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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03화


1039화

환호를 받아 주던 이드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기사들의 표정이 유독 밝았던 것이다. 눈은 생기 넘치게 반짝였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듯했다.

은색 기사단이 분노하는 모습도, 즐거워하는 모습도, 슬퍼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는 이드다. 하지만 지금처럼 구김 없이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그렇게 애타게 찾고 찾던 검후를 만나서 행복하다, 이거지.’

지금도 봐라. 희희낙락하는 중에도 검후를 보호하는 위치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고 있지 않나.

라미아와 일리나가 그런 기사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잘했어요. 이드가 이길 줄 알았다니까요!”

“전 몇 번이나 가슴이 철렁해서 고생했어요. 어디 다친 곳은 없죠?”

두 사람은 이리저리 이드의 몸을 확인하며 수선을 떨었다.

“그나저나 꼴이 엉망이네요.”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처럼 전투를 마친 이드의 모습은 거지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잘한 상처에서 비롯된 핏자국도 그렇지만, 특히 여기저기 뜯기고 구멍 난 옷은 진짜 거지에게 줘도 입지 않을 정도로 상해 있었다.

“여기선 갈아입을 수 없으니 우선 간단히 로브라도 걸치는 게 어떨까요? 라미아, 로브 있죠?”

“쌓였죠.”

이드의 어깨에 겨우 걸쳐 있는 겉옷을 벗겨 낸 일리나의 말에 당장 이드 전용의 로브를 꺼내 둘러 주는 라미아다.

그 후 세 사람은 기사들이 터 준 길을 지나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안에 있던 검후와 쉴라 일행이 이드에게 수고의 말을 건넸다. 다만 상상 속 그림을 꺼내 놓은 것 같은 전투에 환호하는 기사들과 달리, 그들의 모습은 차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들은 그 힘이 가지는 영향력과, 자신들이 그 힘을 마주할 때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 단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던 것이다. 이드야 자신들과 싸울 일이 없지만, 그 상대, 혼돈의 파편은 달랐다. 듣기는 했지만, 설마 세상 어디에 저런 존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던가. 정신의 관에서 보았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던 반면, 싸움의 한 중간에서 경험한 지금은 피부로 느끼는 감도가 천지 차이였다.

하지만 이런 점은 딱히 이드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또 남은 혼돈의 파편을 생각하면 이런 경계 태세는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하다.

눈을 돌린 이드의 눈에 흙더미로 변한 가시 언덕이 들어왔다.

메르시오가 죽었으니 무너지는 건 당연하다. 다만, 흙더미 아래 구겨져 있는 고깃덩이엔 고개가 갸웃했다.

팔다리가 으깨지고 잘린 데다, 옆구리도 터져 있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말 그대로 반 시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은색 기사단이 당장 검후 옆에서 치우지 않고 있을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까?

“……이거 혹시 랜달이야?”

확인차 이드가 묻자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콘티에롬의 공간 이동을 못 막았잖아요.”

“봤어.”

같이 본 메르시오가 의미심장한 개소리를 남긴 것 때문에 기분 찝찝하기도 했더랬지.

“대신 메르시오를 잡았잖아. 그럼 된 거지. 그런데 랜달은 어떻게 잡은 거야? 꼴은 또 왜 이래?”

“아무래도 콘티에롬의 공간 이동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럼 하나라도 남기자 싶어서 좀 무리를 했죠. 이미 그 방식에 대한 해석은 끝난 참이라, 유일하게 손댈 수 있는 광자 변환 단계에서 강제로 빼냈어요. 지금 모습은 그 여파를 정면으로 감당한 탓이고요.”

“상태를 보면 죽을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 호흡도 불규칙하고, 내부의 마나도 진탕이 된 듯 보였다.

하지만 라미아는 태연했다.

“일부러 일정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만 했어요. 여기서 상처가 더 나아 봤자 도망갈 궁리밖에 더 하겠어요?”

“그렇긴 하지.”

틀리지 않은 말에 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 점혈을 해 둔 중에도 도주를 시도한 전적이 있으니, 굳이 고쳐 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랜달의 일을 완전히 라미아에게 맡겨 버린 이드가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그럼 여기서의 일은 이제 끝난 것 같으니, 나머지는 안전한 저택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마저 이야기하도록 할까요? 아무래도 더 있다가는 괜히 시끄러워질 것 같고.”

그 말에 주변을 경계 중이던 은색 기사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건물들만 봐도 멀쩡한 상태를 찾기가 더 힘들었다. 쉐어 가든 전체로 봐도 삼분의 일이 완파에, 반파 이상이 나머지 삼분의 이다. 특히 내성의 붕괴는 문제가 크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근본적인 부분까지 따지고 들면 복잡하지만, 어쨌든 직접적으로 쉐어 가든을 이 지경으로 무너트린 장본인 중 하나가 바로 이드였으니, 떠나고 싶은 것도 당연한 것.

“그런데 이대로 빠져나가도 정말 괜찮을까요?”

스폴이 평소답지 않은 얼굴로 걱정을 했다.

그에 이드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그런 걱정을 하냐’는 눈으로 바라보자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저도 정도를 안다고요. 피해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자칫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거 아닐까 싶어서 해 본 말입니다.”

“누가 뭐랬나? 그리고 전쟁이 왜 나? 아무나 잡고 물어봐. 쉐어 가든을 뚜드려 부순 게 누군지. 백이면 백 커다란 늑대라고 할걸?”

