신하고 있던 부단장들이 기다렸다는 듯 검을 빼 들며 외쳤다. 당장 안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니다.
대신 사전에 작전 계획을 설명받을 때 똑똑히 들었다. 내성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벽을 녹여 입구를 확보할 것이라고.
바로 지금이야말로 그 계획이 말하는 장면이 아니겠는가. 안에서 연락이 없는 건 그만큼 내부의 상황이 치열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부단장들이다. 다만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 그들만은 아니었다. 성벽에 올라 경계하고 있던 기사들 역시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배, 배신이다! 눈앞의 놈들은 적이다. 화살을 퍼부어라!”
“앞에 있는 놈들부터 노린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병사들의 화살과 초인들의 초인기가 비 오듯 쏟아졌다. 초인기는 물론이고, 화살까지 어느 하나 서투른 솜씨가 없다. 그만큼 잘 훈련된 정예라는 그러나 아래에 있는 두 기사단 역시 최고 중의 최고다. 다른 기사단이었으면 큰 피해를 봤겠지만, 이 두 기사는 이런 공격에 익숙했다. 무엇보다 예측하던 상황 중 하나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공격을 받자마자 당장 대방패가 나왔고, 방어력이 우수한 기사들이 나서서 방진을 짰다. 우산처럼 위를 향해 돌려진 방패가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았다.
뚫린 구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위에서 두드리고,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옆구리를 노린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반격? 아니, 속도다!
“진입! 진입! 진입!!”
“반격하지 마! 반격하지 마라! 무조건 내성 진입이 최우선이다!”
“멈춰! 개자식들아, 멈추라고!”
“틀렸습니다. 저희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기사에, 다른 기사가 냉정히 상황 판단을 내렸다. 그리곤 즉시 성벽 위의 문을 열고 소리쳤다.
“적 침입 방어 실패! 반복한다. 적 침입 방어에 실패했다! 적 공격에 대비하라!”
처음부터 노리고 만든 것일까. 사방이 막히고, 동굴을 닮은 특성 덕에 기사의 목소리는 내성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브리더 자작의 명령에 무장을 끝내고 움직이던 기사들의 행동이 더욱 빨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쉽게도 타란 백작 일행이 기사단과 합류하는 것을 막는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저들을 너무 경계한 나머지, 검후가 감금된 곳으로 가는 길목에 전력을 집중시킨 부작용이라고 할까.
덕분에 손쉽게 기사단과 합류한 두 단장이 수고한 부단장과 기사들을 반겼다.
“수고했다. 피해는?”
“사상자는 없습니다만, 타란 기사단에서 3명, 수도 기사단에서 2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상자는 당장 생명이 위험하진 않지만, 전투 속행은 불가능한 수준을 의미한다. 그건 포션이나 마법사가 있어도 마찬가지. 즉시 복귀를 위해서는 최소 고위 신관이 필요하다.
그 말을 들은 타란 백작이 즉각적인 명령을 내렸다.
“부상자는 밖으로, 그들의 보호와 퇴로 확보를 위해 20명의 기사를 돌리게.”
“감사합니다.”
“검후가 있는 장소는 특정되었나?”
“옙, 이 두 개탑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중 이쪽에 대한 방비가 가장 단단했기 때문에 이곳을 우선적으로 노려야 할 듯합니다.”
타란 백작과 함께 내성에 머물렀던 구른 단장이 내성의 전경이 간단히 그려진 종이를 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피오 단장, 작전에 앞서 쥐구멍부터 막자. 눈뜨고 놓치는 일은 원하지 않으니까.”
“물론입니다. 준비는 끝난 상태입니다.”
피오 단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방에 있는 마법사에게 신호를 줬고, 이 순간을 위해 기사단에 합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은 즉시 준비된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와 동시에 기사단이 잡아 둔 숙소 지붕에 올려진 상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더니, 도로 얌전해졌다.
그러나 그건 마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의 일. 실제로는 투명한 마법진이 그물처럼 연결되며 내성을 단단히 묶어 버리고 있었다.
실제 눈에 보이는 모습이었다면 장관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알아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끝난 작업.
그러나 마법의 작용까지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 효과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마법의 주인이 아니라, 검후가 감금된 곳을 지키던 초인이었다. 그는 전투와 함께 성벽이 무너진 후 브리더
자작에게 연락을 받았다. 즉시 검후를 안전지대로 옮기라는 지시였다.
그 지시야말로 그와 동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이유.
두 초인은 당장 검후가 제압되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최근 다시 한번 봉인을 풀어냈던 검후를 막기 위해 재봉인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특별히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너희들, 공격받고 있는 거냐? 상대는?”
“……마스입니다.”
그간의 정이 있어서일까. 짧은 대답과 함께 검후의 양팔을 잡은 두 초인은 신호와 함께 자신들의 초인기 ‘달 건너기’를 발동시켰다.
똑같은 능력의 초인기이기 때문에 둘이 힘을 합쳤을 경우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세 배로 늘어나게 된다.
하물며 블링크로는 따라올 수 없는 거리기 때문에, 차원진에 장거리 공간 이동이 불안정한 현재 최고의 탈출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 최고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경우다.
“달 건너기가…… 발동이 안 돼.”
