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91화
1126화
검은 마법진과 어우러져 한 점 티끌도 없는 순흑.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보이는 저 암흑은 공간인 동시에 동시에 이드가 서 있는 내계와 외계의 차원을 나누는 벽이었다.
그리고 라미아는 그 벽 너머는 아무것도 없는 빈 차원이라고 말했다.
“무언가 온다.”
그런데 지금. 그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부터 무언가 이곳으로 넘어오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소리도 형체도 없었지만, 맹렬한 기세는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활짝 열린 기감이 암흑을 향해 창처럼 길게 뻗어 나갔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에 당장 돌아오라며 성화를 부리던 라미아도 조용해졌다.
하지만 정작 이드는 이 순간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라미아의 마법이라면 좀 더 쉽게 공간 너머를 살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당장 라미아를 불러들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접은 이드는 기감에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잠시 후, 집중하느라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일단 인간은 아니야. 인간이면 저 속도를 견딜 수 없어. 그럼 설마 혼돈의 파편? 그렇다고 보기에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설마요. 아무리 혼돈의 파편이라도 공간 붕괴를 코앞에 두고 진입해 오는 건 무모해요. 굳이 소멸의 위험을 안으면서까지 접근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우리가 환영 파티를 열어 줄 것도 아닐 텐데 말이야.”
물론 지금까지 혼돈의 파편 뒤꽁무니만 쫓고 있는 이드의 입장에서야 와 주기만 한다면 환영파티가 아니라 더 한 것도 해 줄 수 있지만,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특히 메르시오가 소멸한 걸 알고 있다면, 이드에게 죽는 순간 더 이상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았을 테니 더욱더 신중할 게 분명했다. 이드는 순순히 상대가 혼돈의 파편이라는 가능성을 지웠다.
그 사이에도 공간은 계속 무너졌고, 그로 인해 이드가 디디고 설 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당연히 내계를 위협하는 외계의 압력 역시 엄청나게 강해졌다.
쿠드드득!
그걸 견디지 못한 바위들이 여기저기서 쪼개져 나갔다.
최종적으로는 모래처럼 부서져 사라지리라.
그런 바위와 달리, 검막은 아직까지 훌륭히 압력을 막아 내는 중이었다.
삐끼끼끼끽!
비록 기괴한 소리가 나고, 검막과 공간이 닿는 경계에선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 모습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라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에잇, 뭐가 넘어오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건 빠져나온 후에 살피고, 일단은 거기서 나와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요.’
“진정해. 나도 밖으로 나가면 곧 붕괴될 이 안을 어떻게 살펴? 억지부리지 말고 조금만 참아 보자. 이제 금방이니까. 뭔지만 확인해 보자고.”
‘공간 붕괴도 금방 일어날 것 같거든요?! 난데없이 무슨 호기심이에요!’
보지 않아도 방방 뛰고 있을 라미아의 모습이 환하게 그려지는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매번 이드의 말을 따라 주는 것이, 참으로 그녀답다고 할까.
이드는 비시시 웃으며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떠올린 가설을 말했다.
“혼돈의 파편에 대한 말이 나와서 하는 떠오른 건데, 외계의 빈 차원이라는 건 다시 말해서 차원과 차원 사이의 틈이라는 이야기잖아. 생각해 봐. 보통은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지금은 거기에 우리가 아는 존재가 있잖아.”
라미아의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고 있을 모습은 눈에 선했다.
곧이어 비명 같은 라미아의 목소리가 이드의 머릿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 세상에. 세레니아! 맞아요, 그녀가 있었죠. 가능해요, 충분히 가능해요. 이런 바보! 어떻게 그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한 거니!’
“그럼 라미아도 가능하다고 보는 거지?”
‘물론이에요. 다만, 여러 가지 조건을 따졌을 때 세리니아 본인이나 다른 드래곤이 직접 진입해 올 가능성은 적어요.’
“물론 그렇겠지. 네 말처럼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공간이니까. 몇이나 무사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거체가 한꺼번에 진입해 오면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건 마법이나 공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심정으로 검은 공간을 애타게 노려보았다.
실로 입이 바짝 마르는 기다림이랄까.
쉬지 않고 강해져만 가는 압력에 이베인이 꾸역꾸역 핏덩이를 토하고 있었지만, 이드는 물론이고 라미아도 그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이베인, 그리고 세레니아가 보냈을 무언가.
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베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압력을 비껴 내는 것과 그의 질긴 생명력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빌어 주는 정도가 다였다.
그런 이베인의 행운이 함께한 걸까.
파아아아
순흑의 공간에 문득 바늘 끝으로 찍은 것 같은 한 점 빛이 나타났다.
“왔다.”
그건 마치 우주를 가르고 날아오는 유성 같았다.
특히 아득한 거리임에도 뜨거운 열감이 느껴지는 모습. 그에 라미아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화염의 마나! 역시 세레니아였어요. 그녀가 확실해요!’
화염이라면 레드 드래곤의 상징과 같은 것이 아니던가.
흥분한 그녀와 달리, 이드는 기감이 전하는 정보를 느끼며 입술을 적셨다.