신랑 형태로 변한 메르시오라면 민간인들이 쉐어 가든을 벗어난 후 멀리서 돌아봤어도 선명했을 거다.

“그래도 저희 은색 기사단과 대치했던 기사나 병사들도 있는데요. 마스에서 그렇게 쉽게 넘어가려 할까요?”

“당연히 넘어가야지. 은색 기사단의 방문 사실을 밝히려면 그 이유가 되는 검후의 존재도 밝혀야 하는데. 그걸 밝힐 거야, 어쩔 거야?”

아무리 검후의 감금 문제가 마스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되겠는가.

“무엇보다 은색 기사단에 주목하기엔 메르시오가 너무 화려하게 날뛰었잖아. 아마 마스도 골치 아픈 문제를 꺼내기보단 그냥 메르시오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조용히 묻고 싶을걸.’

그러지 않고 은색 기사단을 걸고넘어질 경우,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검후에 대한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 대륙의 기사들이 가만히 넘기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나도 이드 님의 말씀에 동감이다. 마스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거야.”

쉴라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사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전쟁으로 이어지면 또 어떤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검후를 감금하고 있던 것은 바벨이지만, 마스에서도 검후를 빼앗아 바벨과 똑같은 짓을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비록 미수라도 죄는 죄이니까. 쉴라에겐 바벨이나 마스나 똑같이 나쁜 놈들이었다.

“그럼 이동은 라미아가 수고해 주고, 랜달은.’

“저희가 옮기겠습니다.’

이드가 이동을 결정하자 수 명의 기사들이 망토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곤 거기로 랜달을 옮긴 다음, 그 위로 다시 망토를 덮어 랜달을 가렸다. 이드와 일행은 라미아가 준비해 둔 마법진을 이용해 저택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철수였다.

차원진의 영향도 있는 상태에………… 이래서야 은색 기사단을 봤다고 해도 이동 사실을 증명하지 못해서 흐지부지될 판이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얼마 후.

후두두둑.

기침 소리와 함께 건물의 잔해를 헤치고 기어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타란 기사단과 수도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폐허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쉐어 가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중에는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빠져나온 타란 백작도 있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흙투성이 땅에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아 버렸다.

“도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하면 좋다는 말인가……………”

쉐어 가든과 기사단을 이 꼴로 만든 이드와 메르시오의 전투. 눈을 감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릴 정도로 기억에 선명하니 설명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그러나 과연 상부에서 자신의 말을 믿어 줄지, 또 믿어 준다면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될지,

당장 살아난 것은 다행이지만, 이후의 사태를 떠올리니 그저 눈앞이 캄캄한 타란 백작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이드가 가장 먼저 챙긴 것은 검은 돌이었다.

성안에 있던 검은 돌의 요원은 기사들과 함께 이동해 왔지만, 아직 쉐어 가든 외곽에 흩어진 요원들이 있었다.

이드는 그들을 빠르게 복귀시킬 것을 명령했다.

당분간 쉐어 가든 주변엔 마스의 관심이 집중될 것인데, 괜히 마스의 의심을 받거나 잡혀 고생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직접 싸운 사람도, 싸우지 않은 사람도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후 이드도 샤워를 하고 새 옷을 입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일리나가 곁에서 도왔다.

욕실에 함께 들어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씻겨 주고, 크고 작은 상처에 포션을 발라 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피로와 상처를 돌보는 사이, 유일하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랜달이었다.

그는 저택에 도착하고서 비올라에게 넘겨졌다. 바이트 타블렛의 연구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 방에서 나올 것 같지 않던 비올라가, 랜달을 생포했다는 말에 맨발로 달려 나온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랜달을 내려다보는 비올라의 표정이라니.

마치 개미들을 내려다보는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과연 그런 비올라에게 랜달을 넘겨도 좋을까 싶었지만, 절대 목숨이 끊어지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맹세까지 했으니 넘겨주지 않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에 비올라가 광소를 터트리며 랜달을 지하실로 끌고 갔고, 지금까지 열심히 랜달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물론 그사이 쉬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전투에 뛰어들지 않은 에린의 경우, 철수하는 요원들을 통해 쉐어 가든과 주변 영지의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은색 기사단 역시 길게 휴식하지 않았다.

별도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개인 정비를 마친 그녀들은 각자 조를 짜 검후의 시중을 들거나, 그녀의 방을 지켰다.

이드가 검후를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복도는 물론, 검후의 방 앞에도 간편한 복장을 한 은색 기사단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이드는 그녀들에게 왜 쉬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지금 이 순간이 육체의 휴식보다 정신적으로 더 편한 시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은색 기사단이 열어 주는 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방의 주인인 검후는 물론이고, 쉴라와 스폴을 비롯한 상급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특히 검후는 민망하던 복장 대신 기품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서 좋은 옷을 구한 모양입니다?”

“아니요. 항시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쉴라가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듯 뿌듯한 감정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 모든 것이 이드 님 덕분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같이 노력한 거죠.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그나저나, 황궁에는 소식을 알렸습니까?”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마스의 땅에 있어 조심스럽기도 하고, 과연 황제 폐하께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조심스러우니까요. 황녀께는 당연히 알려 드리고 싶지만, 참는 중입니다.”

“하긴, 황녀라면 당장 달려오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네요.”

모르긴 몰라도, 검후의 복귀에 세상 누구보다 기뻐할 사람이 바로 황녀가 아닐까.

쉴라와 대화를 마친 이드가 검후 앞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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