“공간의 길이 묶여 있어. 이런 건 처음이야.”
분명 대량의 초인력이 소모되고, 동시에 눈앞이 아찔해진 후 다른 곳에 있어야 했던 두 초인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시도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같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지만 두 초인의 상황 판단은 빨랐다.
“우리 초인기가 봉인당한 거야.”
“동료들에게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공간계만 막아 놓은 것이 틀림없어.”
“날 빼돌리는 걸 막아 놓은 것 같은데. 마스라고 했지? 생각보다 재주 있네.’
검후가 두 사람의 대화에 툭 끼어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와 어울려 줄 여유가 없는 두 사람은 대답 대신 이 사실을 급히 상부에 알렸다. 소식을 들은 브리더 자작은 앞에 있는 책상을 부숴 버렸다.
콰앙!
“젠장! 빌어먹을! 마스와 미완의 마탑 놈들이 손잡았다는 걸 알았을 때 예상했어야 했는데! 멍청한 놈!”
멍청한 놈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검후를 미리 안전지대로 옮기자는 피더스 남작의 신중론을 무시한 자신에게 말이다. 문제는 아무리 욕을 날려도 과거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일까.
그걸 알고 있는 브리더 자작은 곧 후회를 빠르게 털고 피더스 남작을 찾았다.
“아무래도 이건 마탑의 마법이네. 설마 전투 중이라던 놈들이 도착한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투를 확인한 것도 저희 정찰병이고, 성벽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법 물품 쪽이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근거는?”
“들을 땐 가볍게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 기사들이 옮기던 짐 상자가 있었고, 그게 숙소마다 하나씩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성벽을 녹인 마계의 불도 그렇습니다.”
“그것도 문제네. 마계의 불이 지독하긴 해도, 성벽이 그 정도에 녹을 수 있나?”
“발생 지점이 외부가 아닌 내부였으니까요.”
내성에 설치된 방어 마법은 거의 모두가 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는 것들이다. 내부에서 자폭할 염려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젠장, 쉐어 가든의 방어력을 너무 믿었군. 일단 공간 이동이 막힌 만큼 다른 방법이 없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마탑의 전력이 무너졌으니, 타란 백작과 기사단만 상대하면 되겠지. 두 사람, 자신 있나?”
“저들이 발을 들이긴 했지만, 아직 내성은 저희 공간입니다. 자신 있습니다.”
“애초에 지금과 같은 상황을 위해 보충된 전력입니다. 마음껏 부려 주십시오.”
피더스 남작과 위리더 남작이 자신감을 보였다. 브리더 자작은 불안하던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끼며 결연한 얼굴이 되었다.
“좋네. 지금부터 우리의 임무는 하나네. 무조건 검후를 지켜 안전한 바벨의 품에 안기는 것. 모두, 이것은 전 대륙의 초인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마라!”
“충! 바벨을 위하여!”
“충! 초인의 세상을 위하여!”
두 남작과 기사들이 쿵쿵 거세게 가슴을 두드렸다. 직후 그들은 전투를 위해 달려 나갔다.
뒤에 남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브리더 자작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옆의 기사를 불렀다. 그는 브리더 자작이 가장 아끼는 자였다.
그의 충성심이라면 어떤 일이든 믿고 시킬 수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아무도 알아선 안 되는 일이네. 자네는 지금 당장 검후에게 가 그녀의 옆을 지키게. 그리고 우리가 모두 무너지고, 검후가 무조건 적의 손에 넘어갈 것 같으면…………… 그녀를 죽이게.”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렸다. 귀를 기울이던 기사는 생각지 못한 명령에 움찔 놀랐지만, 반문하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슴을 두드린 후 검후가 있는 탑을 향해 달렸다.
브리더 자작은 그 모습을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의 명령은 그 독단이 아닌, 라울에게 직접 받은 것이었다. 라울은 바벨이 가진 은밀한 비밀 몇 가지를 검후의 설득용으로 사용했다.
만약 검후를 빼앗겨 이 비밀이 바벨의 적에게 넘어가면 곤란했기 때문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브리더 자작은 그런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전장을 향해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때마다 그의 몸이 왜소해졌고, 대신 피부는 나무의 껍질처럼 단단하게 변해 갔다.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는 있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말처럼 결국 부딪힐 두 세력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드가 사실을 알리자 몇 분 차이로 성벽이 녹아내렸고, 기사단이 내성으로 진입했다는 보고도 도착했다.
“슬슬 우리가 움직일 차례가 온 것 같다. 라미아, 은색 기사단을 부르자.”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스폴 경이 기다리다 지쳐 쓰러질 것 같았는데.”
라미아가 팔락 몸을 알렸다. 미리 준비된 대응 마법진을 작동시키러 간 것이다.
남은 이드는 일리나와 쉴라에게도 같은 사실을 알리고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에겐 딱히 맡길 일이 없었다.
그녀도 검은 돌의 요원으로 훈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복잡하고 격렬한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똑한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자기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따로 명령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곳에서 쉐어 가든을 빠져나가는 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동시에 추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쪽 일을 맡기지. 그리고 랜달 마법사의 위치도 계속 찾아 주고.”
“최우선을 그쪽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직하네. 그럼 나도 나가 보지.”
간단히 믿음을 표시한 이드가 내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