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591화


1027화

타박타박.

계단을 밟아 오른 이드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도 않았다. 어차피 저 문 안에 있는 두 명을 제외하고는 탑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드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세 명의 초인 기사였다. 그러나 이미 뇌가 부서진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빛도 남아 있지 않았다.

터터터텅.

마침 힘이 다한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힘들게 단련한 덕분에 이제야 손의 근육에 힘이 풀린 모양이다. 그러나 무기를 떨군 것과 달리 그들 세 사람은 쓰러지지 않았다. 당연히 살아 있기 때문은 아니다. 머리를 관통당한 상태로 살아 있다면 그야말로 초인을 넘은 불사신이겠지.

그들이 쓰러지지 못하는 이유는 강철의 침이 여전히 그들의 머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이드가 의도한 일이었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살핀 후 침을 거두었다. 그러자 세 명은 곧 줄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드는 허공섭물로 그들을 한 곳으로 모으며 아쉬워했다.

“역시 어설프네. 너무 거칠어,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다듬어야 할 게 한 둘이 아니고. 고생깨나 하겠네.”

단번에 세 명의 초인 기사를 쓰러트린 수법이 어설프고 거칠다니. 세 명의 영혼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억울해 가슴을 칠 일이었다. 그들은 당하고 나서야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또 높이 오른 만큼 넓게 볼 수 있는 법. 이런 작은 곳에서부터 각자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실제로 이드는 세 명의 상처 부위가 깨끗하지 않은 것과 머리를 관통하고 있는 위치와 방향에서 문제점을 다수 발견한 상태였다.

당장 오차를 수정할 방법은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에 불과할 뿐, 시간을 두고 기본을 다지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기에 서두르려는 마음은 한쪽으로 접어 두었다.

대충 정리를 마친 후 문 앞에 선 이드가 기감을 통해 내부를 살폈다.

다행히 아래층 방과 마찬가지로 기감을 막는 조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렴 이드의 기감까지 막아 내는 방법이 그렇게 쉽게 턱턱 튀어나올 수는 없겠지.

“쯧.”

하지만 내부에 좋지 않은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이드가 혀를 차며 거칠게 문을 밀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방의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서 검후는 이드가 처음 확인한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문제라면 함께 있던 초인 기사다. 검후의 어깨 너머로 눈만 빼꼼히 내놓은 그는, 양손에 든 단검을 검후의 목과 몸 뒤쪽에 대고 있었다.

특히 등을 위협하는 단검은 심장의 바로 뒤에 위치해, 조금만 밀어 넣어도 바로 심장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만큼 절묘했다.

이드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소리도 차단했는데, 내가 올 걸 어떻게 알았지?”

분명 초인기를 통해 살필 때만 해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거기에 혹시나 이런 일이 발생할까 싶어 소리도 차단했었다.

“이곳에서 나가라. 허튼짓을 할 경우 검후의 목숨은 없다.”

“검후는 그쪽에서도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나?”

“……”

이드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입을 닫은 초인 기사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검후를 살폈다. 그녀는 목과 등에 칼이 대어진 상황임에도 남의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드를 보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빤히 쳐다보았다. 덕분에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놀랍구나.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분을 닮았어.”

검후가 경탄하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검이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데,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그녀의 목숨으로 협박 중인 초인 기사가 흠칫 놀라 살짝 검을 떼어 놓는다. 하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이미 그에게 관심이 없다. 

“누굴 닮았다고?”

“그대의 조부, 마인드 마스터. 이드 님을 말하는 것이라네. 이드 님의 후예가 나타났다는 말에 또 거짓이거나 가짜일 거라 여겼는데, 그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의심이 사라졌네.”

오래전 추억이 떠오른 것일까. 과거에 잠긴 듯 말을 이어 가는 검후의 눈에 아련한 그리움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그 순간들은 힘들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에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굉장하네. 오래전 일인데 그걸 아직 기억하고 있다니.”

“황궁에서만 살아오던 여자아이에겐 굉장한 사건이었다네. 무공을 배우는 것도 힘들었고.”

그렇게 힘들게 가르친 기억이 없던 이드의 고개가 갸웃했다.

“그렇게 고생시킨 기억은 없는데?”

“이드 님이 말해 주신 모양이군. 그래, 사실은 즐거웠지. 그래서 가끔 그때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꺼내 보기도 해. 자넬 보고 놀란 것도 그 때문이지. 덕분에 남편 얼굴보다 이드 님의 얼굴이 더 선명하다네. 호호호호.”

비밀을 들려주듯 조용히 말을 꺼낸 검후가 이윽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저런. 남편에게 미안해지는걸.’

“이드 님이라면 몰라도, 자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네.”

살랑살랑 손을 젓는 검후다. 정말이지 옛날이야기에 푹 빠진 모습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드가 태연히 반말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상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초인 기사가 움직였다.

“거기까지. 그 이상 수다를 떨고 싶으면 말해라. 죽은 후에 원 없이 수다를 떨게 해 줄 테니까. 뿌득.”

초인 기사가 이를 갈았다. 문득 자신을 두고 태평하게 수다를 떠는 두 사람에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난 것이다.

“그리고 당신, 정말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가? 설마 마스가 이번 일이 마탑뿐 아니라 제국과도 손을 잡은 것인가!”

