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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39화


1074화

다시 말하지만 황녀는 결코 나약한 레이디가 아니다.

은색 기사단과 더불어 검후에게 무공을 배워, 검기까지 뿜을 수 있는 소드 마스터다. 거기에 토벌대에서 활약하며 혹독한 실전도 경험했다.

황족의 경우 재능이 있어도 위험한 실전을 경험할 기회가 없어 온실 속 화초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황녀는 그런 것도 아니다. 내공을 운용한 전투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전광석화로, 1초 사이에 수차례 시야가 변하고 뒤집히는 건 익숙하다.

‘꺄아아아악!’

분명 익숙했었다.

그런데 왜 비명이 나오는 걸까.

변명을 해 보자면 우선 속도감이 너무 달랐다. 땅을 향할 땐 추락하는 것 같고, 앞으로 향할 땐 매번 벽에 충돌할 것 같았다. 또 허공에서 회전하면 온 세상이 한데 뒤엉키는 것 같다.

순간순간 눈앞이 아찔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이것에 비하면 자신의 움직임은 거북이다. 아니, 지렁이다.

그 압도적인 차이에 아무리 참으려 해도 오금이 저리고 비명이 저절로 올라온다. 이에 황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드가 알았다면 상관없다고 했을 것이다. 이미 통제권을 잡은 시점에서 그녀를 철저히 외부와 단절시킨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척은 물론 중력까지.

그런데 겨우 비명이 주변을 시끄럽게 한다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이드는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황녀는 턱이 얼얼할 정도로 이를 악물 뿐이다.

지금 비명을 질렀다가는 저 무도한 침입자들은 물론, 황궁을 지키는 경비들까지 부르게 된다.

스스로 부탁해서 따라와 놓고 그런 실수를 했다가는 죽고 싶을 것 같았다.

한데 이를 어쩌나. 피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기는 것 같다.

또다시 눈앞이 아찔해지는 경험을 하는 순간, 비명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감이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우…… 우욱?! ・・・・・・이, 이것만은 절대 안 돼!’

텁!

그게 어떤 신호인지를 깨달은 황녀는 사색이 되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입 밖으로 내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말이다.


결국 이드도 황녀의 이상한 기색을 알아챘다.

“괜찮으십니까?”

끄덕끄덕.

하지만 저렇게 엄지손가락까지 들어 보이며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이드는 별거 아니겠거니 생각하곤 다시 침입자들에게 신경을 쏟았다.

눈에 들어오는 자들의 숫자는 모두 해서 스물아홉. 거대한 황궁을 노리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다. 그러나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평범한 자가 하나도 없다. 최소가 소드 마스터급이다.

오색 기사단 소속, 한 개 기사단의 정예를 모은 것 같다.

다만 저들이 흘리는 분위기를 보았을 때, 절대 기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암살자에 가까웠다. 검은 가면에 철저한 역할 분배와 숨소리조차 없는 완벽한 수신호 처리까지. 황궁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듯, 개중 하나가 황궁 벽 앞에 서서는 두 손으로 둥근 원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평범하게 담을 넘지는 않을 모양이다.

어떤 방법을 쓰려는 걸까? 이드는 물론 두 손을 입을 막은 황녀까지 눈을 크게 뜬 순간.

푸스스

원을 만든 두 손에 초인력이 집중되더니, 곧이어 벽이 지름 이 미터에 깊이 삼십 센티 정도로 파이며 그 안쪽 돌이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특이한 것은 초인기를 사용한 당사자의 손에만 초인력이 집중될 뿐, 무너지는 벽에서는 어떤 외력도 감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초인 당사자가 사용하는 초인력이 어마어마한 것도 아닌 데다, 무엇보다 벽에 외력이 가해지지 않았다. 과연 저런 형태라면 아무도 모르게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으리라.

하룻밤 사이 두 번이나 침입자를 허락하게 되는 것이다.

“쯧.”

이드가 혀를 찼다.

벽에 커다란 쥐구멍이 생기게 된 것도 문제지만, 지금 당장은 그보다 저들이 수신호를 쓰는 바람에 대화에서 정보를 얻어낼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게 더 아쉬웠다.

파파팟!

혀를 차는 소리는 작았지만, 침입자들의 행동은 빠르고 예리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데 모여 소리가 난 곳을 노려보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어느새 무기까지 들려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난반사 처리를 해서 날까지 새까만 병기들. 그렇다고 날에서 뿜어지는 서늘한 예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라.”

마치 쉬어 버린 듯 거친 목소리. 침입자들에게서 처음 나온 음성이었다.

“다행이야. 벙어리는 아니라서.”

수신호만 하기에 혹시나 했는데 다행이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이드가 은신을 풀었다.

순간 저들의 경계가 한층 딱딱해졌지만, 이드는 딱히 관심 없다는 듯 옆에서 황녀를 손짓하며 말했다.

“궁금한 건 많지만, 나보다 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으신 분이 있으셔서 말이지.”

“……감히 대 아나크렌 제국의 황궁을 노리다니. 죽…… 흡…….”

뭐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두렵지 않더냐. 썩 그 가면을 벗고 정체. 르…… 우웨엑~~~!!”

마치 내장을 쏟아 낼 것 같은 기세다. 흘러나왔다기보다는 브레스처럼 뿜어졌다.

동시에 이드와 적들 앞에서 그토록 참았던 구토를 하고 만 황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게 생체 반응 때문인지, 죽고 싶을 정도의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오직 당사자만 알리라.

