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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87화


1023화

반짝반짝.

마나 광은 너무 화려한 나머지 해가 있어도 눈이 부실 정도다. 공간 이동을 사용하는 인원에 비례해 강력한 마나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리 가려 둬서 다행이었다. 잠시 후, 번쩍이는 빛을 헤치고 나타난 스폴과 비올라가 외쳤다.

“검후님, 스폴이 왔습니다!”

“랜달 그놈, 어디 있습니까?”

기다림이 길어서인지 욕망이 폭주하는 듯한 모습의 두 사람이다.


허공을 날던 이드의 눈에 이곳 쉐어 가든의 영지민들이 들어왔다.

오늘도 활발히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들은 현재 일어난 전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내성 안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내성과 가까워지니 그 행태도 조금씩 달라졌다.

드문드문 불안한 얼굴을 하고 거리를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이들을 안고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내성에서 기사들끼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소리를 치기도 했다.

성벽에 구멍이 뚫리고, 두 기사단이 밀고 들어가는 과정에서 내성의 기사들과 누군가 싸우는 것을 본 사람들이었다.

다만 대다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넘겼다. 그러다 잡혀간다며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큰일이 났으면 여태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으니까.

평민들이 생각하는 기사들과 마법사의 싸움은 화려한 빛과 폭음, 그리고 피가 난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사들 사이에 싸움이 났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정녕 그리 믿고 있었다.

물론 그런 반응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눈을 찌르는 검광이나 마법의 폭발은 내성 벽에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할지라도, 당장 커다랗게 녹아내린 성벽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내성과 가까운, 어느 저택의 지붕에 올라선 이드. 그런 그의 눈에 보인 내성은 기괴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겉바속촉도 아니고….. 겉은 멀쩡한데 속만 썩어난다는 게 딱 저런 모습이겠지.”

내성의 밖은 기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성벽 위의 기사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한 건지 없었고, 그나마 남은 병사들도 극도로 긴장한 듯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괴이할 정도의 적막을 둘렀다고 할까?

그에 반해 내성 안은 어떤가. 보통 사람은 들리지 않겠지만, 이드에겐 녹아내린 구멍을 통해 흘러나오는 온갖 고함과 비명, 폭발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왔다.

설령 그게 없더라도 성벽을 넘어 광폭하게 일렁거리는 살기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거기에 코끝에 살랑거리는 짙은 피비린내까지.

“제대로 붙었네.”

저 단단한 성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다다닥.

그런 중에 부상자를 업은 기사들이 구멍을 넘어 나왔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활을 쏘았지만, 검과 방패에 막혔다. 오히려 기사들 사이에 숨어 있던 마법사의 마법에 병사들이 쓰러졌다.

병사를 처리한 그들은 사방을 확인한 후 외성 성문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보다 혀를 찼다.

“쯧쯧. 하필 쉴라 경이 있는 쪽으로 갔네.”

랜달을 찾기 위해 나갔다가 지금은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는 쉴라다. 일리나라면 적들이 항복하거나 물러서면 살려 줄지도 모르겠지만, 쉴라는 다르다.

그녀 입장에서는 검후를 감금하고 있던 쉐어 가든의 초인이나, 그런 검후를 빼앗아 제 입맛대로 이용하려는 마스나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들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저 중 살아남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문제는 이드에게 관심 밖이었다.

기사들에게 관심을 접은 이드의 시선이 다시 내성을 향했다.

“자, 검후가 있는 위치를 빨리 밝혀 보라고. 그래야 랜달이 나오고, 랜달이 나와야 내가 움직이지.”

여전히 랜달을 신경 쓰고 있는 이드였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마음이 닿은 것일까. 두 세력이 충돌하며 천장을 뚫고 충천하는 투기가 일정하게 움직이며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아직 정확한 방향은 나오진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에서 쉐어 가든이 밀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가볍게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두 세력의 전력은 비슷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쉐어 가든이 우위를 잡아야 했다. 누가 뭐래도 내성은 그들의 영역. 구조와 다양한 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쉐어 가든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밀리고 있다.

이드는 그 현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좁은 곳에서의 전투일수록 소수 강자의 역할이 지대한 법이지.”

충천하는 투기와 살기의 태풍 속에서도 뚜렷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하고 있는 여섯 개의 기운. 특히 그중 하나가 유독 강렬한 존재감을 뿌리며, 대항하는 세 개의 기운을 압박하고 밀어냈다.

이드는 그 기운에서 내력의 흐름이 뿜어내는 익숙함을 감지했다.

에린이 정리한 정보에 따르면 저 내력의 주인은 타란 백작이 분명했다. 그의 용맹과 뛰어난 무력은 유명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드의 생각은 정확했다.

“물러서라! 항복해라! 무기를 버려라!! 너희들이 마스인인 이상, 패배를 인정하면 인정을 베풀 것이다!”

거침없는 돌진과 함께 타란 백작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다.

그러면서도 냉기가 느껴질 정도의 무표정으로 거침없이 핼버드를 휘두르는 것은 멈추지 않는다. 전투 중 무표정은 그의 특징이었다.

핼버드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 강맹한 파괴력에 쉐어 가든의 기사들이 허수아비처럼 벌렁벌렁 잘도 넘어졌다.

