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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90화


1125화

작은 태양인가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뜨겁지는 않았다.

빛은 대용량의 마나가 초고순도의 마나를 만나 본래 모습을 잃고 승화되며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은 빠르게 번지며 마나를 빛으로 변환시켰다.

쿠오오오

성터를 공터로 만들고 사방으로 터져 나가던 충격파도 빛에 막혔다.

아니, 막힌 것이 아니라 잡아먹혔다고 해야 옳았다. 작은 강이 큰 강으로 흘러들고, 한 방울의 잉크에 그릇 속 물 색이 변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하지만 충격파를 막았다고 해서 빛이 무해한 건 절대 아니었다.

“커허허허헝!”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빼려던 스피츠하비터는 겨우 한발 물러서는 게 고작이었다.

굵은 힘줄과 핏줄이 솟아오르고, 뼈가 부러질 정도로 힘을 썼음에도 소용없었다.

이미 빛으로 변한 마나 속에 갇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중심에 있는 건 다름 아닌 이드의 검강이었다.

다른 성질의 마나에 간섭해서 승화 현상을 일으켜 버릴 정도로 순수하게 벤다는 개념에 물든 마나의 결정체. 그런 게 무해할 리가 있나. 무해보다는 차라리 편애가 더 정확한 말이었다.

보통 편애라는 게 그 대상이 아닌 상대에겐 처절할 정도로 잔인하고 가차 없는 법.

주위를 제압한 빛은 곧 스피츠하비터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파스스스스-

폭풍을 부리던 깃털 검은 이윽고 마나에 대한 통제를 빼앗겼고,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퍽!

그 충격에 등에서 깃털 끝까지 뻗어 있던 혈관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피가 치솟았다.

“그르르 괴. 물.”

피 분수, 그 자체가 된 스피츠하비터의 입에서 그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그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어딜 어떻게 봐도 괴물은 그쪽이겠지. 그러지 말고 팔이나 좀 내려 봐.”

이드의 말에 빛이 움직였다.

“커헝!”

스피츠하비터가 버티려 했지만, 흔적뿐인 깃털 검을 잡은 두 팔만 와장창 부러졌다.

그렇게 앞을 가리고 있던 두 팔이 사라진 순간, 갑자기 붉은 선 하나가 스피츠하비터의 턱에서부터 시작해 명치까지 생겨나더니.

쩌억.

그 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갓 배를 딴 생선처럼 속을 드러냈다. 당연히 무언가에 베여서 그리되었을 것임에도 베이는 소리 하나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생선처럼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내장 대신 허연 뼈 사이로 드러난 것은, 바닥에 박혀 있던 제단의 일부였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네.”

앞서 스피츠하비터의 가슴에 석검을 박았을 때, 석검이 빠지고 빠르게 살이 차오를 찰나 이드는 이미 놈의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제단의 일부를 보았다.

목표한 걸 찾은 이드가 손을 쑤욱 내밀었다.

쩌어어억!

다시 붉은 선이 생겨나더니, 깊지도 얕지도 않게 딱 적당할 정도로 잘린 붉은 살이 갈라졌다. 그리곤 그 안에서 안면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핏덩이에 둘러싸인 이베인이었다.

잠든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두 눈을 감은 그의 몸은 이미 일부가 주변 살과 융합되어 흉측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이드는 문득 보석을 꺼내 들었다.

지금 이베인의 상태는 누가 보더라도 그냥 저 속에서 빼낼 수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이드가 꺼내 든 게 바로 라미아가 주고 간 보석 뭉치였다.

그녀는 이미 그 시점에서 이드가 무엇을 하려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까지도 정확히 예상하고 준비해 준 것이다.

“그런 점이 정말 사랑스럽기는 한데, 때론 무섭다니까.”

당연히 라미아 본인을 앞에 두고는 할 수 없는 말.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과 함께 이드는 보석을 던져 넣었다.

챙그랑!

붉은 살덩이 사이에 떨어진 보석이 깨졌다. 돌덩이 위로 던져도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던 보석이, 물컹해 보이는 살에 닿자마자 그 형태를 잃은 것이다.

산산이 조각 난 보석은 색색의 가루로 변해 각각 제단과 이베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으로 달라붙었다.

치지지지직!

직후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이베인에게 붙어 있던 제단과 살덩이가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

그 광경에 이드는 혹시 라미아가 착각해서 다른 보석을 주고 간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가 기대한 건 좀 더 깔끔한 모습이었다. 예를 들면 정밀한 외과 수술 같은 느낌?

그에 반해 지금 보이는 광경은 어딜 어떻게 봐도 수술장보다는 도살장이나 정육점에 더 가까웠다. 그저 힘으로 하는 거라면 이드도 충분히 가능했다.

“하긴・・・・・・ 굳이 상처까지 살펴 줄 정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니까. 내가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드는 피투성이 상태로 툭 떨어져 나오는 이베인을 내공으로 받아내며 간단히 결론을 냈다. 과정이야 어쨌든, 목적했던 결과가 나왔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베인을 떼어 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라미아가 보석에 다른 조치를 더 해 두었기 때문일까.

“그으….으으으….”

