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33화
1168화
저택 내부는 예상보다 더 화려했다.
환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벽마다 걸린 그림. 빈틈없이 자리 잡은 조각상은 물론, 금으로 된 문의 손잡이까지. 도대체가 눈이 쉴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돈지랄. 돈으로 찍어 누른다는 건 이런 것이라고 보여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과연 자금력만큼은 그야말로 그레이트 소드의 경지. 자작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인물이라도 눈치를 볼 만했다. 그리고 현재, 그렇듯 화려한 저택의 1층과 정원이 손님용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이나 차려입은 복식을 볼 때,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스윔 남작과 두 기사도 그곳에 있었다.
다만 세 사람은 즐겁게 어울리는 사람들과 달리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한쪽 구석에서 어색한 모습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중이었다.
“에단 님! 여깁니다!”
그런 와중에 아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네이탠이 적진 한복판에서 지원군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만하게. 에단 님과 주변 분들에게 실례가 아닌가.”
하지만 나무라는 스윔 남작 역시 안도한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이 어렵다는 의미이리라.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오늘의 주요 목표로군.’
이드는 ‘에단’이라는 이름을 듣고서 자신을 향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충 눈에 담은 후, 세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아닙니다. 이렇게 반겨 주시는데 싫을 리가요. 그나저나 일찍 오셨군요.”
“귀한 분들이 참석하신다는 말에 서둘렀습니다만…… 하하하.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드렸습니다.”
“잘됐군요. 그럼 같이 가시죠.”
“네?”
“같은 자리에 초대받았으니, 기본적인 인사는 나눠야지요.”
겸사겸사 저 중에 카논무파의 인물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그렇게 거침없이 이동한 이드는 가장 상석에 앉은 인물부터 찾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바벨의 에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만나기 힘든, 진짜 고위 귀족.
“최근 소문이 무성한 유명인이로군. 나도 만나서 반갑네..”
척.
바벨이라는 이름값 덕분일까. 후작이 불쾌한 기색 없이 이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를 시작으로 이드는 피터의 설명과 함께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나누며 파티장 안을 돌았다.
한 명뿐인 후작을 제외하고도 전부 백작 아니면 자작. 즉, 호락호락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새삼 톤 자작의 인맥이 대단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나 어차피 그건 이드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중엔 카논무파가 없네.’
그리 생각한 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현재 확인된 카논무파 인물들의 공통점은, 전부 간절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언더도그.
그에 비해 이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 만큼 굳이 검증되지 않은 카논무파의 무공을 익힐 이유도 없었으리라.
그걸 확인한 이드는 쓸데없는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 진땀을 흘리며 이드의 뒤를 따르던 스윔 남작의 모습을 본 애셔가 말했다.
“남작님은 어디 전투라도 다녀오신 모양새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몬스터와 싸우는 쪽이 더 편할 것 같아. 목이 마르군.”
스윔 남작이 바짝 마른 입술을 문지르고는, 가만히 서 있던 바인과 해쉬를 향해 손짓했다.
“너 가서 차가운 물을 가져와라.”
“우와! 잠깐 멈춰 보십시오!”
“갑자기 뭘 멈추라는 건가?”
그와 동시에 네이탠이 화들짝 놀라 재빨리 그 손을 잡아챘다.
“저 메이드. 아니, 메이드 복식을 입은 사람들. 메이드가 아니라 기삽니다. 며칠 전 파티에서 저와 결투를 했던 기사요.”
“뭐?”
또 무슨 시답잖은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었던 스윔 남작은 이어진 말에 바인과 애셔의 얼굴을 살피고는 헉 소리를 내며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맞지요? 제가 제대로 본 것이지요?”
네이탠이 확인을 받으려는 듯 호들갑을 떨었지만, 스윔 남작은 물론 애셔도 말을 잇지 못했다.
전날 보일런을 대신해 결투까지 나섰던 기사가, 오늘은 메이드복을 입은 채 손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기사를・・・・・・ 기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톤 자작・・・・・・ 님은!”
애셔의 입에서 ‘님’이라는 마지막 글자가 쥐어짜듯 튀어나왔다.
파티장에 있는 귀족, 그리고 바인과 해쉬만 아니었다면 쌍욕을 날렸을 텐데. 겨우 참은 것 같다.
아무리 지금 메이드복을 입고 있다 해도, 그녀들이 자작가의 기사란 건 변함없으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바인 경과 해쉬 경도 앉아요.”
이드가 손짓했다. 테이블은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다.
“물은 취소하도록 하지.”
스윔 남작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네이탠이 의자에 궁둥이가 닿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바인을 알아봤다는 기쁨과 놀람도 잠시. 어느새 그의 얼굴 위엔 묘한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승패를 떠나 상대는 본인과 검을 나눈 기사다. 심지어 무공도 뛰어나 좋은 맞수라고 인정하기까지 했더랬다. 한데 그런 기사를 저리 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분노가 치솟은 것이다.
