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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22화


1157화

참새가 방앗간을 찾듯, 오늘도 어김없이 저택을 찾아온 황녀가 재잘거렸다.

“얼마나 볼만했는지 몰라요. 아바마마의 말씀에 화들짝 놀란 얼굴들이라니.”

“자랑스러운 것이지요?”

“네. 그렇게 기운 넘치는 모습은 오랜만이어요.”

수줍은 고백을 하고 볼이 발개진 황녀, 그리고 그 모습을 더없이 인자하게 바라보는 검후는 할머니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손녀와 그런 손녀가 그저 귀여운 할머니의 그림을 완벽하게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황제와 검후의 관계가 회복된 영향이 컸다.

오죽 좋은지, 이미 주변의 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하긴, 저렇게 모든 걸 받아 주는 사람이 있다면 황녀처럼 구는 게 오히려 당연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이 자리엔 그녀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없었다. 은색 기사단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드의 가족은 이미 검후와 동급에 놓아 둔 황녀니까. 이 속에서라면 제국의 황녀라는 체면은 잠시 내려 두고, 그저 귀여운 아가씨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이런 아가씨가 저택에 있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정보원이었다. 그날그날 황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이 그녀를 통해 저택에 세세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검왕이 뜨끔했겠어요.”

황궁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듣던 이드는 가장 먼저 검왕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던 황제의 입에서 블레인이 언급되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물론 그 뒤에 바벨에 관해 얘기했다고 하니 곧 납득했겠지만.

“바벨이 황제와 손을 잡았으니, 독립을 꿈꾸는 그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니겠죠.”

“그래도 그 정도는 예측했을걸.”

이드는 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인성은 썩었어도, 머리는 좋아 보였으니까.”

“호호호. 천하의 검왕을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드 님뿐일 거예요.”

“그럴 리가.”

하물며 없는 데선 황제도 욕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검왕 따위야.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토벌은 문제없이 진행되겠네.”

“그렇겠죠. 제국과 검왕의 단기적인 목표가 일치하는 데다, 황제의 명령으로 과감하게 나갈 수 있는 명분도 얻었으니까요.”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한다는 제약이 풀린 만큼, 죄인들을 추적할 뿐 아니라 앞지르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론 그에 앞서 검왕에게 죄인들을 잡을 진심이 있는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도 토벌이 시작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겠군요.”

“그와 관련해서 명예 후작님께 기사들의 수련을 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틈틈이 기사들의 상대를 해 주던 이드다. 완전히 본격적이었던 검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주군인 검후가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슬프지만, 기사들에겐 그야말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다. 응당 그들의 실력은 쑥쑥 늘었다.

아무렴 이드와 검후 두 사람이 같이 나서고, 간간이 일리나 같은 고수까지 대련해 주는데 성장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제국의 황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귀한 기회였다.

그럼에도 이런 부탁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본격적인 지도를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이미 은색 기사단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한 이드다. 그런 만큼 개개인의 실력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계획하는 게 가능했다.

이드는 간단히 허락했다.

“그렇게 하죠.”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없으니까.

문제는 사건, 사고는 항상 예고하고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다음 날.

이드는 연무장이 아닌 곳에서 피터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명예 후작님.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옷이 멋지군요.”

피터는 이전의 용병 차림이 아니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에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머리까지 한껏 맵시를 낸 모습이었다.

“하하하. 필요해서 좀 꾸며 봤습니다. 아, 두 분의 옷도 준비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한 분 걸 더 마련해야 할 것 같네요.”

이드는 피터의 시선이 자신의 옆을 향하자 말했다.

“이쪽은 제 아내 일리나입니다.”

“역시 검을 든 모습에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명예 후작 부인. 피터라고 불러 주십시오.”

“피터 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해 준 이드는 곧 창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며칠 전 보았던 풍경이 다시금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 이드는 지금 안티로스가 아닌, 발라파루에 있었다. 카논 제국의 수도 말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갑자기 들이닥친 라울에게 있었다. 일리나와의 데이트도 망치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날벼락 같은 남자다. 물론 단순한 벼락이라면 이드도 튕겨 버렸을 것이다. 아마 부하 기사들의 수련 시간을 위해 쉴라와 스폴도 손을 보탰겠지.

그러나 라울이 가져온 것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었고, 결국 그 결과 이드가 발라파루로 날아오게 되었다.

특이 사항이라면 이번 발라파루 행에는 이전에 약속한 대로 일리나도 동행했다는 점이다. 발라파루에서 안티로스의 저택까지 단숨에 공간 이동이 가능해진 이상, 일리나가 굳이 저택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논무파의 기사들은 언제 볼 수 있는 겁니까?”

이드가 바쁘게 본론을 꺼냈다.

카논무파.

라울이 전해 온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카논무파에 속했으리라 의심되는 세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는 것.