산 채로 외과 수술을 당했음에도 살기가 형형하던 스피츠하비터의 눈이 돌연 상한 생선처럼 누렇게 변하더니, 곧 사지가 힘없이 늘어졌다. 힘없이 벌어진 입에서는 진득한 진물이 흘렀고, 입술 양 끝의 살이 뭉개지면서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당연히 이드가 갈아 놓은 가슴 속 붉은 살도 빠르게 썩어 들어갔다. 그와 함께 지독한 악취를 포함한 시독이 피어올랐지만, 이드는 알지 못했다. 공기라면 스피츠하비터의 가슴을 가를 때부터 차단 중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 진득한 피비린내를 맡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신 이베인의 생기를 확인한 그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업보가 깊구나, 깊어.”

전 대륙에 무공이 퍼지고, 그걸 배우고 익혀 영향을 받은 사람을 수없이 보았던 이드다. 하지만 그 중 이베인처럼 인생이 꼬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일까. 라미아의 목소리가 안에서부터 솟아올라왔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듣는 사람도 없기에 육성으로 답한 이드였다.

‘아무것도 아니면 빨리 나와요. 스피츠하비터가 끝장나서 그런지 공간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무너지고 있어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만 해도 흩어지는 빛 알갱이 사이로 마치 먹물을 뿌린 듯 공간에 검은 구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네. 스피츠하비터의 손으로 정리하지 못하면 공간과 함께 통째로 지워 버리겠다는 거겠지. 그럼 나도 문으로 나가면 되나?” 

말과 함께 들어왔던 방향으로 몸을 돌리던 이드는 하늘까지 닿아 있던 문이 신기루처럼 흐릿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는 편이 가장 쉽지만, 침입자와 함께 공간을 통째로 날려 버릴 생각이면 문을 가장 먼저 치우지 않겠어요?’

그와 함께 들려오는 라미아의 목소리.

문이 사라져 이드가 갇혀 버린 상황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다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당사자인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침입자를 엿 먹일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우리에겐 상관없지?”

‘전혀요. 문 따위가 없어도 이드를 제 옆으로 끌어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죠.’

영혼으로 묶인 두 사람에게 거리는 물론, 공간 좌표를 모른다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당장 소환할게요.’

“그・・・・・・ 잠깐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드는 눈앞에 드러나는 광경에 자신을 소환하려는 급히 라미아를 막았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라미아에게 전달했다. 그건 무너진 공간 너머로 드러나기 시작한 거대한 마법진의 일부였다. 무너진 땅과 하늘 너머. 검은 암흑의 공간이 넓어지자 드러나기 시작한 마법진은 성에 깔려 있던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넓은 공간을 통째로 감싸고 있으니,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말로도 다 할 수 없었다.

만약 이 마법진이 성의 것과 함께 연동되었다면 그 힘은 실로 예측불가였을 게 분명했다.

당연히 스피츠하비터도 지금처럼 간단히 제거하고 이베인을 빼낼 수도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간단해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죠.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은 엄청난 힘을 가진 대신,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붕괴해 버려요. 다루기 위해선 그걸 만든 주인이 직접 조율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지금처럼 무작정 남작에게 맡겨 놓고 쓸 수는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호론석 결계의 주요 목적도 바뀌게 된다.

다른 건 모두 부가적이고, 결국 성 안과 공간의 마법진이 연동되는 것을 막는 게 호론석 결계의 주목적인 셈이다.

이드는 안력을 높여 드러나는 마법진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걸 실시간으로 전달받으며 라미아는 혀를 내둘렀다.

‘새삼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가 태초에서 갈라졌다는 게 실감이 나네요. 이 규모도 규모지만, 차원 공간에 대한 해석이 그레센 안의 마법 체계와는 차원이 달라요.’

라미아가 말하는 ‘그레센 안’이란 당연히 드래곤의 마법까지 포함한 기준이다. 그걸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면, 공간을 다룸에 있어서 드래곤도 혼돈의 파편을 당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하긴 그런 기술이 있으니 드래곤들을 차원 밖으로 쫓아내고, 지금까지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게 가능했던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천하의 드래곤들이 공간을 넘을 방법을 찾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쿠르르르르-

그사이 공간은 계속해서 무너졌고, 검은 공간이 드러난 부분이 70%를 넘어가자 외계에서 내계로 공간에 대한 압력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부터 엄청난 압력. 커다란 드럼통을 단숨에 캔 크기로 압축해 버릴 정도였다.

촤라라라랑!

이드는 즉시 호신강기와 함께 검막을 펼쳐 자신과 이베인을 보호했다.

빠끼기기기긱!

고막을 괴롭히는 소리와 함께 검막에서는 쉴 새 없이 불꽃이 일어났다.

보이지 않는 압력에 맞서서였다.

그에 조금 급해진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계네요. 바로 부를게요.’

“아니. 아직 견딜 만해. 나중을 위해서도 혼돈의 파편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확보하는 게 좋잖아.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할 거고.”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호기심이 커도 그게 이드보다 중요하진 않거든요!’

“어허~ 견딜 만하대도 그러네.”

‘그러다 공간이 붕괴해 버리면 어쩌게요! 그건 견딜 수 있는 종류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도 이드는 견딜지 몰라도, 같이 있는 이베인은 다 죽어 가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진에 잠시 잊고 있었던 이베인을 뒤늦게 떠올린 이드가 급히 그를 살폈다.

다행히 호신강기와 검막에 아직 살아는 있었지만, 입과 코는 물론이고, 눈과 귀에서도 피가 흘렀다. 이래서는 절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떠나긴 정말 아쉬운데. 어쩔 수 없나.”

고집을 굽히는 듯하던 이드가 돌연 검은 공간 너머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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