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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589화


1025화

촤악.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검집에 넣었다.

2분.

은색 기사단의 공격에 적 기사들의 숨이 모두 끊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다.

그것도 도주해 소식을 알리려는 자들 때문에 지체되었기 때문이지, 실제 검을 휘두르고 적을 베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스에서 명성 높은 타란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이지만, 전 대륙에서 손꼽히는 은색 기사단에 비하기엔 실력의 차이가 컸다.

거기에 숫자에서도 두 배 이상 밀렸고, 무엇보다 쉴라와 스폴이 있었으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기사들에게 뒷정리를 맡긴 스폴이 쉴라에게 다가갔다.

“성급하셨습니다. 차라리 저희를 좀 더 일찍 부르시지. 다친 곳은 없죠? 하긴, 이런 멍청이들 상대로 다치는 게 오히려 더 힘든 일이긴 하죠.” 

쉴라는 자문자답하는 스폴과 그녀 뒤로 보이는 기사들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 후작님이 부르신 건가?”

“아니면 저희가 어떻게 왔겠어요? 그나저나 공간 이동은 제 체질이 아닌가 봐요.”

뜬금없이 고개를 흔드는 스폴의 말을 듣고 쉴라의 눈에는 가벼운 의문이 떠올랐다. 공간 이동이 얼마나 편하고 빠른가.

비록 가벼운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심각한 수준도 아니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엉덩이 아플 정도로 말을 달리는 것보다야 천 배 나을텐데.

혹시나 싶은 쉴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에 이상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답답해서요. 하염없이 기다리려니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겨우 허락을 받고 여기 왔을 때 그 기분은 진짜! 단장님은 짐작도 못 하실 거에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 그보다 너희들을 부르셨다는 건, 때가 됐다는 말이겠지?”

“저놈들이 다 어디서 왔겠어요? 듣기로는 성벽을 부수고 진입했다는데, 벌써 부상자에 퇴로 준비를 하는 걸 보면 붙어도 제대로 붙은 것 같아요.” 

스폴이 눈짓으로 기사들이 치우는 시체를 가리키며 하는 말에 쉴라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 우리 차례도 오겠군. 명예 후작님이 따로 명령하신 건 없고?”

“전혀요. 단장님이 다 알아서 하실 거라는 느낌이던데요. 좋으시겠어요. 그만큼 믿어 주신다는 거니까.”

“부러워?”

사실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놀리듯 묻자, 스폴이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는다.

“별로요. 전 단장님과 달리 명예 후작님보다 검후님의 믿음이 더 기분 좋은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후후후.”

“나도 그렇거든. 쭛, 그보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좀 더 내성에 접근할 필요가 있겠어. 그리고 기사 수가 적은데, 나머지는 일리나 님께 간 건가?”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중간에 외성 병력이 움직인다고 해서요. 지금 그쪽을 상대하고 있을 겁니다.”

“일리나 님이 심심하시겠군.”

외성을 한 번 돌아보고는 내성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 쉴라다.

그녀의 말은 물론 표정 어디에도 외성 병력을 상대하는 기사들과 일리나에 대한 걱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나머지 은색 기사단은 대로를 막아 외성에서 나온 병사와 기사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있었다.

처처처척.

길게 늘어서 검으로 땅을 찍고 선 기사들의 모습은 마치 강철의 벽을 연상시켰다.

그 상태로 중앙에 선 산드라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앞으로는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 지나가려는 자, 우리 은색 기사단이 상대해 주겠다.”

오색 기사단의 명성이 전 대륙에 걸쳐 있는데 병사들이라고 은색 기사단을 모를까.

그들은 혹시 자신들이 은색 기사단과 싸워야 하는 것인가 싶어 당혹과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들을 지휘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두에 말을 탄 기사들이라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은색 기사단이 왜 여기서 나와?”

“그건 저도 모르죠. 어쩝니까? 내성이 공격받고 있는데, 여기서 멈춥니까?”

“그렇다고 저들과 싸우자고? 지금 은색 기사단이 누군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기사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일어났다.

그에 가장 선두에 선 벤데나 상급 기사는 초조함에 입술을 씹었다.

검후의 존재는 모든 것이 기밀인 만큼, 외성에 배치된 기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거의 아무것도 모르다시피 했다. 그러니 저런 말이 가능했다. 

‘어떻게든 내성으로 가야 하는데, 은색 기사단이 나타난 걸 보면 검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성을 공격하는 것이 소드 팰러스일 수도 있어. 하지만 고작 이 전력으로 저 은색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마주 경계한 상태로 저 전력이라도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는 것이 좋을까.

사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고민이 깊은 벤데나지만, 그의 무의식은 죽음보단 삶을 원하고 바랐다.

당장 은색 기사단을 보고 멈춰 선 것이 그 증거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서로를 노려보며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여기로는 아무도 오지 않네요.’

살랑살랑.

옷깃을 흔드는 바람을 맞으며 지붕에 선 일리나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치열하게 싸움이 진행되는 내성이나 쉴라, 그리고 외성 전력과 마주한 곳과는 다른 세상인 듯 조용했으니 말이다.

“자리를 옮겨야 할까요.”

오죽하면 일리나가 이런 생각까지 할까.

어떤 일이든 이드와 라미아를 돕고 싶은 그녀는 이번 일에 자신이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을까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괜한 우려였다.

왜냐하면, 그 시각 라미아가 그녀를 향해 열심히 날갯짓하며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스르륵.

바람처럼 부드럽게 성벽을 넘은 이드가 주변을 살폈다.