보통 좁은 공간에서 핼버드 같이 긴 장병은 쓰기 어려운 법인데, 타란 백작은 긴 핼버드를 자신의 주먹처럼 쉽게 다룬다.

얼마나 능수능란한지, 옆에서 번뜩이는 검이나 도끼보다 더 빠르다.

사실 이런 모습 때문에 무기를 버리지 못하는 기사도 많았다.

저 인정사정없는 모습의 어딜 보고 인정을 베풀겠다는 말을 믿으라는 건지.

아무튼, 그런 타란 백작의 활약 덕분에 기사단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전진할 수 있었다. 거기에 타란 백작을 보좌하는 피오 단장과 구른 단장의 역할도 컸다.

두 사람은 빠른 속도에 안정감을 주었고, 피어스 남작과 위리더 남작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브리더 자작이었다.

압도적으로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지지 않을 거라던 자신감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물론 그 답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다.

“변경백의 무력이 이 정도로 대단한 줄이야. 저건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이잖아.”

브리더 자작은 그럴 수만 있다면 소문을 낸 놈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보통 소문이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부풀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타란 백작의 무력은 오히려 소문이 그 실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만 뛰어들면 대등하던 전투가 일방적으로 밀린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전체 전선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사기는 떨어진다. 악순환의 연속이랄까. 실로 늪에 빠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검후를 얻을 수 없을 것이오!’

내심 그렇게 외친 브리더 자작이 초인기를 끌어 올려 타란 백작을 요격해 갔다.

현재 위치는 두 탑의 갈림길 앞. 이 이상 밀린다면 자신들은 검후를 지키기 위해 둘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해 막을 수밖에 없고, 그 순간 타란 백작은 검후의 위치를 특정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브리더 자작으로서도 더 이상 뒤에서 명령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밀릴 땐 밀리더라도 최선의 방어는 해 봐야지 않겠는가. 그런 기백이 전해진 것인가. 타란 백작도 브리더 자작을 노려보며 핼버드를 들었다.

쿠릉!

초인기와 핼버드가 부딪치는 순간 그 충격에 바닥이 울렁거렸다.

그에 휘말린 기사와 초인 기사들이 울컥 피를 토했다.

그러나 서로 죽고 죽이는 현장에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렬하고 잔혹하게 충돌하는 두 사람이었다. 핼버드가 맹수의 발톱처럼 허공을 가르면 초인기가 발톱을 뽑고, 초인기가 은밀히 발아래를 노리면 핼버드가 땅을 갈아엎는다. 괴물 같은 모습들이 연이어 벌어지길 얼마일까.

내력을 머금어 면도날 이상의 예기를 품은 핼버드의 도끼날이 브리더 자작의 어깨를 스쳤다.

순간 살이 한 뼘 정도 벌어지더니, 팍하고 피가 솟았다.

“……!”

살을 지지는 듯한 고통.

브리더 자작은 애송이처럼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그 이상으로 어둡다. 자신이 타란 백작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로선 버티는 것이 겨우. 그것도 길게는 끌지 못한다. 타란 백작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두 남작 중 하나와 합공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 남작 둘 다 당장 몸을 뺄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두 단장 역시 그냥 풀어 둘 경우 타란 백작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들이었으니까.

그런 초조한 마음을 타란 백작이 읽은 것일까.

“그대 세 명이 마스에 충성하겠다는 그 말,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소.

“헛소리!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사정을 모르는 기사들이 들으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발언에 브리더 자작이 버럭 소리치며 공격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성급했던가.

브리더 자작은 그 공격에서 비롯된 한 합에 오히려 허벅지와 옆구리에 부상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그야말로 그가 내심 그어 놓은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재정비!”

브리더 자작의 명령에 상대하는 적을 떨친 초인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들이 물러난 곳은 당연히 검후가 감금된 장소로 향하는 길이었다.

“후우~ 결국 답이 나왔군요.”

구른 단장이 다가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초인 기사들 너머 어두운 통로 안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격렬한 전투를 위해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내뿜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구른 단장이 익힌 마스의 내공, 포르테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함정일 수도 있으니, 방심할 수 없는 일이네. 다른 탑에도 기사들을 보내게’

타란 백작은 신중함을 유지했다.

“아직 적들과의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만, 괜찮을까요?”

전투의 시작과 달리, 현재 많은 초인 기사가 쓰러지며 전력은 타란 백작과 기사단을 향해 기울어진 상태다.

그러나 여기서 일부 기사들을 다른 곳으로 돌릴 경우, 기울어진 전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저들이 정말 뒤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면, 우위를 점하던 전황이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타란 백작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듯 핼버드를 옆구리에 끼웠다.

“물론이네. 저들이 어떤 것을 가지고 나와도, 이 핼버드로 부숴 버리면 될 일이야. 그게 아니라도 저들에겐 숨겨 둔 수가 없네. 내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알겠나?”

“그럼 50명을 돌리겠습니다.”

변경백의 장담이다. 구른 단장은 쓸데없는 논쟁을 집어던지고 즉시 기사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타란 백작의 뒤를 따라 적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이제 곧 자신들의 손에 검후가 들어온다.

그런 확신에 가슴이 떨리는 구른 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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