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65화
1100화
일리나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조용한 저택 지역을 벗어나 대로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길을 따라 장사가 한창이다.
“자~ 싸다, 싸! 두리 강에서 막 잡아 올린 물고기가 쌉니다!”
“두통, 치통, 근육통은 물론 소화 불량에도 아주 잘 듣는 약초들이 다 있어요~ 잘 말린 약초 사 가세요~
“벨링 뿌리도 있소?”
“그럼요~’
“황궁에선 지금 난리가 났는데, 여긴 전혀 상관없는 것 같네요.”
손을 꼭 잡은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당연하다는 어조로 답했다.
“하루 이틀은 지나야 소문이 퍼질 테니까요. 뭐, 그래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요.”
아무렴 존 워스 같은 유명인의 스캔들이다. 심지어 황제가 사실로 공표하고 강력한 처벌까지 내렸으니 말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야깃거리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소식이 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여기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평생 존 워스와 관련될 일이 무어 있을까.
“거기 무사님, 옆에 애인분께 이 꽃을 선물하면 더 사랑받으실 겁니다요.’
그러던 중 꽃집을 지나는데 웬 목소리 하나가 이드를 잡았다.
애인이나 가족과 함께 나왔다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능숙한 장사용 멘트. 과연 이드도 그걸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일리나, 꽃 어때요?”
다만 꽃집 사장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일리나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일까.
“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꽃이 더 좋아요. 그리고 지금은 꽃보다 이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고요.”
일리나가 아이스크림 숟가락을 쪽쪽 빨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이드의 손에 들린 컵과 그녀의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아이스크림이 뭐지?”
그렇게 꽃집 사장님에게 의문을 남긴 두 사람은 목적 없이 길을 따라 수도를 돌아다녔다. 때론 구경도 하고, 소곤거리며 둘만의 이야기도 나눴다.
‘효과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렇게 저택에서 나와 네 시간가량 지났을 때, 이드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사실 이건 라미아가 권한 바였다. 연인과의 데이트에 딱히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 외출에는 그 목적이 분명했다.
카논으로의 동행을 고집하는 일리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드는 라미아만 데리고 빠르게 카논에 다녀오려 했다. 일리나가 함께하는 것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한다면 아무래도 일리나가 검후와 함께 수도에 머물러 주는 편이 이드로서도 안심이 된다.
한데 대부분의 일에선 이드의 의견을 따라 주던 그녀가 이번 일에 한해서는 드물게도 고집을 꺾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한 번 더 동행을 주장하는 그녀에 라미아가 살그머니 속삭였다. 두 마리의 바퀴벌레처럼 알콩달콩 손잡고 데이트하게끔 나갔다 오라고. 카논에 대한 말은 꺼내지도 말고 그냥 일리나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 방향으로 밤까지 돌아다니라고 말이다.
그것이 지금 태양이 산허리에 걸려 붉게 물든 거리를 걷고 있는 이유였다.
문제는 일리나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이다. 라미아가 말한 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지만.
‘아무렴 어때. 안 되면 말지. 같이 가면 안 될 것도 아니고.’
라미아의 충고가 듣지 않은 만큼, 그녀가 고생을 좀 하면 그래도 일리나가 남지 않아서 생기는 빈틈 정도는 채울 수 있으리라.
그렇게 깨끗하게 마음을 비울까 할 때였다.
일리나가 돌연 잡은 손을 놓고 이드의 팔을 껴안았다.
“사실 후회했어요.”
“뭘요?”
“카논을 언급했던 거요.”
일리나가 카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가려 하지 않았을까?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일리나 때문이 아닌걸요. 어차피 그게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존 워스와 혼돈의 파편을 쫓는 이상 카논은 언젠가 거론될 수밖에 없다.
“그랬겠죠. 하지만 카논에 가려는 이드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점점 걱정되는 마음이 커져 가던 걸요. 그리고 함께 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깨달았죠. 불안한 이유를.”
“뭔데요?”
“그때처럼 또 이드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어요. 기약할 수 없는 긴 시간을요.”
말과 함께 이드의 팔을 안은 일리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와 같은 모습에 이드는 세심하게 그녀의 마음을 살피지 못한 자신에 대해 자책했다.
자신에게 카논은 그저 사건의 근원지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이별로 긴 시간 자신을 기다려 온 일리나에겐 어떠할까?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슬픔이 혼재된 장소이리라.
‘카논이 일리나의 트라우마가 되어 있었네.’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었다.
엘프의 정신이 인간보다 정교하고 단단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상처 입거나 충격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니까.
이드는 걷던 걸 멈추고 일리나를 마주 봤다.
“미안해요. 일리나의 기분을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남아 달라고만 했으니.”
“아니에요. 내가 말하지 않은 거니까, 이드가 모르는 건 당연해요. 그리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에요. 내게 이런 상처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일리나가 고요한 눈빛으로 이드를 올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엘프의 정신은 인간보다 강하다. 그건 회복력이 강하다는 말도 된다.
트라우마를 깨닫지 못했다면 모르지만, 그걸 자각한 순간부터 이미 빠르게 극복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이드가 그녀 곁으로 돌아왔으니,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그런 이유가 있었기에, 말할 수 있었다.
“카논에 갔다 와요. 전 검후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같이 가고 싶지 않아요?”
“언제나 함께 있고 싶죠.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아이가 아닌걸요.”
