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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27화


1062화

검후가 서늘한 눈을 하고서 라울을 노려본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초라한 모습이 아닌, 힘과 위엄을 되찾은 검후의 눈길에는 라울도 내심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소드 팰러스의 힘을 깎는다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군.”

“아하하. 오해가 있을까 말씀드리지만, 검후님의 소드 팰러스가 아닌 삼검왕의 소드 팰러스를 말하는 겁니다.’

“훗,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검후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라울이 듣기 좋게 검후와 삼검왕의 소드 팰러스로 나누어 부르고는 있지만, 그래 봤자 그 알맹이는 하나다.

그럼에도 라울은 손까지 흔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검후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려는 겁니다. 삼검왕의 죄는 저희 이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내 손으로 직접 그 죄를 물어야겠지.”

“누구나 그러고자 할 것입니다. 특히 검후님처럼 힘이 있으시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망설이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제국와 소드 팰러스 때문에 말입니다.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그 부담을 줄여 드리겠습니다.”

마치 상인의 그것처럼 매끄러운 말솜씨에 서늘하던 검후의 눈초리가 서서히 풀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라울이 정확히 그녀가 고민하는 부분을 짚어냈기 때문이다.

현재 복귀를 앞둔 검후는 근심이 많았다.

소드 팰러스도 소드 팰러스지만 그녀가 가장 크게 걱정하는 건 그녀의 조국, 아나크렌 제국이었다.

그레센 대륙의 패자나 다름없는 제국이 무슨 걱정이냐,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후의 문제는 그런 제국에도 큰 타격을 줄 만큼 대형 사건이었다.

현재 아나크렌 제국의 가장 큰 힘이라면 첫째가 기사들이고, 둘째가 초인이었다.

소드 팰러스를 찾았다가 그대로 제국에 자리 잡는 인재가 많은 탓이었다. 그들 중에는 초인 역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구도는 검후가 복귀하는 순간 깨어진다.

삼검왕은 배신자, 역적이 되어 목이 떨어질 게 틀림없었고, 기사의 성지였던 소드 팰러스 역시 덩달아 오명을 뒤집어쓸 것이다.

그런 추문을 피해 소드 팰러스를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 무엇보다 소드 팰러스와 제국이 쌓은 명성이 흔들리는 것 자체로 제국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같은 이유로 초인에 대한 인식과 입지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전 대륙에 걸쳐 존경받는 검후에 대한 납치와 감금에 가담했으니 말이다.

물론 직접 가담한 건 바벨이다.

그런 만큼 꼭 제국에 소속된 초인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여타 국가들에서는 그저 시끄러운 소문, 스캔들로 끝나고 말 일이다.

그러나 검후를 황실의 어른으로 두고 있는 제국은 이를 단순한 스캔들로 넘길 수 없다.

크든 작든 모종의 조치가 있어야 하고, 그건 결국 제국이 스스로의 살을 잘라 내는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결과적으로 짧은 시간에 제국의 전력이 크게 꺾이게 된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손실이 아니니, 빠르게 회복이 될 것이다. 특히 소드 팰러스의 경우 검후가 있으니 원래 모습을 찾는 건 더욱 쉬울 수도 있다. 문제는 다른 나라들이 제국이 스스로 넘어진 이 절호의 기회를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검후는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제국의 입장만 보자면 검후 납치 사건을 묻고 지나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국의 입장이 그렇더라도, 황실에선 그냥 묻고 넘어갈 수 없었다.

제국의 지배자로서 황족에 대한 배신행위를 벌하지 않고 넘긴다는 것은 곧 제이, 제 삼의 역모를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딱히 아나크렌이 대륙 제일의 강대국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검후는 자신으로 인해 제국이 꺾이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한데 이 근심을 라울이 덜어 줄 수 있다고?

“어떻게 말인가?”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군요. 개구리는 뜨거운 물에 넣으면 놀라서 뛰쳐나오지만, 천천히 물의 온도를 높이면 자기가 익는 줄도 모른 채 삶아집니다. 이처럼 존 워스의 사건으로 소드 팰러스를 성지에서 세속으로 끌어 내린다면, 이후 검후님의 사건이 터져도 실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검후님까지 빠르게 복귀하신다면 소드 팰러스나 제국이 받는 충격도 많이 줄어들겠지요.”

“그런데 그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는 잘못된 거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크흠. 제가 직접 개구리를 삶아 본 건 아니라서………….”

슬쩍 끼어든 이드의 말에 주변의 시선이 차가워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라울이다.

거짓 정보가 섞인 사실과는 달리 검후는 라울의 의견을 마음에 들어 했다. 하지만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좋아. 그대의 의견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과연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소드 팰러스가 아닌, 초인이 아니던가?”

“하하하.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존 워스에 대한 문제가 잘 풀리면 그 시간 동안 검후님과 차분히 논의하려 했습니다. 최대한 저희에게 영향이 없는 쪽으로 말입니다.”

라울은 존 워스로 벌어 놓은 시간을 절대 그냥 흘리지 않을 것임을 대놓고 말했다.

