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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89화


1124화

파스스.

날리는 모래 알갱이와 함께, 이드가 먼저 공간을 제압했다. 제대로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 그는 빨랐고, 강했으며, 위험했다. 촤라라락.

목표물의 크기가 크다 보니 찌를 곳이 널렸다. 강맹한 검강이 부챗살처럼 펼쳐지며 스피츠하비터의 전신을 노렸다.

“쿠어어!”

그에 맞서 스피츠하비터는 석검을 회전시켜 공격을 막았다.

놈은 십칠 미터나 되는 거체를 가졌으면서도 결코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베인보다 빨랐고, 야수보다 맹렬했다.

무엇보다 그 크기에서부터 나오는 힘은 마나를 빼더라도 대단해서, 허투루 무시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석검에 일어난 바람만으로 바닥에 떨어진 바위까지 날아다닐 정도였다.

진정 다시 보기 힘든 광경. 하지만 이드는 되레 흥이 났다.

메르시오 역시 이런 거체의 모습을 한 적이 있지만, 그는 기실 육체파라기보단 마나를 사용하는 환수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한데 이쪽은 정말 누린내를 풀풀 풍기는 야수, 그 자체였다.

순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드의 머리 위로 석검이 떨어졌다.

단순하지만 공간을 제압하는 무리가 담긴 베기. 그건 결코 야성의 본능에 맡긴 공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움직임이 이드의 기억에 있다.

‘쭛’

내심 혀를 찬 그는 운룡대팔식으로 공간을 열고 접인공력을 이용, 스피츠하비터의 얼굴까지 단번에 거리를 좁혀 강기를 뿜었다.

눈 하나는 가져갈 공격. 하나 스피츠하비터가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비켜 냈고, 덕분에 검강은 상대의 눈 대신 턱부터 어깨까지를 베고 지나갔다. 푸슈슉!

갈기와 쩍 갈라진 상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 그마저 닿기만 해도 녹아내릴 듯 살벌한 기운을 자랑하는 독혈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스피츠하비터는 피가 흐르건 상처가 났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양 다시 석검을 휘둘렀다.

짧은 사이 석검이 손에 익은 건지, 전신을 이용한 검술에 마치 스피츠하비터를 중심으로 태풍이 일어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를 상대하는 이드는 태산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스피츠하비터가 휘몰아치는 태풍이라면, 정작 이드는 그 속에서 아무런 피해 없이 착실히 적의 피를 취하기 바빴다.

그와 동시에 이드는 한층 깊어진 눈으로 스피츠하비터를 살폈다.

분명 스피츠하비터는 강하다.

거체에서 뿜어지는 힘과 막강한 마나.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파괴력은 확실히 그레이트 소드를 넘어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까지 닿아 있었다.

그야말로 황혼의 기사 이베인이 꿈에도 그리던 그 경지.

하지만.

쯔어어엉!

무리(理)와 힘의 격돌에 또 한 번 땅이 뒤집어지더니,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바위들이 스피츠하비터의 근처에서 가루로 부서졌다. 콰드드드득!

그 사이로 스피츠하비터가 달려 나오자, 이드의 검이 지금까지와 달리 움직였다.

“맹세와 신념에서 눈 돌린 결과가 겨우 힘만 센 괴수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인가.”

비이이이이-

직후 대기가 갈라지는 대신 타들어 갔다.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각,

라미아와 피터는 정신을 잃고 이리저리 쓰러진 초인들을 앞에 둔 상태였다. 특히 피터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해져 있었다.

조금 전, 저들은 라미아가 걸어 둔 보호 마법을 거두자마자 맹목적으로 두 사람을 공격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이상을 보이는 사람은 없네요.”

“3

그리고 곧장 라미아의 손에 제압당해 잠들었다. 정말이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말이다.

쓰러트린 당사자가 상대를 살피는 모습은 낯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방금 그건 딱 버서커 반응이었는데. 왜 저희를 보고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피터 선까지 전달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초인들이 버서커가 되는 이유는 혼돈의 파편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은 물론이고, 같은 초인인 피터를 대상으로 일어났다.

