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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69화


1104화

여관 밖은 벌써 어두웠다.

국경은 물론, 카논 제국으로 향하는 성문도 닫힌 시간.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몇 보이지 않았다.

국경에 접해 있는 성의 특성상 어지간해선 성문을 열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성벽을 넘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피터가 말렸다. “국경을 넘은 기록이 있는 상태로 사라지면 후에 문제가 될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 말한 그가 꺼내 놓은 건 바로 카논 제국 용병 길드에서 발급된 일급 용병패였다.

“십 년 동안 바지런히 돌아다녔더니, 저라는 놈도 제법 유명해졌지 뭡니까.”

많이 닳은 용병패를 자랑스러운 듯 만지작거리는 모습. 오죽하면 진짜 소속은 바벨이 아니라 용병 길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후 이드와 라미아의 손에도 용병패가 쥐어졌다. 피터의 것과는 달리 반질반질한 새것이다.

하긴 아무리 용병이라도 아나크렌 출신 용병이 밤에 성을 나가겠다고 하면 쉽게 문을 열어 주지는 않을 터였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피터는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이 밤에 의뢰라니, 조심하라고.”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피터를 보고 경계를 하기는커녕 이드와 라미아의 신분도 대충 확인할 정도로 친숙하게 굴면서 저렇게 말했을 정도니 말이다.

문을 활짝 열어 준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에 이드는 피터에게 슬쩍 엄지를 들어 주고는 성에서 멀어졌다. 한참을 이동하던 그는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 싶은 곳이 되어서야 멈췄다.

“여기라면 보는 눈이 없겠죠.”

“맞습니다. 딱 이 앞까지가 성의 감시 한계선이었는데, 그걸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그런 이드를 피터가 신기한 듯 보았다.

성의 주민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초행인 이드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곳이라면 자신들은 성이 잘 보이지만, 성에서는 나지막한 언덕에 가려 자신들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이드에겐 쉬운 일이었다. 빤히 눈에 보였다고 할까?

사람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다양하다. 경계는 가장 원초적인 영향력 중 하나다. 당연히 신경을 쓰면 기가 흐르고, 그 범위는 시야가 닿는 곳까지가 되는 거다. 다만 이에 대한 설명은 어려웠다.

“경험이죠. 그보다 슬슬 달려 볼까요?”

대충 대답을 뭉뚱그리고 본격적인 출발을 서두르는 이드.

그 모습이 묘하게 들뜬 듯 보였기에 피터는 조금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라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 거예요?”

“하하. 그런가? 사실 궁금했거든. 피터 씨의 초인기가 어떤 건지.”

“이거 쑥스럽군요. 하하하.”

아무래도 이런 관심은 익숙하지 않은가 보다. 이드는 자신의 말에 어색한 웃음을 보이는 피터를 살폈다.

특히 그의 신체에 깃들어 있는 초인력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 신경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드가 파악한 피터의 초인력으로는 최고 속도는 물론이고, 지속 시간 부분에서도 도저히 따라올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엔진을 돌릴 연료가 부족해 보였다는 말이다. 한데도 피터의 자신감은 진짜였다.

즉,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피터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그러니까 기름 냄새만 맡고서 달릴 수 있는 제트 엔진 같은 초인기를 소유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러니 어떻게 피터의 초인기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으며, 곧 보게 될 광경에 신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이드의 심정은 딱 선물 상자를 앞에 둔 어린아이의 그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먼저 출발하겠어요?”

누가 들어도 뒤따라가면서 구경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런 이드의 말에 조금 멈칫하는 기색을 보인 피터는 민망한 듯 말을 꺼냈다.

“크흠,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 초인기 섀도우 워퍼의 특성상 제가 앞장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출발 전에 두 분께 허락을 구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과연 상당히 특별한 초인기인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 혼자 멋대로 재밌어한 거니 죄송할 건 없고, 제가 무엇에 대해 허락을 해 주면 되는 겁니까?”

“간단히 말해서 두 분의 그림자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그건 너무 간단한데요.”

“정확히 말하면 두 분의 그림자를 타야 합니다. 제 초인기는 대상의 그림자에 간섭할 수 있는데, 대상의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그 사용법 중 하나입니다.”

“그림자 사용이라. 알아?”

이드는 라미아를 돌아보았다. 섀도우 워퍼라는 초인기는 처음 들어보지만, 그림자를 사용하는 마법은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림자 마법이면 음차원에 대한 간섭이 대부분인데. 초인기의 경우는 뭐라고 하기 어렵네요.”

이드는 고개를 흔드는 라미아에 피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법 전문인 라미아가 확답하기 어렵다면 자신이 뭐라 할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그림자를 탄다고 했다. 보통 ‘탄다’는 말은 말이나 마차, 배를 대상으로 한다. 이때 탑승자는 힘을 쓸 필요가 없다.

“과연, 강하지 않은 초인력으로 따라올 수 있다고 자신한 이유를 알겠군요. 그런데 우리가 공간 이동이나 하늘 높이 날아가는 수를 쓰면 어쩌려고

했습니까?”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의 경우 그림자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함께 이동하는 ‘동행’은 불가능해질 것이 분명하다.

“그랬다면 바벨에서 제가 아니라 다른 길잡이를 보냈겠지요.’