“이거 정말 아슬아슬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층 더 강해진 압력이 검막을 내리눌렀다. 경계에서 일어나던 불길이 이젠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로 변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라미아, 우리도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저쪽에서 도착하는 즉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이미 이드가 디디고 설 수 있는 땅도 본래 공간의 8%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 같았다.
세레니아가 보낸 무언가가 도착할 시점엔 그마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본격적으로 공간 붕괴가 시작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알았어요. 준비할 테니까, 모든 채널을 열어 두세요. 따로 신호가 없어도 소환이 시작될 수 있게요.’
그런 라미아의 말과 함께 이드는 영육으로 전해지는 묘한 공명을 느꼈다.
라미아가 말한 소환을 시작하기 직전 단계였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건, 세레니아의 소식에 흥분한 와중에도 이드의 안전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고마워. 조금만 고생해 줘.”
공간을 이동하는 일은 매우 섬세한 작업이었다.
특히 그 대상이 있는 공간이 지금처럼 불안정하다면, 그걸 최종 단계 직전에 멈추고 유지하는 건 아무리 라미아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흥,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요. 이드야말로 타이밍 잘 맞춰요.’
뭐, 그렇다고 그걸 티내거나 할 라미아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그녀의 말과 달리,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과는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공간을 넘는 속도가 붕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레니아가 보낸 ‘무언가’가 공간을 넘었을 땐, 이미 공간 붕괴가 진행 중이라는 계산이었다. 이드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세레니아가 기껏 보낸 물건도 도착과 동시에 공간 붕괴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야 고생한 의미가 없었다.
짧게 숨을 내쉰 이드는 빠르게 주변을 살핀 후, 검은 공간과 그 속을 달리는 무언가를 향해 검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미리 길을 열어 줘야겠어.”
들고 있던 이베인을 바꿔 쥔 이드는 아공간에서 일라이져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선 녀석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손에 익어 친숙하기도 했고 말이다.
“조금만 더 견뎌 달라고, 황혼의 기사 양반.”
어차피 듣지 못할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두 사람을 보호하던 두 개의 보호막 중 하나인 검막이 사라졌다. 투웅!
순간 전신을 내리누르는 힘이 세 배 이상 강해졌다.
대신 호신강기가 그 형태를 드러냈다.
본래라면 무형이었어야 할 그것은 열기를 뿜던 검막과 달리, 차가운 달빛처럼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주루루룩.
이베인의 출혈량도 배로 늘었다.
이드는 이런 다양한 반응들에서 잠시 신경을 끊고, 일라이져의 모습을 온전히 마음에 그려 냈다.
지금부터 이드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강력한 무언가를 배는 것이 아니었다.
공간을 갈라야 했다.
그것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차원의 틈을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공간을 가르는 날카로움과, 원하는 곳까지 밀고 나갈 힘.
12대식은 안 된다. 날카롭고 강력하지만, 그 힘이 너무 과하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공간을 12대식이 가르고 나가면 공간 붕괴가 당장 시작하고 말 것이다.
‘힘은 무형대천강에서 빌려 오고, 공간을 가를 날카로움은 수라참마인에서 가져오자..’
그렇게 가져온 것을 무극신기로 하나로 엮어 내자 곧 일라이져 위로 새파란 검강의 형태가 나타났다.
차분한 가운데 강렬한 기세.
그 모습은 앞서 스피츠하비터와 함께 석검을 잘라 버린 무명의 검식이 만들어 낸 검강과 매우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같은 점이라면 이 역시 이름이 없는 무명의 검식이라는 점일까.
어차피 이름을 지어 줄 여유도 없었다.
이드는 오 미터까지 솟아오른 검강을 눈에 담고는 손에서 놓았다.
휘리리릭.
검강을 머금은 일라이져는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는 대신 회전하며 검은 공간을 향해 그 몸을 눕혔고, 그 손잡이 끝을 이드의 손가락이 두드렸다. 따앙!
그러자 투명한 소리와 함께 일라이져가 검은 공간 속으로 쏘아졌다.
그 속도는 화살 따위와 비교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빛줄기가 어둠을 갈랐다.
그 모습은 반대쪽에서 달려오는 붉은 유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검강이 지나는 곳을 따라 빛으로 이루어진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화염,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검강이 서로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쿠구구구구궁!
하지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공간의 몸부림이 강해졌다. 마치 둘이 서로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듯 당장이라도 모든 걸 끝장내고야 말 기세로 아주 난동을 부렸다.
“그래 봤자 이쪽이 먼저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이미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공간 붕괴에 가속이 붙어도 이미 이쪽이 먼저 접촉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확신 가운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파아아앗!
서로를 향해 나아가던 두 개의 빛이 만나며 하나가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멀리 날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저 암흑 공간은 일반적인 거리 개념이 통용되는 곳이 아니니까.
다만 이드는 심상으로 이어진 일라이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긴 어둠을 뚫고 온, 빛나는 돌이 일리이져와 하나가 되어 돌아오고 있음을 말이다.
돌아오는 길 역시 이미 일라이져가 뚫어 두었다.
퍼어엉!
일라이져가 주인인 이드를 향해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는 순간.
거의 동시에 거리는 제로가 되어 암흑 공간을 부수고 일라이져가 이드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이드와 라미아가 외쳤다.
“라미아!”
‘돌아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