즉, 과격한 수단이 아닌 정치적인 거래를 원한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검후는 가벼운 코웃음을 치며 라울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는 좀 더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 부분은 두고 보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 내가 눈감을 이유로는 아직 부족한데.”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라울 역시 조금 더 편한 얼굴을 되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원하면 어떤 것이라도 준비해 보이겠다는 듯 말이다.

그 상태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검후와 라울의 입가에 비슷한 느낌의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보면 남매라고 할 것 같은 모습에 이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자고로 정치로 일 복잡하게 만드는 것들은 정상이 아니라니깐.’

이런 걸 보면 문파 간에, 또는 정사 간에 일어나는 무림의 사건은 차라리 단순해 보일 지경이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일단 그 규모에서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협상이 어딨어?’

이드가 아는 무림의 협상이란 테이블을 사이에 둔 결투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떤가.

이미 서로 조건을 들어주고, 또 들어줄 것을 짐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협상이야말로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미 눈에 빤히 상황에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검후는 노련했다.

“그대들의 죄는…….”

“삼검왕 측에서 먼저…….”

“쉐어 가든의…”

“제국의 권위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라울을 압박했다. 그녀는 특히 피해자라는 입장을 잔인할 정도로 이용해 라울의 손을 들게 만들었다.

“좋습니다. 그럼 조금 더 내놓도록 하지요. 우선 제가 드릴 것은 정보입니다.”

그는 말과 함께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기사 중 하나가 종이를 받아 들어 이상이 없는지 먼저 펼쳐보고는 검후에게 건넸다.

“마스 왕국 블레인 자작령?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린 검후가 설명을 요구하자 라울이 이드와 쉴라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사실 해당 정보는 검후님보다는 아나크렌 제국, 그리고 여기 계시는 명예 후작님과 쉴라 단장님께 더 필요한 정보입니다. 현재 토벌이 완료된 정신의 관에 이은 미완의 마탑의 정수가 모여 있는 영혼의 관의 위치니까요.”

“이곳에…….”

설마 영혼의 관의 위치를 협상 테이블에 올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던 이드는 검후의 손에 들린 종이에 적힌 지명을 머리에 담았다. 미완의 마탑 그 자체는 이드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하나 혼돈의 파편이 미완의 마탑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귀한 정보였다.

특히 사로잡은 랜달에게서 딱히 쓸 만한 정보를 얻어 내고 있지 못한 현 상황에선 더욱더 그렇다.

그와 같은 모습을 확인한 라울은 득의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정보라면 충격이 많이 약해진 소드 팰러스의 스캔들을 일찍 덮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존 워스로 뜸을 뜨고 검후가 나서서 소드 팰러스를 수습한 후 영혼의 관에 대한 토벌이 이어지면, 그때는 이미 소드 팰러스에 대한 사건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소리다.

특히 만에 하나 마스가 미완의 마탑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일 경우 토벌은 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인데, 이럴 경우 어지간한 문제는 모두 뒷전이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라울은 내심 전쟁이 벌어질 수 있도록 유도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협상을 통해 검후와 바벨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검후로 인해 그 위치가 흔들린 초인파를, 이 전쟁 중에 공을 세우게 해서 흔들린 입지를 다시 회복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누군가 그 속을 알았다면 악마라고 했을지 모른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저 제국 내 초인파의 세력 유지를 위해 수십만이 죽어 나갈 전쟁을 일으키려 한 것이니 말이다.

한편, 이런 라울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걸음 뒤에 있던 발터와 시사이판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야 이, 사기꾼 놈아!’

귀한 정보는 개뿔.

그들이 알기로 이 정보는 검후가 만나 주지 않는다면 그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한 선물로 쓰려고 했던 수였다.

그런 걸 지금 와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다만 발터는 그래도 라울의 생각 일부를 추리하고는 있었다.

물론 그 방향은 달랐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완의 마탑이었다.

미완의 마탑이 소드 팰러스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가 확실하게 두 눈으로 본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바벨에서는 미완의 마탑을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미완의 마탑은 그간 지원을 받으며 초인에 대한 연구를 쌓아 왔다.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다면 바벨과 모든 초인에게 위협이 될 것이 뻔했다.

‘거기에 혼돈의 파편이라는 예측 불가의 변수도 붙었고.’

어쩌면 라울이 미완의 마탑을 버린 이유로는 이것이 가장 클지도 모르겠다고 발터는 생각했다.

좌우간 그런 미완의 마탑을 거래의 조건으로 내놓는다면 손대지 않고 위험 요소 하나를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명예 후작님과 쉴라 단장이 보긴 어떤가요?”

검후가 종이를 넘기며 물었다.

“사실이라면 가치 있는 정보입니다.”

이드와 쉴라가 동시에 말했다.

특히 이드는 종이를 쉴라에게 넘기고는 검후 옆으로 다가섰다.

“검후께서 허락하신다면 제자 저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미 그러기로 한 부분이기 때문에 검후는 쉽게 허락했다.

“그러도록 하세요. 그리고 라울이여. 그대는 명예 후작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라. 이것은 내 요구 중 하나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자, 명예 후작님께선 어떤 것이 궁금하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드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던 라울이 이드를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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