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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62화


1097화

턱을 괸 이드는 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엔 회의실에서의 일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에 따르면 황제는 존 워스에게 열흘의 시간을 주었다. 결백하다면 그 안에 입궁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라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이기에 이러한 결정은 소드 팰러스와 검왕에게 전달되었다.

이 자체로 너희들은 존 워스와 연락이 되면서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돌려 말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열흘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 말미를 주는 기간으로는 넉넉하다고 볼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니었다.

공간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지금, 만약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면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존 워스가 자신의 위치와 입궁에 대한 의지를 확실히 한다면 황제도 시간을 늘려 주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황제를 비롯한 대부분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보고서 말미에는 이 폭탄선언으로 인해 발에 불이 붙은 듯 뛰어다니는 신하들의 행적이 간단히 적혀 있었지만, 이드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존 워스가 카논에 무슨 꿀단지를 숨겨 둔 걸까나.”

카논에 대해 처음 언급한 이는 일리나였다.

처음엔 별 느낌이 없었다. 일리나도 딱히 어떤 생각을 가지고 꺼낸 말은 아니라고 했다. 그저 궁금한 일이 있다면 정면으로 해결하는 엘프의 성향에 따른 의견일 뿐이라던가?

그런데 왜인지 묘하게도 자고 일어난 다음 날부터 카논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이 쏠린다고 해야 할까?

이드는 그 느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천지의 기운과 교통하는 경지에 오른 고수의 직감은 때때로 천기를 헤아리는 도사보다 정확할 때가 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자신은 충동적이거나 변덕이 심한 성격도 아니었다.

마음이 동하는 게 일시적인 충동이나 변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움직이기 전에 확실히 하는 편이 낫겠지?”

그렇다고 마음에 따라 생각 없이 움직이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생각을 정리한 이드는 즉시 에단을 부르고 라울에 요청서를 전달했다.

최근 카논의 동향과 함께, 존 워스가 카논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며칠 전 빚도 있으니, 따로 계산은 필요 없겠지.”

이드는 며칠 전 발터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덕분인지, 황제의 결정과 검왕의 대응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사정이 들려왔다.

초인파와 기사파는 물론,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의 상황까지 이다.

신기한 점은 그들의 목소리가 의외로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황제의 결정에 비해 충격은 의외로 적어 보였다. 그런 반응은 사실 의외였다.

발터가 공론화한 존 워스의 문제로 인해 검왕이 직접 황궁에 방문하고, 현재도 안티로스에 머물고 있다.

뿐인가. 검왕은 직접 지지자들을 불러 부당한 주장에 대해 존 워스의 결백을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단순한 논란이 되는 수준이 아니라, 공식화될 수 있는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앞선 대응을 보면 당장이라도 지지자들을 움직여 부당함을 소리 높이는 게 당연한데도, 아무런 대응이 없던 것이다.

당사자의 반응이 이러니 당연히 공격을 가한 초인파나 중립도 조용히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얼마나 의외였으면 밤에 찾아온 황녀도 걱정의 말을 할 정도였다.

“무슨 꿍꿍인지 그 속을 모르겠어요. 늦어도 오늘은 아바마마를 찾아뵐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드 팰러스로 돌아갈 뜻을 보였다는 소식만 들린단 말이죠.

검후는 자신이 우려 준 찻잔을 앞에 두고도 입술만 깨물어 대는 황녀를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녀,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어째서요?”

“황제 폐하의 칙령이니까요. 황녀. 많은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화한 황제 폐하의 결정은 누가 원한다고 바꿀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황제의 칙령은 곧 제국의 의지. 그건 이 나도 바꿀 수 없는 거랍니다.”

“아…….”

검후의 차분한 목소리에 막혔던 부분이 해소된 듯, 황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드는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찼다.

“쯧쯧, 아무래도 황녀께선 검왕이라는 그림자에 눌려 있는 것 같군요. 그 간단한 문제로 끙끙거리는 걸 보면 말이죠.”

“하아~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할마마마께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러면서 배우는 거랍니다, 황녀.”

검후가 인자한 얼굴로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공을 가르칠 때는 엄하지만, 다른 문제에서는 용기를 주고 응원하며 돕는 검후다.

“다 아는 내용 말고,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이드가 그 모습을 보다 물었다.

그에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골골거리고 있던 황녀가 퍼뜩 정신이 든 듯 풀린 얼굴을 정돈했다.

“있어요. 어젯밤에 라울 자작이 아바마마를 뵙고 갔어요.”

“라울이 직접이요?”

그건 몰랐던 일이다. 검은 돌의 보고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은밀히 만난 듯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아십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번 일과 더불어 미완의 마탑, 그리고 마스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고 있으니, 제가 꼭 제국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기분이네요.”

“팔아넘기는 거 맞습니다. 대가는 검후님의 귀여움이고요.”

“아, 그러네요. 그럼 좀 더 열심히 팔아야겠어요. 아하하.”

말과 함께 검후의 품에 머리를 기대는 황녀다.

