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87화
1122화
괴수의 완성까지는 대략 일 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놈을 공격하진 못할지언정, 준비할 수는 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이 ‘준비’라는 게 터무니없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라미아가 그렇다.
그녀와 같은 마법사의 경우, 시간과 자원만 허락한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낼 수 있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일 분.
라미아는 9클래스의 화염계 소환 마법을 준비했다.
지옥 심차원에 타오르는 검은 화염을 불러내는 마법.
파괴력 면에선 동일 클래스의 다른 것들에 비해 약하다.
하나 지옥의 불길답게 죽음과 저주, 음차원에 대한 공격력이 특히 뛰어나기 때문에 선택했다.
비록 괴수의 몸속을 채우는 살덩이에 마기는 느껴지지 않아도, 출처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플라가의 분노가 강림하리라.
그 결과.
푸르르륵.
괴수를 중심으로 반원 모양의 검은 불꽃이 피어났다.
귀여운 크기의 불꽃은 곧 장미 넝쿨처럼 이리저리 얽히며 공간을 타고 오르더니, 순식간에 이십 미터가 넘어가는 괴수만큼 커졌다. 이 정도 규모가 되면 그 열기가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장미 넝쿨 속에 숨은 악마의 그림자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그런 열기마저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쓰읍. 역시 마법에 비하면 초라한데.”
장관이라면 장관이랄 수 있는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던 이드가 입맛을 다셨다.
아무래도 무공은 성격상 모든 기술이 즉각적으로 진행되므로, 준비가 탄탄할수록 강력해지는 마법에 비해 빈약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손 위에 띄워 놓은 강환도 마찬가지다.
금령단공의 정수인 금단으로 만든 금령원환이지만, 찬란하다는 것 말고는 그 크기가 오우거 머리통만 한 게 전부다.
장미 넝쿨도 없고, 악마의 그림자도 없다.
라미아는 그런 이드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성룡급 드래곤 브레스에 준하는 파괴력을 그렇게 작게 일점 압축해 놓고는, 뭐가 초라하다고요?”
“외형도 중요한 법이란 말이야, 외형도.”
“그럼 12대식이라도 꺼내지 그래요?”
의형강기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12대식.
과연 화려하기로 따지자면 마법에 못지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고는 싶은데, 지금은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괴수를 향한 이드의 말에 고개만 갸웃하는 라미아였다.
실로 거대 괴수를 앞에 두고도 여유만만이라고 할까? 방학 숙제를 일찍 끝낸 우등생 같은 모습이다.
그에 반해 괴수는 정반대다.
애초에 그 목적상 사고를 티끌 정도만 할 수 있는 괴수였다.
그러나 생존 본능은 이성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고, 그 결과 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에 대한 원망과 증오였다.
‘창조주는 어째서 이런 대비도 하지 않아서 내가 이런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는가!”
아직 완전히 태어나기 전이니만큼, ‘모태 불효자’라는 타이틀이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원망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괴수는 거대한 생존 본능과 쥐꼬리만 한 이성을 필사적으로 활성화해 생존을 모색했다.
근원은 알 수 없으나, 자신은 위대하고 강력한 존재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의 공포를 마주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양측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동안 일 분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법이 완성되었다.
“하압!”
“피어나라. 멸망의 홍염!”
기다리고 있던 이드와 라미아는 0.001초의 딜레이도 없이 반응했다.
화려하지 않다고 아쉬워하던 강환이 가장 먼저 공간을 갈랐다. 그 빠르기는 극쾌.
이드의 손 위에서 사라진 강환이 순식간에 괴수의 코앞에 나타나는 모습은 마치 블링크 마법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긴 어려웠다.
흑염의 장미 넝쿨이 벽이 되고, 바다가 되어 괴수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흑염 속에서 더욱 존재감이 강해진 플라가의 그림자가 거대한 창을 찌르는 모습은 압도, 그 자체였다. 화염도 화염이지만, 과연 무엇이 저 거대한 창 앞에 견딜 수 있을까.
“크허어어어어어엉!”
흑염에 뒤덮인 괴수가 울부짖었다. 그게 단말마였을까.
괴수에게 막힌 듯 일정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던 흑염이 시원하게 뒤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연무장을 비롯해 그 뒤에 있던 벽은 물론, 한참 떨어진 돌산까지 휩쓴 흑염은 그 주변 모든 것을 붉은 용암으로 녹여 버렸다.
“흐아아아아~ 제 평생 가장 살 떨리는 광경이군요. 이 세상 어떤 단단한 성벽도 두 분을 막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런 광경에 피터가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서서는 진절머리를 냈다.
초인으로 각성한 덕분에 세상의 별별 일을 다 보았다 자신하는 그도 이런 광경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저 압도적인 파괴력이라니.
엉거주춤 허리가 뒤로 빠져 있는 건 아마도 조금 전까지 지금 녹아내리고 있는 건물 근처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게 오페링인가?”
피터가 안고 있는 물건을 본 이드가 물었다.
오페링이라고 해서 원형의 물건을 예상했는데, 삼면으로 이루어진 삼각형 형태의 물건이었다.
재질은 은으로 보였고, 크기가 제법 커서 피터가 가슴에 안고 있어야 했다.
“남작이 말한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척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하나 밖으로 나간 후 그게 아닌데요, 라는 식의 답이 나오면 곤란하기에 이드는 즉시 남작을 깨웠다. “이게 오페링이 맞나?”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남작은 얼굴에 박아 버릴 듯 물건을 들이미는 피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오페링이 맞습니다. 정말 가져왔군요.”