그 말과 함께 다시 팔을 끌어당기는 일리나였다.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긴 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좀 전까지는 같이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덕분에 지금 이드와 이렇게 단둘이 데이트 중이잖아요.”
그렇게 답하는 일리나의 얼굴은 맑았다. 잡념 같은 것이 일절 섞이지 않은, 마음 그대로를 내보이는 얼굴.
트라우마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극복되는 것이었던가?
아무리 엘프라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변했다 싶은 기분이 들자 문득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이거…… 혹시 라미아와는 벌써 이야기가 된 거예요?”
씨익.
범인의 손에 놀아난 형사가 된 기분으로 이드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그저 화사한 미소뿐이다. 이드는 그런 일리나에 또 반칙을 쓴다며 투덜거렸다.
저 미소를 보고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어차피 이렇게 두 사람에게 골탕을 먹는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말이다. 무엇보다 당했다는 상황 따위보다야 걱정했던 일리나의 트라우마가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요?”
“아뇨. 오늘 자정까지는 제 시간이니까요. 참, 지금 모습 사진으로 남겨 두고 싶으니까, 얼굴 좀 가까이 해 줘요.”
“휴? 그것도 빌렸어요?”
이드의 팔을 당기며 일리나가 꺼내 든 건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증거인 휴였다.
“아뇨. 라미아가 제게 줬어요. 이드가 없는 동안 이드의 모습을 마음껏 보라고.”
찰칵,
그리고 들리는 소리. 붉게 물든 하늘과 길게 늘어선 대로를 배경으로, 팔짱을 낀 두 사람의 모습이 휴 위로 떠올랐다. 그러더니 곧 그 주변으로 덩굴과 꽃이 나타났다.
사용자가 떠올린 이미지로 영상과 사진을 편집하는 휴의 편집 기능이다. CG 업계에서 알았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얻고 싶어 하리라.
한데 어느새 그 사용이 자신보다 능숙해진 모습에 이드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휴가 일리나의 손에 넘어간 것이 꽤 오래된 듯했다.
잠시 후,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사진 편집이 끝남과 동시에 일라나의 손을 잡아끄는 이드였다.
“좋아요. 이렇게 된 것, 원하는 만큼 실컷 사진을 찍자고요. 그리고 오늘은 외박할 거예요!”
“라미아에게 말도 없이요?”
“그래야 복수가 되죠. 후훗.’
그런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해가 툭 하고 떨어졌다.
그렇게 이드와 일리나가 달달한 분위기를 내던 그 시각.
마스 왕궁 회의실은 한없이 우중충했다.
그 중심에는 삐딱하게 앉아 눈을 감은 국왕과 뻐끔뻐끔하며 연신 담배 연기를 내뿜는 신하들이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는 점일까.
그러던 중 마치 잠꼬대처럼 국왕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직이냐.”
“송구하옵니다.”
이젠 몇 번째 물음인지 답할 정신도 없다. 벌써 왔어야 할 보고가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 탓에 애가 탄 신하의 입술은 쩍쩍 갈라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제발 이젠 좀 와라. 계속 이러다간 내가 먼저 쓰러지겠다고.’
다행히 그런 간절함이 통한 모양이다.
입실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빼꼼히 열린 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통통해 보이는 볼살에 땀을 뻘뻘 흘리는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신하를 발견하고는 곧장 다가가려 했다.
하나 국왕의 목소리가 먼저 그를 잡아끌었다.
“쓸데없는 절차는 치우고, 바로 보고하라.”
“화, 황송하옵니다. 감히 국왕 폐하를 기다리게 하는 죄를 지었나이다.”
국왕의 말에 남자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잽싼 놀림으로 국왕 앞에 바짝 엎드렸다.
“너는 느린 데다 말귀까지 어둡구나. 쓸데없는 절차보다 보고부터 하라 일렀거늘.”
“옙! 혀, 현재 확인된 바로 베밍 초소에서 33킬로미터 떨어진 산간 지역에서 일단의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복장과 깃발을 든 모양새로 보아 제국에서 알려 온 추격 병력인 듯합니다.”
“그럼 도망자들은 발견하지 못한 것이냐?”
“송구하옵게도 그렇습니다.”
머리를 바짝 바닥에 붙인 남자의 말에 국왕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쯧, 내가 여태 겨우 저 소리를 듣자고 기다렸단 말인가. 자작. 설명하라.”
그에 중간 과정에서 패싱 당했던 신하가 엎드려 있는 남자 옆에 섰다.
“아무래도 도망자들은 이미 아국의 국경을 넘은 듯하옵니다. 보고에 올라온 베밍 초소 인근은 산지와 협곡이 많아 길이 없고, 대형 몬스터의 숫자도 적지 않아 비교적 경계가 소홀했던 곳입니다. 놈들이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모든 게 신의 모자람 때문입니다. 부디 용서하지 마옵소서.”
신하는 미비함을 솔직히 고했다.
그에 국왕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신하의 말을 막고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어차피 국경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그 빈틈을 도망자들이 알고 숨어든 것인지, 아니면 제국이 그리 몬 것인지. 그게 궁금할 따름이다. 어떤가?”
“……열에 여덟로 제국이 그리했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국경 지역을 두고 굳이 먼길을 돌아 베밍 인근으로 향한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신하의 말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다른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국왕 역시 마찬가지.
“이자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졌을꼬.”
걱정을 담은 듯한 국왕의 말. 그러나 듣기에 따라서는 피를 본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