“혹시 처음에 저희를 공격했던 마법의 영향일까요?”

“가능성은 있어요. 피터 씨는 아직 초인기를 거두지 않았죠?”

“업무상 이런 일엔 철저한 편이라 말입니다.”

대답과 함께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는 피터였다.

“잘하셨네요. 아니었다면 피터 씨도 버서커 현상을 겪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니다, 혹시 한번 시험해 보실 생각 없어요? 이게 앞선 마법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 공간의 문제인지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04…….”

피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의미 있는 시도라는 건 알겠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는 탓이다.

부하들이 단번에 제압되긴 했지만 안심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저런 꼴로 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걸 잘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할 때였다.

콰우우-

갑자기 머리 위로 와이번 한 마리가 지나가는 듯하더니, 그들이 가야 할 길 앞으로 커다란 무언가 날아와 박혔다.

“성벽? ……이 아니고, 검? 저게 왜 여기까지?”

저 무식한 걸 휘두르던 괴수가 떠오른 피터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가 본 것은 폭삭 무너져 내린 성터 위, 하늘까지 치솟아 오른 빛의 기둥이 괴수와 함께 놈이 든 석검을 베이컨처럼 잘라 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게 바로 저렇게 잘린 것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잠깐이지만 버서커라는 심각한 문제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저게 가능하다고? 인간의 마나로 저런 검강이?”

“직접 본 현실도 믿지 못하면 바보에 불과하겠지만, 피터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겠죠? 그렇다면 곤란한데요.”

라미아가 쓰러진 초인들을 추스르며 말했다.

쉽게 눈을 떼지 못하는 피터와 달리, 잠깐 고개만 돌렸던 그녀는 이미 피터를 이용한 테스트도 포기하고 있었다. 협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강제할 정도로 그녀는 메드가 아니었으니까.

“아,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천히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저기 전투도 싱겁게 끝난 것 같고.”

“싱겁게요? 왜요?”

“그게, 괴수가 들고 있던 무기가 부서졌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무기가 없으면 전력에

“확실히 무기는 중요하죠. 그런데요, 괴수가 휘두르던 건 애초에 제대로 된 무기도 아니었잖아요. 대체품이라면 저기 많은 것 같은데요.”

라미아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피터는 곧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지 않아도 앞서 눈에 담았던 지형이 떠올라 아차 싶었는데, 과연 다시 눈을 돌린 곳에는 하나가 아닌 십여 개의 석검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크르르르르렁!”

동시에 거친 울음소리가 나고, 이내 석검들이 이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에 맞서 이드 역시 아까와 같은 빛의 기둥을 다시 휘둘렀고, 그에 잘린 석검의 파편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쾅!

그중 몇 개가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 떨어지며 모래 먼지를 쏟아내자, 팔을 휘둘러 그걸 거둬 낸 라미아가 말했다.

“사람들을 옮길 준비는 끝났고, 갈까요?”

“어서 가시죠. 저 같은 놈은 최대한 빨리 사라져 드리는 게 제일 큰 도움인 것 같습니다.”

말과 함께 남작을 더욱더 단단히 잡아챈 피터가 도망치듯 앞장서 나갔다. 그 뒤를 부유 마법으로 초인들을 띄운 라미아가 바짝 따라붙었다.

바깥 공간으로 나가는 문이 이제 코앞이었다.


이드는 날아온 석검을 모두 동강 내 버렸다.

그와 함께 빈틈을 노리듯 네발로 바닥을 기며 송곳니를 번뜩이는 스피츠하비터에게도 동일한 칼맛을 보여 주었다. 뱀 같은 갈기가 독을 뿜고, 누런 발톱이 공간을 찢어발겼다. 그 속도와 힘은 이드도 인정할 만큼 강력했다.

하지만 강력하기만 할 뿐, 깊이가 없고 천박하다. 상대하는 것 자체가 고역일 정도.