마스의 전력만 해도 버거운 상태에 제국까지 더해지면 정말 끝장이다. 그런 생각에 검을 쥔 손에 자동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주르륵.

그에 검에 베인 검후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그 모습에 이드가 혀를 차며 다가갔다.

“저런. 조심해야지. 피가 나잖아.”

“멈춰! 정말 검후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그럴 리가. 난 그저 피가 나서 닦아 주려는 것뿐이라고.”

그와 함께 보란 듯 손수건을 꺼내 흔드는 이드다.

엉뚱하다 못해 초인 기사를 농락까지 하는 모습에 검후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어 버렸다. 감금된 후에 웃을 일이 없었는데, 이 잠깐 사이에 몇 번이나 웃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초인 기사의 심정은 최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검후를 빼앗길 만한 상황이면 차라리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입장이다. 한데 쉐어 가든을 공격한 타란 백작이나 기사단은 오지 않고, 뜬금없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났다. 이대로면 그에게 검후를 빼앗길 판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혼란에 갈등하던 초인 기사는 곧 이를 악물었다. 기사인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군인 브리더 자작의 명령. 그는 검후를 빼앗길 바에는 죽이라고 명령하지 않았던가. 상대는 상관이 없다.

대륙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남을 것인가. 초인 기사는 문득 떠오른 생각과 함께 검후의 등에 대고 있던 검을 그대로 찔러 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꿈틀.

“헛?”

하지만 단검은 손톱만큼도 움직이지 않았고, 초인 기사는 순식간에 등허리를 적시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와 함께 더욱 힘을 주었지만, 단검은 여전히 꼼짝도 않는다. 뿐인가, 단검뿐 아니라 그의 전신이 밧줄에 묶인 듯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패럴라이즈?”

순간 떠오른 것은 마비 마법이다. 어떻게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패럴라이즈는 아티팩트를 통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던가.

“고작 이따위 마법으로……………..”

초인 기사는 이드를 노려보며 그의 초인기 브로큰록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전신이 창백해지는 동시에 근육이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초인기 브로큰록은 드물게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위와 같은 단단한 방어력과 함께 거대한 바위를 뽑아 던질 수 있는 괴력을 사용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힘이면 패럴라이즈 마법 따위는 단번에 파괴할 수 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마법으로・・・・・・ 나를. •끄으윽! 어째서 풀리지 않는거냐!!!”

발악하듯 소리치는 초인 기사다. 얼마나 힘을 쓰는 것인지 그의 몸은 이미 두 배나 부풀었고, 힘줄과 핏줄이 불거져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기에 온몸마저 와들와들 떨릴 정도였지만, 그는 여전히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움직이지 못하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단 한 가지, 그 원인이 이드에 있음을 안 초인 기사가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러다 눈알 터지겠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이는 초인기가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 노려보지.”

초인 기사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린 이드가 어느새 검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거침없는 손길로 단검을 잡아 빼서는 던져 버렸다. 초인 기사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악을 썼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푹!

방 밖으로 날아간 단검이 외벽에 깊숙이 박혔다.

곧이어 이드가 손수건으로 상처 난 검후의 목을 닦으며 손을 밀었고, 그에 따라 초인 기사가 뒤로 밀려났다.

자연히 검후의 등에 닿아 있던 단검도 함께 떨어지자 초인 기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

“으아악! 이럴 순, 이럴 순 없다! 주군의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야 한단 말이다!”

“그건 댁 사정이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한 이드가 품에서 포션을 꺼내 검후의 상처에 살살 발랐다.

완전한 무시에 초인 기사는 입술을 씹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동시에 초인 기사의 브로큰록이 초인력을 바닥까지 긁어모으며 힘을 쓰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내부에서 뻗어 나오는 강력한 힘. 그러나 그 힘이 무언가에 막혀 발산되지 못하자 뼈와 근육이 뒤틀리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당연히 소리만 끔찍한 것이 아니었다.

제힘을 이기지 못한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꼬이다 못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피부를 뚫고 터져 버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초인 기사를 바라보는 이드다.

“근성은 좋지만, 살고 싶다면 적당히 포기해라. 초인 기사.”

“저 모습…… 자네 내력으로 제압하고 있는 것인가?”

치료받는 동안 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검후가 고개를 돌려 초인 기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믿기 힘든 듯 물었다.

마법이 아닌 내력으로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가성비가 나쁜 방법이다.

차라리 점혈을 하는 것이 백배 쉽고 효율적이라고 할까. 내력만으로 움직임을 제약하기 위해서는 우선 허공섭물에 능숙해야 하고, 제압하고 하는 상대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내력이 받쳐 줘야 하며, 내력의 섬세한 컨트롤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능력이 있어도 보통은 사용하지 않는다.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 이런 의미 없는 힘자랑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피를 본 때문에 좀 화가 나서 말이야. 쓸데없는 힘자랑을 좀 했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인드 마스터의 핏줄은 모두 괴물 같군. 그나저나 자네,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인가?”

“너・・・・・・ 의외로 눈치가 없구나?”

“……무슨 소리지?”

뜬금없는 매도에 눈꼬리를 꿈틀거리는 검후. 그에 진한 미소로 답하는 이드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