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588화


1024화

내성안에서 구른 단장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면, 내성 밖에선 이드가 그랬다.

“저기란 말이지. 이제 답이 나오는 건가?”

높이 솟은 세 개의 탑. 이드는 그중 자신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을 노려보았다. 성안에서 브리더 자작과 초인 기사들이 막고 있는 탑이었다. 즉, 저곳에 검후가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마침 그 순간, 공간을 넘은 라미아가 나타났다.

이드와 떨어진 순간부터 그의 시야를 중계받고 있던 덕분에 따로 상황 설명은 필요 없었다. 라미아가 이드의 손등에 내려앉으며 물었다.

“가 볼래요?”

“은색 기사단은 모두 왔어?”

“왔죠. 모두 독이 바짝 올라 있어서, 누구든 걸리면 무사하지 못할 분위기더라고요. 지금은 둘로 나뉘어 일리나와 쉴라가 있는 곳으로 이동 중일 거예요.”

“쉴라 경의 지시인가?”

“맞아요. 내성의 소식을 듣고 외성을 수비하던 기사들이 움직일 거라면서, 에린도 맞는 말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대부분의 전력은 내성에 쏠려 있을 테니, 외성에서 움직이는 기사들 정도는 상대하는 데 아무런 문제 없겠지.”

정신이 온통 검후를 향해 있을 법한 상황에서도 정확하고 이성적인 지시를 내리는 쉴라에 이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에 라미아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듯 이드의 볼을 툭툭 두드렸다.

“탑에 갈 거냐고 묻는데, 계속 딴소리는?”

“고민 중이라서 그랬어.”

“아직도요?”

날개를 접은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정했지. 슬쩍 가 보려고.”

원래는 어디선가 눈이 빠지게 기회를 엿보고 있을 랜달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점점 거칠어지는 살기와 진해지는 피 냄새에 생각을 바꿨다.

물론 랜달을 잡는 것도 중요하고, 그를 통해 마지막 남은 영혼의 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검후가 다친다든가, 그녀를 제 눈앞에서 빼앗기는 사태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드가 이렇게 갑자기 마음을 바꾼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검후가 있는 곳이 드러나자, 옛날 젖살 통통하던 꼬꼬마 시절 시르피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고고한 명성으로 대륙 기사들의 우러름을 받는 검후가 아닌, 어린 시르피 말이다.

검후라면 전투 중에 좀 다칠 수도 있지만, 어린 시르피가 다친다고 생각하니 이드의 마음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기억 속 꼬꼬마 시르피는 이미 철혈의 검후가 된 지 오래니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람의 복잡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고, 추억 보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검후로 불리고 존경받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드의 기억 속 시르피는 여전히 아이니까.

어쩌면 그건 쉰 살 자식 출근길에 차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부모와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드와 시르피가 부모 자식 관계는 아니지만, 사제 관계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니 말이다.

“몰래 가서, 발견하면요? 빼 오려고요?”

“그건 아니고.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옛날이야기나 좀 하면서 랜달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긴. 이드가 마탑 전력을 날려 버렸으니, 조금 급하게 움직일 수도 있겠네요. 그럼 가요. 저도 빨리 시르피가 보고 싶으니까.”

그 말과 함께 이드의 어깨로 자리를 옮기려는 라미아였지만, 이드가 막았다.

“미안하지만 혼자 갈게.”

“……아까도 혼자 가 놓고, 또 절 떼어 놓으려고! 미워요!”

비련의 여인처럼 울먹이는 라미아에 이드가 피식 웃고 만다. 작은 새의 모습으로 그래 봤자 귀엽기만 할 뿐인걸 정말 모르는 걸까.

“또는 무슨 또? 장난치지 말고, 일단 랜달이 있으니, 너라도 필요할 때 바로 움직여 줘야지. 우리 쪽에 마법사가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비올라를 보면 이드가 방금 한 말 그대로 전해 줄게요.”

이드는 순간 반짝이는 대머리를 떠올리곤 제 이마를 쳤다.

“워낙 마법사다운 일을 한 기억이 없어서 깜빡했어.”

“차라리 잊고 있었다는 말이 지금 발언보다는 낫겠네요.’

“라미아가 비밀로 해 주면 서로 좋은 거네.”

“그럼 저 따라가도 돼요?”

반갑게 묻는 라미아지만, 이드의 고개는 여전히 좌우로 흔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비올라로는 아무래도 모자라지. 상대가 랜달이잖아. 그보다, 공간 이동은 확실히 막혔지?”

“쳇, 말 돌리기는 공간은 잘 막혔어요. 누가 알려 줬는지 꼼꼼하게 빈틈 하나 없이 완전히!”

입술을 삐죽거리는 라미아지만 대답은 확실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손을 튕겨 라미아를 허공에 날리고는 내성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그럼 시르피 찾아올 테니까, 일 있으면 바로 부르고.”

“불려 오지 않으려고 날 두고 가는 거면서 말만 잘해요.”

뒤에서 쫑알거리는 말에 내심 뜨끔함을 느낀 이드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부운귀령보의 공능을 끌어 올렸다.

이제부터 피와 살이 타는 전장 속의 유령이 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흔들.

허공 속에서 녹아 버린 얼음처럼 사라진 이드. 다음 순간, 그는 기사들이 뛰쳐나온 성벽의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한편, 그렇게 귀신처럼 사라진 이드와 달리 쉐어 가든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꺅!