그는 그들이 정말 카논무파의 인간이 맞는지 확인을 부탁했고, 이드는 그 자리에서 발라파루행을 결정했다.

아직 뱅커올슨과 이베인의 상태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정도 선후가 바뀌는 건 큰일도 아니다. 더욱이 라울이 슬쩍 흘린 이야기도 있다. 

“혹시 놈들이 카논무파라고 확신이 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적당히 손을 쓸 테니까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후후후. 다~ 방법이 있습니다.”

가볍게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바벨이 마음먹고 힘을 쓰면 못할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 나누시죠. 그들은 해가 진 후에나 도착할 겁니다.”

“그게 피터 씨의 복장과 관계가 있나 보지요?”

“그렇습니다. 하하, 보시다시피 지금은 어울리지 않게 자작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 수도에 발을 디딘 시골 귀족으로, 발라파루에 있는 귀족들에게 인사를 할 겸 파티를 연 것이지요.”

다시 말해 참석할 구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온다고 확신합니까?”

“옵니다. 이 시골 귀족의 배경에 다른 분도 아닌, 프란시스 백작가가 있으니. 기사인 이상 오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프란시스라면, 엘라임 백작님의……………”

“의심되는 대상도 좁혔는데 굳이 고인을 이용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다른 형태로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아무렴 고인의 빈소를 필요에 의해 이용하는 것이 껄끄럽기는 했다.

이드는 내심 잘 되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직 엘라인 백작님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백작가에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파티 날짜도 좀 급하게 잡았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명예 후작님의 의견을 들은 후에 정했을 겁니다.”

아무렴 백작가의 주인이 죽었는데 백작가를 배경으로 둔 자작이 파티를 연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백작가에는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바벨에서 신경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무렴 백작가 전체를 생각하면 바벨의 도움을 받는 게 이익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벨의 입장.

이드는 이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검후에게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백작을 죽인 자의 목을 꼭 잘라 달라는 섬뜩한 부탁을 했던 그녀는 정작 이드가 돌아온 후, 백작에 대해 일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가장 민감할 수 있는 황제와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녀도 이제 조금은 마음 편하게 백작의 뒤늦은 장례에 참석할 수 있을 터였다. 아무렴 무려 검후가 참석한다면 식을 다소 미룬 것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저는 의심되는 자들이 카논무파가 맞는지만 확인하면 되겠군요.”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 말씀만 하시면 최대한 명예 후작님께서 편하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피터가 단단히 각오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말만 하면 그들을 홀딱 벗겨서 침대에 눕혀 두는 상황까지도 만들어 낼 기세다. 물론 그런 상황이 필요 없는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특이점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굳이 여기저기 손댈 이유가 없었다.

굳이 하나의 조건을 들자면, 아무래도 상단전을 탐색하는 일이니만큼 최소한의 접촉이 필요하다는 걸까.

“거창한 준비는 필요 없습니다. 간단한 악수 정도면 되니, 인사만 나눌 수 있도록 부탁하죠.”

“명예 후작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짧은 순간에 바로 확인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피터에 이드는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저들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어차피 카논무파의 근간도 무공. 그걸 확인하는 건 손바닥 들여다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에요.”

“오오! 그렇군요. 하하, 제가 잠시 명예 후작님이 어떤 분인지를 깜빡하고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 건 없고, 그보다 부탁을 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만.

“무엇입니까?”

예상보다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될 듯해 허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피터가, 부탁이라는 말에 다시 날카롭게 눈을 번뜩였다. 

“파티복 말입니다. 꼭 입어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런 옷은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니만큼. 어쩔 수 없겠습니다.”

“그럼 개중 가장 간편한 복장으로 부탁드리죠.”

“……준비하겠습니다.”

피터의 어깨가 툭 떨어지고, 번뜩이던 두 눈에도 도로 불이 꺼졌다.

그래도 어쨌든 이드가 원하던 답은 확실히 나왔다. 그에 만족한 이드가 물러나자 이번엔 라미아가 나섰다.

“저는 화려한 쪽도 좋아요. 피터 씨의 준비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입을 옷은 직접 보고 정하고 싶어요. 괜찮겠죠?”

“・・・예. 혹 일리나 명예 후작 부인께서는 원하는 파티복이 있으신지요??”

내가 바벨의 지부장인가, 옷 가게의 주인인가.

순간 덮쳐 온 회의감을 겨우 밀어낸 피터였다. 그리곤 이왕 시작한 것 한 번에 끝내자는 생각으로 일리나의 취향까지 물었다.

“전 이드와 잘 어울리는 옷이라면 다 좋아요. 딱히 원하는 건 없어요.’

그나마 일리나의 대답은 지극히 그가 상상하던 대로의 답이었다.

“그럼 가시죠. 저녁 전까지는 옷을 준비해야 할 테니.”

말과 함께 이드 일행을 안내하는 피터의 손과 발은 묘하게 기운이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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