“당신들은 자존심도 없소? 이런 부당한 명령을 어째서 따르는 거요!”
“……”
“따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
말이 없는 두 기사의 모습에 무언가 알았다는 듯 스윔 남작이 살살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당한 명령을 왜 거부할 수 없다는 겁니까?”
“명령을 내린 이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라면 때에 따라 거절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만약 하나뿐인 부모라면? 자넨 그 명령을 그리 쉽게 거부할 수 있겠나?”
“예?”
난데없이 부모를 언급하는 스윔 남작에 네이탠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와 달리 피터와 애셔 등은 단박에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한 듯 슬쩍 눈을 감았다.
이드 역시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두 사람이 자작의 딸일 리는 없을 테고, 가문이 부모 같은 위치라면· 고아인가. 강호에도 그런 경우가 많기는 하지. 특히 불문과 도문에서.’
이어진 스윔 남작의 말은 이드의 짐작대로였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귀족가에서 데려다 훈련시켜서 기사나 시종으로 쓴다는 건 자네도 알잖아.”
“아…… 아, 그럼 여기………….”
두 사람이 고아란 말이군요.
이렇게 이어질 흐름이었지만, 네이탠은 스스로 혀를 깨물어 무심결에 튀어나오려는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슬쩍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하나 의외로 당사자인 바인과 해쉬는 당당했다.
“남작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희들은 고아 기사입니다.”
“지금 모습이 부끄럽긴 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가문을 사랑합니다. 저희가 가문의 이름에 해를 끼친 것도 사실이고요.”
“그거, 정확히 말하면 가문의 이름에 똥칠을 한 건 두 분이 아니라 보일런 공자일 텐데요.”
애셔가 슬쩍 끼어들었지만, 그의 말에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당사자들이 불만이 없다면 제삼자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어지는 법이다. 스윔 남작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그와 교차하듯 이드가 탁자 위에 두 팔을 올리고 턱을 괬다.
“바인 경. 해쉬 경. 분명 불만이 없다고 하셨죠?”
“네. 더욱이 에단 님께서 밖에서 도움을 주신 덕분에 이상한 소문도 생겨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 인사는 아직 이르죠. 아직 두 분의 고생이 끝난 것도 아닌데.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결투에서 패했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가문의 기사에게 이런 망신을 주는 것이 말이 됩니까?”
“……”
두 기사는 답하지 못했다.
대신 스윔 남작이 턱하니 팔짱을 끼고는 답했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직이나 급여 몰수, 그 외 강도 높은 수련 등, 가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기사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은 많습니다. 지금처럼 기사를 모욕하는 형태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문에 속한 다른 기사들도 불만을 가지게 만들 겁니다.”
“들었죠? 저게 정상입니다. 아마 두 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알면서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바인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간단합니다. 이유 없이 그저 징계 차원에서 두 분을 이 꼴로 만든 건 아닐 거라는 뜻이죠. 그 증거로, 두 분을 하필 저와 피터 자작님 옆에 붙여 두지 않았습니까.”
“그럼.
“이건 제 생각일 뿐입니다만. 이 저택의 주인께선 아무래도 아들의 몸값으로 황금 대신 두 분을 내놓으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는 김에 한 번 꺾였던 가문의 명예도 다시 세우고 말입니다.”
“그런・・・・・・ 거짓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아무래도 ‘가문의 명예’라는 말은 귀에 들어가지도 않은 모양새였다. 흥분한 바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해쉬가 그녀의 손을 잡아 앉혔다.
“보는 분들이 많아.”
그렇게 말하는 해쉬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같은 고아 기사고, 파티에도 함께 참석했으며, 지금 메이드복도 같이 입고 있다. 바인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놀라기는 스윔 남작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사자기 아니기 때문일까. 그들은 이드의 말에 관해 좀 더 객관적인 가능성을 따졌다.
“확실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소문으로 들은 톤 자작님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이상한 방식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가 왜 기사일까요?”
이드는 스윔 남작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 기사로 임명을 받았으니까?”
“맞습니다. 기사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력도, 충성심도 아닙니다. 바로 충성 맹세를 받고, 자신을 기사로 서임해 줄 주군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그 계약이 끝난다면, 주군으로서는 굳이 상대가 계속 기사 작위를 유지하도록 할 이유가 있을까요?”
“없겠지요.”
“네. 없습니다. 기사 작위를 회수당한 기사는 그냥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죠. 무공을 익혔으니, 정확히는 무인. 거기에 메이드복을 입고 있다면?”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좀 많이 특별한 하녀겠군요.’
“그런 겁니다. 톤 자작 입장에선 기사가 아닌 하인을 내어 주는 것이고, 그건 다시 말해 결투에서 네이탠 경이 상대한 이 역시 기사가 아닌 그저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하녀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건…… 억지 아닙니까?”
네이탠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바인과 해쉬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드는 그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억지면 어떻습니까. 문제 될 것도 없는데, 결국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끝인 일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그런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