비켜! 비켜!

와글와글.

성벽에 뚫린 구멍을 본 사람이 늘어나면서 소란이 커지기 시작한 것.

무엇보다 영지민들의 불안을 크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피칠갑을 하고 달려 나온, 검을 든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냥 봐도 놀라 피할 기세의 기사들이, 길을 비우라고 소리를 지르니 정말 큰일이 났구나 싶었던 것.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겁박하던 시간도 길지 못했다.

길을 비우던 사람들의 앞을 쉴라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물러서라! 이 일은 변경백이신 타란 백작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다.

평민이면 감히 기사 앞을 막아서지 못할 텐데, 검을 들고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니 타란 백작의 이름을 댄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싸움을 피하고 싶은 그들과 달리, 쉴라에겐 지금이야말로 벼르고 벼르던 순간이었다.

스르르릉.

쉴라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젠장! 이 미친년이! 진정 타란 백작님의 행사에 끼어들겠단 말이냐!”

“죽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물러서라!”

타란 백작의 이름을 듣고도 검을 들다니. 기사들이 당황해 소리쳤지만, 애초에 마스인도 아닌 쉴라에게 타란 백작은 그다지 신경 써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검후를 빼돌려 이용하려는 자 중 하나이니 오히려 죽여 마땅한 이였다.

“후~ 흡!”

긴 호흡 뒤를 짧은 숨이 단단히 받치는 순간.

피잉!

화살이 공기를 가를 때 나는 소리와 함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뒤를 따른 쉴라가 기사들을 덮쳤고,

“커……!”

투투툭.

반응할 기회를 놓쳐 버린 세 개의 머리가, 두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주인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한발 늦게 잘린 목에서 뿜어지는 붉은 피가 그 주변 기사들의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덕분인가.

조금 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가 목이 터지게 고함을 질렀다.

“・・・・・・ 강자다! 팔인 대형!”

“우리도 싸운다!”

그에 부상자까지 검을 들었다. 쉴라가 엄청난 강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쉴라는 고작 몇 더해진다고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부상자의 투혼을 칭찬했을 그녀의 입에서 최초로 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흥.”

문제는 그게 싸늘한 코웃음이라는 것일까. 쉴라는 기사들이 대형을 만들 시간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난화십이식의 검의 화려한 검로가 위력을 발휘했다.

정교하면서도 쾌속한 검로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차창!

검이 번뜩일 때마다 그녀를 공격하는 검이 길을 잃었다. 다시 한번 번뜩이면 적 기사의 목이 떨어지거나,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뒤! 뒤를 노려!”

섬뜩할 정도의 살검에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검기를 뿌렸다.

특히 혼전 속 튀어나온 누군가의 외침에 실력 좋은 기사들이 쉴라의 등을 노리기 시작했다.

기사로서는 비겁한 짓이지만, 강자를 상대하는 약자로서는 올바른 공격 방법이었다.

다만 그게 통하는 사람이 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기사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일까. 심지어 그들은 그걸 깨달을 기회도 없었다.

푹! 푸푸욱!

“크어…… 누…….”

“적이…… 더…….”

쉴라의 뒤를 노리는 그들의 등을 찌르고 가슴을 튀어나온 검 때문이었다.

쉴라의 뒤를 노리던 기사들은 일곱. 그중 본인 뒤의 검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흥, 적의 등 뒤나 노리는 것들이 기사라고 건들거리기는!”

“그러게요. 감히 누구 등을 노리는 건지 말입니다.”

검이 빠지고 쓰러지는 기사들 뒤로 나타난 것은 스폴을 선두로 한 은색 기사단이었다.

마침 적당하게 부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과 망토가 화려하게 날려 그녀들의 등장은 마치 서사시의 한 장면 같았다.

다만 쉴라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들에겐 그런 화려함은 티끌만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동료들의 죽음도 마찬가지.

그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너무도 유명한, 은의 파츠 아머였다.

“미친…… 은색 기사단이라고?”

“은색 기사단이 어째서 마스에!”

“제국은! 소드 팰러스는 감히 마스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소드 팰러스가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하지만, 그 근본이 제국에 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자연 오색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

그들이 용무를 밝힐 경우 각국에서는 큰 문제 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지만, 기본적인 허락도 없이 갑자기 다른 나라의 땅에 들어와 그 나라의 기사와 싸운다는 것은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에 오히려 싸늘한 비웃음을 돌려주는 스폴이었다.

“지랄들을 해라. 우리가 네놈들의 목적을 모를 것 같아? 저기에 어떤 분이 계신지 우리가 끝까지 모를 것 같았냐고!”

“윽!”

“그래, 말 못 하겠지? 그런 너희들이 과연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걸 문제 삼을 자격이 있을 것 같아?” 한 마디 한 마디에 독을 품었다.

그녀의 독설 앞에 선 기사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검후를 빼돌리기 위해 움직인 만큼, 그들 역시 검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스폴의 말처럼, 사실이 밝혀질 경우 마스의 입장은・・・・・・・

절레절레.

기사들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말없이 검을 들었다.

“흥.”

그 모습에 스폴이 다시 한번 차가운 비웃음을 날려 주고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감히 검후께 무례를 범한 놈들이다. 살려 두지 마!”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번개와 같이 뻗어가는 수십의 검 자루, 마주 검을 들고 있던 기사들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