이드는 그녀가 검후의 손에 녹아내리기 전에 한 가지를 더 확인하기로 했다.

“그런데, 라울 자작의 방문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상당히 은밀한 만남이었던 것 같은데.”

의심 같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궁금함이었다.

그런데, 황녀의 반응이 이드의 예상과 달랐다. 여태 숨길 게 없다는 듯 잘만 털어놓던 그녀가, 돌연 검후를 신경 쓰며 말을 망설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쩐지 그런 행동들에 티가 많이 났다. 마치 알아 달라는 듯 말이다.

그에 이드가 허락을 구하듯 검후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검후님과 관련된 일 같은데, 괜찮으시겠지요?”

“여기서 더 불편할 게 있나요. 황녀도 편하게 말하도록 하세요.

말과 함께 황녀의 손을 포근하게 감싸 쥐는 검후다. 그에 황녀의 입이 열렸다.

“라울 자작이 아바마마를 뵙고 돌아가던 그 시각에 저도 아바마마의 부름을 받았어요. 덕분에 라울 자작을 볼 수 있었고, 그에 대해 아바마마께 여쭈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아바마마가 절 부르신 이유는 할마마마 때문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황녀가 자신의 손을 잡은 검후의 손 위에 반대편 손도 올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어쩌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황녀께서 혹시 그 전에 황제께 검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순간 쉴라와 스폴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검후의 납치와 감금에 어디부터 어디까지 얼마나 관여되어 있는지 완벽하게 확인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블랙리스트에는 무엄하지만 황제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회색이었다.

다만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경우지만, 황제가 직접 관련되었고 황녀를 통해 현재 검후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면…… 이곳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작게 고개를 저어 보이는 황녀였다.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마스와 관련한 건에 대한 의견을 드리면서 할마마마께서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주셨는지를 살짝 흘리는 정도였죠.”

“그런데 그걸 듣고 조용히 부르셨단 말이군요?”

끄덕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녀에 검후가 쓰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잡은 손을 두드렸다.

“지금 황제가 어릴 때부터 제법 눈치가 빨랐지요. 아마 그 짧은 말 속, 황녀가 담아 두고 있는 마음을 엿본 걸 겁니다.”

‘과연 괜히 황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네.’

하나 이드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아무렴 제국의 지배자인 만큼, 보통은 접할 수 없는 황궁 안의 정보도 많으리라.

황녀가 비밀을 말하고 다닐 리도 없고, 자신이 마중하는 밤의 외출이 들킨 것도 아닐 터.

그렇다 해도,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든 만큼 황녀의 행동에 작더라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게 어디 보통 걱정거리던가.

무려 노심초사하던 검후의 실종이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사라졌으니, 티가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황제는 그걸 놓치지 않은 것이고,

“그래. 황제는 무어라 하시던가요?”

검후가 무심한 듯 물었다.

“옛날이야기를 하셨어요. 아바마마께서 어릴 때 할마마마께서 얼마나 귀여워해 주셨는지, 얼마나 힘이 되어 주셨는지. 그리고 할마마마의 뜻과 상관없이 점점 제국과 반목하는 소드 팰러스에 대한 걱정도 함께요.”

“그리고요?”

“그날은 그뿐이었어요. 그저 추억에 대해서만 말씀하셨어요. 마지막으로…할마마마께 참으로 죄송한 것이 많다고 혼잣말처럼 하시긴 하셨지만요.”

아직 내심을 완전히 꺼내 보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사실 아무리 딸이라도, 아니, 오히려 딸이기 때문에 흉하고 부끄러울 수 있는 속마음을 꺼내 보이기 쉽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제국을 지배하는 황제라지만, 자식에게는 그저 좋은 아버지이고 싶을 테니까.

검후는 황녀의 말이 끝난 후에도 아무 말 없이 황녀의 손만 쓰다듬었다. 황녀의 입을 통해서긴 하지만, 그녀 역시 황제와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리라.

어색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이드는 그러한 분위기를 풀어내려는 듯, 툭 하니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다행히 여기 문제는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조만간 카논에 다녀올까 합니다.’

“네?”

“이드 님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위급 상황에는 어쩌고요. 전 반대합니다!”

그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가운데, 스폴이 두 팔로 크게 엑스를 그리며 재빨리 반대를 외쳤다.

거기에 쉴라와 황녀의 얼굴에도 살짝 걱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반응을 본 이드가 진정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당장 움직이겠다는 게 아니고, 상황을 좀 보고 가 볼까 한다는 겁니다. 그를 위해서 검은 돌과 라울 쪽에 카논에 대해 살펴 달라고도 했고요.”

“갑자기 카논에 가시려는 이유는…… 역시 존 워스 때문이겠지요?”

“아무래도 마음에 자꾸 걸려서 말입니다.”

이드는 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가리켜 보였다.

“라울 쪽에 부탁할 때 받은 내용인데, 존 워스가 여전히 카논에 머무는 중이랍니다. 여기서는 어제 그렇게 대단한 일이 있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대단한 꿀단지를 묻어 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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