“중간에 듣지 못한 장치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야 쉽게 해결할 수 있었지.”
아무래도 오페링의 회수에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확인도 했으니………….”
역시 이런 인간은 재워 두는 것이 최고다.
그 기색을 느낀 건지 남작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살기 위한 발버둥일까.
“오페링을 회수한 이상, 빨리 탈출해야 합니다. 그분께선 오페링을 회수하고 나면 스승님의 완벽한 임무 종결을 위해 공간 폐쇄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공간 폐쇄라면, 이 공간을 붕괴시킨다는 건가? 걸리는 시간은?”
“그건 잘…….”
“이 어중간한 인간 같으니!”
다시금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는 남작에 가차 없이 혼혈을 박아 버리는 이드였다.
뭔가 대략적인 내용은 있는데 하나같이 핵심이 없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황혼의 기사는 철저히 버리는 패로군요.”
이드는 심경이 복잡해 보이는 피터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는 오페링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남작을 그 손에 넘겼다.
“그런 이야기는 밖에서 하고, 지금은 최대한 빨리 탈출하도록 하시죠.”
“당장 붕괴 조짐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피터는 이 공간을 좀 더 조사하고 싶어 했다.
머릿속 깊이 박힌 직업 정신이 발동한 것이랄까.
“저는 몰라도, 저놈은 그걸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어 보이거든요.”
흑염이 넘실거리는 곳을 가리켜 보이는 이드.
그에 자신도 모르게 남작을 꽉 끌어안고 마는 피터다.
“설마 저 불길에도 타 죽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걸 살더라고요.”
“잿더미가 되었으면 편한데 말이죠. 칫.”
귀찮게 되었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라미아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상황이 변했음을 전했다.
“태아 상태에 가까워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곤란하게 되었어요.
“그 곤란하다는 게 혹시 저거야?”
그와 함께 이드가 가리키는 곳에는 쪼개진 하늘처럼 공간 끝에 생긴, 검고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네. 괴수가 충격 전이의 효과가 끊어지는 것을 미세하게 늦추고 제 공격을 공간으로 넘겨 버린 결과죠. 대신 놈도 멀쩡한 상태로 태어나진 못했겠지만.”
“그렇겠지. 내 쪽엔 확실히 손맛이 있었거든.”
거기에 소멸하긴커녕 오히려 단단히 뭉치는 괴수의 기가 저렇게 피어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있나.
“쿠화화화황!”
“어이쿠. 저놈도 구사일생하고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네.”
돌산이 와르르 무너지며 들리는 울음소리. 어느새 저기까지 날아갔던 모양이다.
라미아가 즉시 마법을 시전했다. 틈이 있다면 무조건 찌르고 보는 것이 싸움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아직 간격의 유리함은 이쪽에 있네요. 검은 하늘을 달리는 빛의 은총 앞에 복종하라. 썬더 폴.”
콰르르르르르릉!
번개를 소환하는 마법. 한두 발 떨어지는 것과 달리 라미아의 마법은 번개 다발이다.
다만 간격이 라미아의 것임에도 괴수는 위기를 넘겼다.
놈의 대처는 기민할 뿐 아니라, 기이했다.
콰르르르!
자신을 둘러싼 바위를 날려 버린 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번개를 피한 후, 검을 닮은 기형의 돌산을 뽑아 검처럼 휘둘러 머리 위에 운집한 뇌운의 마법을 갈라 버렸다.
아무리 작아도 그 둘레가 오 미터가 넘고, 길이가 삼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것을 말이다.
“도대체 힘이 얼마나 좋은 거야?”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쿠쿠쿵 하고 공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돌산이 이드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괴수가 들고 있던 것을 그대로 던진 것이다.
그 모습은 감히 공성추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드의 대처는 간단했다.
푸슝.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뻗어 청옥의 와류를 띤 기운을 뿜어, 감히 바위라고 부를 수 없는 그 돌산에 충돌시킨 것. 그 효과는 완벽했다. 결정체의 결을 부수는 데 최적화된 기공. 파옥청강살.
파스스스스스-
그에 닿은 돌산은 날아오는 기세 그대로 모래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돌산과 교차하는 라미아의 마법들. 하나하나가 6클래스 이상인 마법들. 하지만 마법보다 괴수의 속도가 빠르다.
그에 범위 지정 마법까지 더해지지만, 그래서는 위력이 떨어진다.
슬로우 같은 상태 이상 마법은 완벽히 저항해 버린다. 그러면서 확실히 거리를 좁혀 오는 괴수.
“저기, 여보! 저 촐랑거리는 좀 잡아 줄래요!”
보기 좋게 마법을 무위로 돌리는 괴수에 단단히 화가 난 듯, 라미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보통 이럴 땐 반항하지 않고 착실하게 마나님의 기분을 맞춰 주는 이드였지만, 이번에는 그러기 곤란했다.
“아무래도 저놈의 처리는 내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은 피터 씨와 초인들을 데리고 먼저 나가는 게 어떨까? 아무래도 남작이 말한 공간 붕괴가 슬슬 시작되는 것 같아.”
이드의 말처럼 커다란 터널처럼 뚫려 있던 검은 공간이 그 주변 공간을 갉아먹으며 점점 그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특히 잠시 후면 하늘에 생긴 균열과는 하나로 합쳐질 것 같다.
정확히 단정할 순 없지만, 그 둘이 합쳐지면 붕괴속도는 더욱 빨리질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칫…… 어쩔 수 없죠.”
씩씩거리다 겨우 대답을 내놓는 라미아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