바벨의 결정이 틀릴 리가 없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앞서 용병 길드 소속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드는 피터의 대답에서 두 가지를 알아냈다.

하나는 바벨에 피터 말고도 단독으로 자신을 쫓아올 수 있는 초인이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라울이 안 그런 척하면서 우리를 쫓았나 본데?’

그러지 않고서야 피터의 말대로 하필 딱 그를 보낼 리가 없었다.

라미아가 답했다.

‘그건 아닐 거예요. 그보단 예상되는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었겠죠. 직접 쫓아왔다면 우리가 모를 리가 없을뿐더러, 피터를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그에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의 대부분을 이드가 책임지긴 했지만, 라미아도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뒤를 쫓았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라미아의 말처럼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이드가 경공을 사용하는 모습만을 보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서로 믿고 사는 세상은 언제 오려나.’

괘씸하기보단, 몇 날 며칠을 고생했을 말단에 애도를 표했다. 사실 괘씸죄를 묻기에는 애초에 신뢰로 쌓은 관계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렇게 몇 가지 사실을 파악한 이드는 본격적으로 피터를 잡고 그의 초인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가 탔을 때 그림자 주인에 대한 영향이라거나 지속 시간, 혹은 간섭의 정도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렴 그림자에 태워 주는데 그 정도는 확인하는 게 당연지사였다.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들은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좋군요. 그럼 굳이 허락을 구하는 건 뭐 때문이죠?”

“그림자라는 건 매우 특별합니다. 음차원에 비친 자신, 그 자체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만큼 그것이 가지는 영역은 확실합니다. 즉,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면 허락을 받아야만 그림자에 탈 수 있는 거죠.”

“그럼 그 이후에는 아무렇게나 이용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애인이 한 번 키스를 허락했다고, 아무 때나 들이대는 걸 받아 주진 않지 않습니까.”

왜 그런 비유를 가져다 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는 확실히 쉬웠다.

그렇게 피터의 초인기에 대해 어느 정도 호기심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아무렴 같은 바벨의 식구도 아니고, 밑천을 모두 까발릴 정도로 순수한 사람은 아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가볍게 공격을 해 보겠습니까?”

“휴~ 정말 철저하시군요.”

피터는 조금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들었다. 아무렴 이드뿐 아니라, 라미아의 질문까지 받아 내느라 진땀을 꽤 흘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조금 기운을 내서 초인기를 사용하는 모습이다.

슈르르-

그리고 그 형태는 매우 미약했다.

그의 그림자가 일그러지더니, 먼지바람처럼 발 주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림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든 준비 태세였다.

심지어 누가 그림자 아니랄까 봐 초인력의 유동도 미미했다.

“어디를 어느 정도 힘으로 공격할까요?”

그 말에 이드는 팔을 들었다. 그러자 달빛에 비친 희미한 그림자도 팔을 들었다.

“대략 30% 정도면 되겠군요. 목표는 제 팔입니다.”

“30%. 알겠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을 해서일까. 피터는 정말 괜찮겠냐고 더 묻지 않았다.

스스-

소리도 형체도 없었다. 다만 어둠이 내려앉은 땅이 좀 더 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팔랑.

갑자기 소매가 두 동강 났다. 처음부터 그런 것처럼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운 절단선.

그에 반해 갈라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이드의 팔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피터의 그림자가 이드의 팔뚝을 휘감은 공격이었다.

이드는 자신의 팔과 그 아래 비친 그림자를 번갈아 보았다.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좀 신기했다.

피터의 공격은 이드의 팔이 아닌, 그 아래의 그림자를 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옷이 잘리고, 호신기로 보호한 팔에 공격이 들어왔다.

‘이 정도면 상대 쪽에서 전력을 다한다 해도 호신기만으로 막을 수 있어.

이드 자신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절대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굉장하군요. 이런 형태라면 제대로 된 방어도 불가능하겠어요.”

그림자의 공격을 막는 방법이라니. 당장 떠오르는 그럴싸한 방안도 없었다.

그러나 피터는 자신이 튀는 것이 싫은지, 아니면 경계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인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밤에는 위력도 떨어지고, 애초에 빛이 없으면 쓸 수 없거든요. 무엇보다 방어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런가요?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데.”

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라미아가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림자를 움직이면 돼요. 단, 이때 주의할 점은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해요. 그리고 저항의 의지를 분명히 할 것!”

“정확하십니다.”

피터까지 고개를 끄덕인 답안이지만, 이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바닥에 비친 그림자를 상대로 어떻게 공수를 교환한단 말인가. 당장 방금 경험해 봐서 알지만, 상대는 공격할 때조차 그 무게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건 어차피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충분히 확인이 되셨습니까?”

“좋습니다. 그림자에 타는 걸 허락하죠.’

이런 특성이라면 피터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막아 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확신을 얻은 이드가 승낙의 말을 꺼냈다.

그리고 잠시 후,

슈아아악-

라미아를 등에 업은 채 육지 비행을 사용한 이드가 바람을 쩌억 갈라내며 달려나가고, 그 뒤로 그림자를 탄 피터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뷰아….뷰뷰뷰뷰아….!”

그림자를 타면 뭐 하나.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으면 끌려가는 것과 다를 게 없는데.

빠르게 들이치는 바람에 피터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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