그런 뻔하고 형편없는 손질은 맞아 주고 싶어도 몸이 가만있지 않는다.

오히려 석검을 들고 그레이트 마스터의 솜씨나마 보이던 순간이 훨씬 낫다.

빠악!

그런 짜증을 담아 스피츠하비터의 안면에 마각철황격의 박아 넣었다. 십칠 미터에 이십 톤의 무게에 비하면 고작 쌀알 하나 정도로 작은 발이지만. “쿠에에엑!”

스피츠하비터는 허연 이빨을 뱉어 내며 뒤로 굴러갔고, 이드는 그에 그치지 않고 삼분의 일 정도가 잘려 바닥에 박힌 석검을 이기어검의 수법으로 쳐냈다.

퍼억!

석검은 스피츠하비터의 목 아래 깊이 박혔지만, 아쉽게 놈의 목을 잘라 내진 못했다.

등 뒤에 누워 있던 깃털이 일어나 갑옷처럼 몸체를 감싸 관통을 막은 것이다.

그 뒤 스피츠하비터가 제 목에 박힌 석검을 뽑아 들었다.

석검을 손에 쥐었기 때문일까. 스피츠하비터는 바로 달려들지 않고, 이베인의 것이 분명한 열망을 담아 이드의 손에 든 검을 노려보았다. 신념을 버리고, 철저히 이용당하는 상태에서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이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검.

“쿠아아아아아아!”

그래서일까. 난폭하기보단 묘하게 서글픈 울부짖음이 울려 퍼지고, 스피츠하비터가 공격을 시작했다.

석검이 없을 때의 야수가 아닌, 검을 쥔 무인의 움직임.

하지만 그 움직임도 처음과는 또 달랐다.

처음은 적을 향한 투쟁의 의지가 강했다면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싸움을 길게 이어 가고 싶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이 목표한 검을 보고 싶은 열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피츠하비터에 잡아먹힌 이베인의 작은 바람일 뿐.

“끝을 낼까. 이 이상했다간 흉한 꼴만 볼 것 같고.”

이드는 이미 스피츠하비터와 이베인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기에 서둘러 전투를 끝내려 하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지도 대련도 아니고, 굳이 적과 어울려 줄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실시간으로 붕괴되고 있는 공간에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

파사사삭!

그런 마음을 재촉하듯, 또 공간 한쪽이 모래처럼 무너져 검은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힐끗 그 모습을 확인한 이드가 허공을 박찼다. 모래 알갱이들이 날리고 손에 쥔 검에서는 고고한 검강이 뻗어 나왔다.

석검을 자른 것보다 한층 더 날카로움을 더해 마치 영혼이라도 끊어 버릴 듯한 기세의 검강.

이드가 자랑하는 두 가지 검법의 정수만을 담았지만, 아직은 이름도 없는 무명의 검식으로, 12대식과 함께 이드가 쉬지 않고 연구하고 있는 무공의 정화였다.

제정신도 아닌 이베인의 눈을 붙잡아 둔 것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대번에 그 심상치 않은 힘을 느낀 듯, 이베인이 아닌 스피츠하비터의 본능이 위험을 감지했다.

끼릭끼릭.

그에 그 몸을 감싸고 있던 비늘 갑옷 같던 깃털이 석검으로 몰려들며, 마치 천사의 날개 한 짝을 검으로 만든 듯한 형태가 만들어졌다.

당연하지만 그건 단순히 외형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쿠콰콰콰콰

스피츠하비터의 마나가 검으로 쏟아지자 검은 하늘까지 닿을 것 같은 시커먼 폭풍을 뿜어냈다.

그 모습이 마치 전설에 나오는 폭풍을 부르는 마검 같다.

하지만 자연재해 같은 폭풍을 마주한 이드는 그저 평안했다.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힘을 휘두르는 아이를 다루는 건 그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신호도 없이 폭풍과 검강이 부딪혔고, 충돌과 동시에 검강이 폭풍의 절반을 갈라 냈다. 

버언쩍!

그리고 빛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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