불타 버린 잡동사니. 어질러진 발자국. 떨어진 무기. 죽은 기사의 시체. 피. 피. 피.

사방이 피였다.

성벽이 녹고, 주변에 있던 소수의 초인 기사들이 침입하는 기사들을 급히 막으려다 죽은 것이다.

이드는 그들을 지나쳐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본 내성은 지구의 백화점을 연상시켰다. 그만큼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큰길은 에린이 수집한 정보를 접해 알고, 무엇보다 현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의 방향 또한 정확히 감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에 따라 이리저리 굽어진 길을 몇 번 지나자 그때부터 사방에 전투의 자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깨지고, 부서진 흔적 말이다.

거기에 낭자한 피와 시체. 치열한 전투에 시체까지 챙길 정신은 없었을 테니까.

그때부터는 그런 흔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당장 가까이에서 폭음과 비명이 귀를 쨍쨍 울리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전투 현장이 나타났다.

그곳은 비좁은 통로였다. 다섯 사람이 나란히 서면 공간이 남지 않을 만한 크기의 통로 말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그 정도면 비좁다고 할 수 없지만, 확실히 수백이나 되는 기사와 초인 기사들이 싸우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러다 보니 싸움의 여파로 인해 벽과 천장이 쉬지 않고 부서졌다. 실로 거칠기 짝이 없는 확장 공사였다.

저러다 전투가 아니라 성의 붕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 봤자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말이야. 그럼 잠깐 실례 좀 합시다.’

마스와 바벨, 쉐어 가든과 타란 백작과 기사단. 어느 쪽이 이기고 지든 큰 관심이 없는 이드였다.

진짜 그의 관심사는 이들의 싸움이 끝날 때쯤에 나타날 테니 말이다.

후방에 있는 부상자들을 지난 이드는 자연스레 벽을 디디고 서더니, 곧 천장을 바닥처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날붙이와 종류도 다양한 여러 초인기가 그물처럼 사방을 날아다녔지만, 그중 어떤 것 하나 우연이라도 이드를 스치고 지나는 것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이드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공격 루트를 모두 꿰뚫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비교하자면 백만 대군이 일제히 쏘아 낸 화살 속에서도 유유자적 활로를 찾을 정도의 능력이라고 할까.

스르륵.

전장을 건넌 이드가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 뒤로 쉐어 가든의 초인 기사들이 온갖 힘을 다해 적을 막아서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들이 이드의 존재를 알았다면 허탈함에 공격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물샐틈없이 막고 있다고 여겼는데, 너무도 쉽게 그 방어선을 뚫고 넘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알릴 이유가 없는 이드다.

이드는 빠르게 안으로 진입했다. 혹시 숨겨진 트랩이나 마법이 있을까 기감을 활짝 열었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성의 방어력을 믿은 건가, 쉐어 가든의 전력을 믿은 건가.’

허술해 보이기까지 한 방비에 고개가 갸웃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초인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 길을 막는 것일지도 모를 일.

통로를 지난 이드 앞에 나온 것은 계단이었다. 그것도 층이 엄청나게 많은.

이드는 탑 안쪽 벽을 따라 위로 쭉 이어진 계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모습을 보니 검후는 저 꼭대기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식사를 책임진 사람들은 매일 이 계단을 세 번 이상은 오르내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허벅지 대박이겠는데.”

누군가의 허벅지에 애도를 표한 이드는 바닥을 차며 어기충소를 통해 수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탑의 높이가 높아 중간에 추진력이 다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공기를 차올리며 몸을 뽑아 올린 덕에 금방 꼭대기에 닿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향해 두 눈을 치켜뜨고 있는 다섯의 초인 기사들이었다.

퓨퓸.

“……!”

하지만 이드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던 상태.

그의 손에서 기다렸다는 듯 하얀 지력이 뿜어졌고, 이마에 구멍이 뚫린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썩은 고목처럼 넘어졌다.

그제야 바닥에 발을 디딘 이드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통로에 함정이 없는 건 그렇다고 해도, 여기에도 아무런 준비가 없단 말이지?”

물론 초인 기사 다섯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침입을 대비해 은밀히 준비하는 함정과는 아무래도 그 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뭔가 꾸며진 듯한 허술함에 이드는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이미 아무것도 없다고 검색을 마친 기감을 뒤집을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드는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철문 앞에 섰다.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방 안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다. 예민한 기감도 안쪽의 상황을 읽어내긴 어려웠다.

확실한 것은, 탑 꼭대기에서 이 방을 둘러싸고 있는 게 단순한 돌은 아니라는 정도일까.

어찌 됐든 이 안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철문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철문이나 벽에 구멍을 내거나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생겼단 말씀이야.”

이드는 철문에 손을 대고 열심히 단련 중인 초인기를 깨웠다.

혹시 구멍을 뚫거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안에 누군가 검후의 목에 칼이라도 대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초인기를 사용하면 문에 구멍을 뚫지 않아도 안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부단한 노력과 단련 끝에 얻은 성과였다.

무공과는 다른 초인기를 다루고 단련하는 일은 이드에게는 새로운 재미였다.

눈을 살짝 내려 감은 이드, 곧 그의 시야가 뿌옇게 변하더니, 서서히 밝아졌다. 그와 함께 방 안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리는 것 없이 휑한 공간. 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오우거만 한 크기의 구조물.

그리고 구조물에서 뿜어진 빛이 사방의 벽과 문으로 이어진 모습.

“이야…… 통수 때릴 준비를 아주 제대로 했는데?!”

이드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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