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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24화


1159화

바벨의 감찰관, 귀족은 아니지만, 바벨처럼 전 대륙에 걸친 거대 집단의 감찰관이라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상대가 카논 제국의 백작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거, 귀한 분이 참석하셨구려. 와튼 백작이오.”

백작은 선한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그냥 봐선 어디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의 소공자 부부로밖에 보이지 않는 세 사람이지만, 그는 제 눈앞의 인물이 바벨의 중역이라는 데 한 톨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만약 거짓이라면 이 자리에 참석한 많은 귀족과 바벨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미쳤거나, 새로운 자살 시도가 아닌 다음에야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파티의 주최자가 직접 나서서 설명한 만큼, 그 신뢰는 더욱 올라갔다.

“……저야말로 와튼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단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에단의 얼굴이 떠오른 이드였다.

해서 허락도 없이 그의 이름을 사용했지만, 어차피 안티로스에 있는 에단으로서는 알지도 못할 일. 상관은 없을 것이다.


“어이, 바벨이 뭐기에 와튼 백작 반응이 저래?”

보기 흉하지 않을 정도로 살이 찐 남자였다. 통통한 살에 감춰진 눈에는 질투심이 떠올라 있었다.

“재미없는 농담이야.”

“세상에! 저 자식, 설마 진짜 모르는 거야?”

“뭐냐? 그 반응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친구들의 반응에 남자는 신경질을 냈다.

“이 친구야. 집에서 살만 찌우지 말고, 제발 사회생활 좀 해. 어떻게 초인을 위한 초국가 연합체 바벨을 모를 수가 있어!”

“초국가 연합체? 뭐야, 그 거창한 수식어는.”

무지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자, 괜한 소란을 걱정한 또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쉽게 말해서 초인들의 마탑이야. 초인에 대한 외부의 무력이나 부당한 일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초인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지. 귀족 가문의 초인들도 대부분이 거기 회원이야.”

“뭔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래 봤자 힘 좀 있는 평민 나부랭이라는 거잖아. 그런 놈이 감히 이런 자리에 여자를 둘이나 끼고 나오는 게 말이나 돼?” 

‘이 자식은 내 말을 똥구멍으로 들었나.’

알겠다는 말과 달리 엉뚱한 반응에 열심히 설명했던 사람은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너 이 자식. 지금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여자 때문이었던 거냐? 왜, 네가 데려온 여자들보다 아름다워서?”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지만, 무리를 이루고 있던 이들은 내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불만을 보이던 남자 역시 이드와 마찬가지로 두 명의 여자를 동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의 소유인 양 각각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여자들이 먹여 주는 것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하지만 이드 일행의 등장 직후 여자들의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여자들의 위치도 그의 뒤로 살짝 밀려나 있었고 말이다. 그도 눈이 있으니, 자신이 대동한 여자와 그들의 미모가 비교된 것이다. 그리고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느꼈고,

“……”

“이런 젠장. 제발 정신 좀 차려, 고위 마법사가 작위가 없다고 힘없지 않은 것처럼, 저자는 바벨의 감찰관이라고. 속마음을 들킨 듯 말이 없는 남자에 무리를 이루고 있던 친구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와 살짝 거리를 뒀다. 한낱 여자 때문에 바벨의 감찰관을 깔보다니.

그들 중 몇몇은 이 멍청한 놈과의 친구 관계를 한시라도 빨리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들 덕에 설명하는 수고를 던 스윔이 말했다.

“・・・・・・ 설명은 저쪽에서 다 했군. 이제 바벨에 대해서 알겠지? 기사가 어떻게 바벨을 몰라?”

“하하. 죄송합니다.”

스윔은 네이탠이 멋쩍은 얼굴을 한 것을 보고는 애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마 자네도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 한두 해 붙어 다닌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걸 가르쳐 주지 않아.”

“설마요. 모르는 줄 알았으면 진작 가르쳐 줬지요. 제국의 기사가 바벨을 모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거, 모를 수도 있지. 저를 너무 멍청한 놈 취급하시는 거 아닙니까?”

“무식한 거 맞으니까 좀 닥쳐라.”

이를 악문 친구의 말에 네이탠은 입을 삐쭉거리고는 목을 길게 빼 이드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여리게 생겨선, 힘이나 제대로 쓸지 모르겠습니다.”

“외모는 저래도 범상찮은 실력자일걸. 무려 바벨의 감찰관이잖나.”

“흥, 그렇겠지요. 날로 먹는 초인 놈이니.”

네이탠이 들소처럼 거칠게 콧바람을 뿜었다.

재능이 없어 고생했던 과거가 있기에, 큰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은 자들을 싫어하는 그였다.

“도대체 초인이 이 파티에 왜 온 거야?”

프란시스 백작의 영향 아래 있는 자작의 파티다. 그 때문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대부분 그쪽에 속한 부류였다.

애셔가 혀를 차며 답했다.

“자작이 직접 초대했다고 말했잖아. 듣고도 모르냐.”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게 아니면. 집주인이 자기 집에 손님을 초대한 건데 거기에 누가 뭐라고 할 거야.”

또박또박 사실만을 짚어 내는 애셔에 네이탠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분하기는 하지만 반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젠장! 네놈과 무슨 이야기를 하냐.”

애셔는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말고서 술을 벌컥거리는 네이탠의 모습에 키득거렸다. 그리곤 이내 마찬가지로 술잔을 들어 그중 하나를 스윔에게 건넸다.