이드는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고는, 세 걸음 앞으로 나섰다. 황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 주기 위해서. 그리고 토사물이 튀는 것을 피해서.

그중 후자의 이유가 좀 더 중요한 건 비밀이다.

그렇게 침입자들과 마주 선 이드는 그들의 눈에 어렸던 경계심이 살짝 약해진 것을 알았다.

‘이런 어설픈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얕잡아 보일 수밖에 없는 법이지.”

거기에 그 모습을 통해 다른 사실 하나도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이드와 황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웃긴 이야기다. 이드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넘기더라도, 황궁에 침입하는 놈들이 황녀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하아, 하아 웁…… 웨에엑!”

뭐・・・・・・ 저런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꼭 이상한 일도 아니다 싶긴 하지만.

이드는 애써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너희와 같은 눈빛을 한 자들을 알기에 소용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묻겠다. 너희는 누구고, 어떤 목적으로 황궁에 침입하려는 거지?” 

사아아-

예상대로였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음습한 살기, 그리고 달려들기 전의 늑대처럼 몸의 중심을 낮추는 적의 모습뿐이었다.

“쯧, 어쩔 수 없지. 진지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는 걸로.”

이드가 미련 없이 의문을 거둔 순간이었다.

스슷.

소리도 형태도 없는 무언가가 이드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이드의 잔상을 베었다.

말없이 공격을 시작한 침입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드 역시 말과 동시에 분뢰보로 눈을 속이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저들의 공격은 실패했고,

빠가각.

이드의 공격은 백발백중,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모조리 성공했다는 점이다.

적들 사이로 뛰어든 이드의 주먹에는 한 톨의 자비도 없었다.

뿌드득.

퍼억.

빗살처럼 갈라진 이드의 주먹이 반응할 사이도 없이 적의 얼굴에 박혔다.

검은 가면이 박살 나고, 하얀 이가 허공을 튀어 올랐다. 단번에 얼굴이 뭉개진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렇게 쓰러진 자들이 절반. 실로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다.

“죽여!”

누가 봐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의미 없는 싸움이지만, 쉰 목소리의 사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 본능적인 두려움에 움찔하던 자들이 결연한 모습으로 이드에게 몸을 날렸다.

다만 반응할 사이도 없이 쓰러진 자들과 달리, 각자 가진 재주를 최대로 끌어 올렸다는 것이 달랐다.

하지만 벌이 침을 가졌다고 곰을 물리칠 수 있던가?

저 공격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는 명령을 내린 자가 가장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특별했다. 그중 어떤 경우에도 후퇴는 없었다. 철저히 은신했음에도 계획과 달리 황궁에 발을 들이기 전에 발각되었지만. 주르륵.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런 그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다.

“우웁~

듣고 있으면 저절로 인상이 써지고, 시큼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소리. 그럼에도 사내는 반가웠다. 이거다 싶었다.

저 감당 불가의 괴물과 달리, 그 일행은 너무나 약한 존재다. 저 여자를 잡을 수 있다면.

파악!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다급한 마음을 드러내듯, 박차고 나가는 그의 발아래 흙이 움푹 파이며 파도처럼 치솟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내의 몸은 토하고 있는 황녀의 등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잡았…… 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뻗은 순간. 그의 몸이 덜컥 허공에서 멈춰 버렸다.

“숙녀의 부끄러운 모습은 보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나?”

그곳엔 어느새 달려들던 적들의 얼굴을 모조리 뭉개 버린 이드가 있었다. 정확히 손가락 두 개만으로 남자의 몸을 세워 버린 것이다. 휘릭.

이드는 무기를 든 남자의 손이 움찔거리는 순간, 손목을 꺾었다. 그에 이드에게 닿아 있던 남자의 몸이 장난감처럼 뒤집어졌다.

그 근본은 황녀를 옮기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대신 황녀와 이자를 다루는 태도는 천지 차이다.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잠시 허둥거리는 남자의 몸에서 손을 뗀 이드는 곧장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도 노리는 것은 얼굴.

이드의 주먹이 남자의 얼굴로 사정없이 떨어졌다. 다른 자들과 달리 두 주먹이 번갈아 가며 왕복했다.

하필 토하느라 고생 중인 황녀를 노렸으니, 그만큼 특별히 대우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산산 조각난 가면이 부서지며 얼굴에 박히고, 코와 광대뼈가 무너졌으며, 하얀 이가 무더기로 튀어나왔다.

남자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그의 부모도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자들과 달리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제법이야. 하지만 쓸데없이 끈질기면 인기 없다고. 부디 이후에 잘 협조해 주길 바라지.”

그리 말한 이드가 남자를 재우기 위해 주먹을 들었을 때다.

“……그러…… ・그러………. 이느… 어다…….”

발음이 몽땅 뭉개져 알아듣기 힘든 말이 끝나는 순간.

주르륵.

남자가 촛농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인상을 썼다.

“독・・・・・・ 은 아닌가. 젠장, 마법과 초인기는 대응이 너무 까다로워.”

중원에서는 입에 물고 있는 독만 조심하면 되었다. 그래서 이자들을 제압할 때도 입을 노렸던 건데.

지금 모습만 해도 독은 아니다. 게다가 녹아내리는 건 이자뿐만이 아니었다.

이드가 혀를 차고 돌아봤을 땐 이미 온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 없었다. 남은 거라고는 오물이 묻은 옷뿐, 

“헥헥…… 이드님?”

그사이 속에 든 걸 모두 토하고 겨우 몸을 일으킨 황녀가 엉망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드는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손수건을 건넸다.

“저택으로 갈 때는 좀 천천히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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