“이런 비싼 술도 내놓고, 좋은 파티죠?”

“난 지겨워. 이틀 전에도 파티였고, 나흘 전에도 파티였거든.”

“하하하. 저희와는 달리 남작님이시지 않습니까. 인맥을 만드셔야죠.”

“그래서 열심히 발품을 팔고 있지 않나. 한시라도 빨리 ‘우리’ 자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베인 경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뭔가 사고가 난 것 같던데요.”

애셔의 목소리가 극도로 낮아졌다.

스윙이 주변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더군. 알아보니, 뱅커올슨 남작도 사라진 상태야.”

“그렇다면 예삿일이 아니라는 뜻인데. 그분께 연락을 드려야 할까요?”

이름도 없이 ‘그분’이라는 단어만을 입에 담는데도 애셔의 눈에는 깊은 존경심이 떠올랐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는 것이 아닌, 너무 귀한 이름이기에 차마 부르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나 스윙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에 애셔의 고개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들이 있는 방향으로 오면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파티의 주인공, 그리고 귀한 감찰관 손님이 들어왔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애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여러 사람을 거친 주인공들이 드디어 그들 앞에 도착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단입니다.”

등장과 동시에 이 파티의 주인공보다 더 주목받기 시작한 인물이 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스윔 브로우슨 남작입니다.”

귀족들은 악수라는 인사법을 크게 선호하진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호의를 가지고 먼저 손을 내밀면, 예의를 갖추기 위해 그 손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목표인 스윔 역시 마찬가지. 꾸욱.

손과 손이 고정된 극히 짧은 그 순간, 이드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윽고 무극신기가 이드의 손을 떠나 스윔의 장심을 파고들더니, 기혈을 거슬러 그의 상단전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마치 박쥐의 초음파처럼 파동의 형태로 스윔의 상단전 상태를 확인한 무극신기.

그리고 다음 순간, 그것은 여름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며 그 주인에게 돌아갔다.

“왜 갑자기 그리 세게 잡으시는지.”

스윙은 그 과정을 티끌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죄송합니다. 앞의 분들 이상으로 강인한 손매에 좀 놀라서요. 이 단단한 손만 봐도 얼마나 수련에 힘쓰는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바벨의 감찰관께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군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옆에 있는 분들은?”

“제가 아끼는 기사들입니다. 실력이 쑥쑥 성장하는 중인지라,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들이지요.”

“기사 애셔 밴입니다.”

“기사 네이탠 스로우입니다.”

“거친 손이군요. 존경할 만한 손이지요.”

이드는 두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악수했고, 이번에도 역시나 무극신기가 두 사람의 상단전을 탐색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두 기사는 이드의 칭찬에 좀 전까지 가자미눈을 하던 것도 잊은 채 헤벌쭉 웃음을 보였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감찰관님도 관찰력이 좋으십니다.”

“네이탠! 예의를 지켜.”

단순한 건지, 귀가 얇은 건지.

한순간에 경계심을 던져 버린 친구의 언사에 애셔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과연 보고대로 친분이 아주 깊어 보이는 모습이다.

“괜찮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

부드럽진 않았지만, 오히려 사심이 없어 순수한 칭찬이었다.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불만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흥, 좋은 말도 상대와 상황을 봐 가며 예의를 갖출 때 빛을 발하는 것. 예의를 안다면 오히려 불쾌해할 일에 기뻐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왔기에 기본 예의조차 모르는 건지. 한심하군.”

“자네!”

들으라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게다가 그가 비아냥거리는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도 애매하다.

이드를 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이탠을 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둘 다일런지도 몰랐다.

다만 누구를 향했든, 도발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에 여태껏 피터와 이드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대중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인물은, 푸짐한 살집에 통통한 양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는 남자였다.

그 옆에는 일행들이 그를 말리려다 한발 늦은 듯 당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 귀하의 그 발언, 내게 하는 말이오?”

허허거리던 네이탠이 순식간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나섰다. 본인의 언사로 인해 스스로뿐 아니라 이드까지 모욕을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크흠, 들었던 모양이군.”

“들으라고 한 말을 듣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귀하는 누구요.”

“나? 한낱 기사 나부랭이 따위가 알아서 어쩌려고? 방금 말이 불쾌하기라도 했나? 그래서 뭐?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술에 취한 것이 확실한 듯 말의 맥락이 불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걸어오는 시비를 웃어넘길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귀족이라지만, 이런 자리에서 공공연히 상대를 조롱하는 경우는 분명 예의에 어긋났다.

“당신의 무례에 대해 사과하시오.”

“흥, 사과라니.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이런 자리에 참석하고 싶으면, 그대들이나 제대로 된 예의를 익히고 오라.”

“제발 그만 좀 하게. 귀하에게도 사과하는 바요. 보는 것처럼 술에 취해서 그러니, 부디 양해를….”

“취하긴 뭘!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어디서 천박한 시골뜨기들이 기어 올라와서는…..”

무리에 속한 누군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사내의 입술은 막지 못했다. 천박한 시골뜨기.

그건 이 자리에 함께한 세 사람의 콤플렉스 아닌 콤플렉스였다.

“좋소. 사과하지 않겠다면, 사과를 받아내고 말겠소. 스윔 남작님.”

네이탠의 부름에 스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은 아무래도 나를 향한 발언이기도 한 모양인데. 신분을 밝히시오. 내가 직접 그대에게 결투를 신청할 터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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