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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35화


1170화

‘기사 서임을 거둔 뒤’라는 조건은 이성보다 감정에 기댄 발언이었다.

가능성이 없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마음. 이곳에 담긴 어린 시절과 피땀 흘린 시간에 대한 미련이 만들어 낸 말이었다.

그러나 해쉬가 꺼낸 조건은 너무도 쉽게, 또 빠르게 충족되었다.

“모두 도착한 것 같으니, 잔을 듭시다.”

대충 주변을 둘러본 톤 자작이 사람들 앞으로 나서 환영사를 읊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꺼내든 주제가 바로 보일런과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늘은 못난 아들의 실수에 대해 와튼 백작님과 피터 자작, 그리고 그날 파티에 참석하셨던 분들에게 아비로서 사과의 말씀부터 드립니다.”

기름칠한 혀를 날름거리며 말문을 연 그는 적당한 사과의 말로 보일런의 실수를 포장했다.

젊은 혈기와 술기운을 적당히 버무려 나무라고.

뒤이어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신청한 스윔 남작의 행동을 재미있게 과장하며 사람들의 관심이 보일런이 아닌 스윔 남작에게 향하게 했다. 그날의 결투를 악당과 영웅의 싸움이 아닌, 광대의 원맨쇼로 몰아간 것이다.

여기에 미리 말을 맞춘 건지 와튼 백작과 그날 파티에 참석한 몇몇 사람들이 톤 자작의 말에 열렬히 호응했고, 그러자 더 이상 보일러의 실수에 대해 머리에 담아 두는 사람이 없게 되어 버렸다.

설령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톤 자작과 껄끄러운 관계를 만들면서까지 굳이 그런 걸 지적할 만한 이는 없었다.

‘바벨의 감찰관도 이번 일에 엮였다고 하긴 하는데.’

‘자작보다야 바벨이지만, 감찰관이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결과적으로 감찰관보다야 오래 볼 자작 편이지. 어차피 우리 애들이라고 사고 안 칠 것도 아니고.’

간단히 주판을 튕긴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했다.

게다가 이런 계산이 아니라도,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은 보일런을 잠시 잊을 정도로 충분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크흠.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작님 말씀은, 결투 조건으로 걸었던 보일런 공자의 몸값 대신 기사를 내어 주시겠다는 얘기가 맞습니까?” 스윔 남작은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시선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와 함께 이드를 곁눈질했다.

‘과연 이런 안목이 있으니 바벨의 감찰관을 하는 것이로구나.’

몸값 대신 기사라니. 들을 당시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설마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돈 대신 기사를 버린다니. 스윔 남작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결과는?

이드의 말대로다.

덕분에 수많은 귀족이 보는 앞에서도 떨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을지를 아는데,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스윔 남작은 기회라고 여겼다. 어쩌면 오늘, 저들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똑똑히 새겨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쫓아다녀도 얻을 수 없었던 바로 그 기회였다. 그리 생각하자 척추기립근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찼다.

“그러네. 결투에 돈이 오가는 것보다는 훨씬 명예로운 일이지.”

돈이 걸리나, 사람이 걸리나, 대체 무슨 차이일까.

끄덕끄덕.

하지만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 뒤 이어지는 농담 같은 한 마디.

“더욱이 자네가 내 기사들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것 같지 않은가. 젊은 사내의 바람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이지.”

순간 사람들로부터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몇 마디 말로 좌중의 분위기를 마음대로 밀고 당긴다.

이런 모습에 피터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러니 뱀 혓바닥이라는 말이 나오지.”

“그게 톤 자작의 별명입니까?” 

이드가 물었다.

인사말을 시작으로 단번에 사람들을 휘어잡고, 한시도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과연 그 모습을 보자면 딱 어울리는 별명이기는 했다.

“중형 상단에 불과했던 수칵 상단을 대상단으로까지 키워낸 장본인이니까요. 이 외에도 서큐버스의 속삭임, 말 달리는 세이렌 등 비슷한 종류의 다른 별명들도 많습니다만, 그래도 주로 사람들에게 오르내리는 건 뱀 혓바닥이죠.”

“뱀에 물린 사람이 많은가 보군요.”

“수칵 상단의 계약서는 복잡하기로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가죽 한 장 사고파는 일에도 계약서 스무 장이 기본이라고 하니까요.’

마리의 보충 설명이다.

“계약서를 비틀면 독이 뚝뚝 떨어지는 건가요? 혹시 바벨에도?”

“호호호. 어림없죠. 계약서 장난질은 통하는 상대에게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수칵 상단은 없었겠죠.”

그렇게 톤 자작과 수칵 상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톤 자작과 스윔 남작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그사이에 어느새 불려 나온 바인과 해쉬까지 옆에 서 있었다.

“여기 두 기사가 뛰어난 것은 단순히 미모뿐이 아닙니다. 특히 바인 경의 뛰어난 실력은 그날 파티에 참석한 분들이라면 모두 보셨을 터. 자, 스윔 남작. 내 제안이 어떻소?”

“이미 제게는 선택권이 없는 것 같은데요. 다 결정해 놓으신 후 물으시는 모양새이지 않습니까. 일단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찌 돈 몇 푼과 기사를 비교하겠습니까.”

“좋소. 그럼 돈이 아니라 기사들을 내놓는 것으로 결정이 났소. 하지만 한 가지, 남작이 양보해야 할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남작이 바라는 대로 바인 경과 해쉬 경을 내어 주는 건 내가 해 줄 수 있소. 그러나 여기 두 기사가 그대를 주군으로 모시고 따를지는 장담할 수 없소. 왜? 기사의 충성은 오로지 기사의 권리이기 때문이오.

스윔 남작은 쓰게 웃었다.

두 기사는 자신과 함께 이드로부터 톤 자작이 어떤 짓을 할지를 함께 들었다. 톤 자작이 기사 서임을 거둔 뒤의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그보다는, 몇 마디 오가는 사이 자신이 먼저 몸값 대신 두 기사를 내놓으라고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무섭고 웃겼기 때문이다.

“당연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미리 생각해 둔 바도 있으니, 자작님께서 염려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망설임 없는 대답에 톤 자작이 살짝 멈칫하는 듯했지만, 애써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서로 예의를 차린 말 속에 가시가 있음을 뻔히 아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바인 경과 해쉬 경은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혹 원하지 않거나, 불만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라.”

“주군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따르겠습니다.”

바인과 해쉬는 망설임 없이 작별을 고했다.

이미 이드에게 이야기를 들었고, 작은 희망과 미련마저 톤 자작이 손수 잘라 주었다. 더 이상 미련을 떨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어느새 다가온 기사들이 바인과 해쉬에게 그녀들의 검을 건넸고, 두 사람은 그 검을 다시 톤 자작에게 넘겼다.

“자작께 받은 검을 다시 돌려 드립니다.”

“그간 수고가 많았다. 그간 그대들이 내게 보여 준 충성에 대한 대가로 준비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들은 자유다. 이제 새로운 주군을 찾아라.”

톤 자작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입을 닫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주종 계약 파기다. 거기에 새로운 주군을 찾으라 했지만, 그 속에 든 뜻이 스윔 남작을 주군으로 모시겠냐는 물음임을 어떻게

모를까.

과연 스윔 남작은 두 사람의 주군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두 기사에게 거부당하고 창피를 당할까.

어느 쪽이라도 구경하는 입장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일일 뿐이다.

바인과 해쉬가 스윔 남작을 향해 돌아섰다.

세 사람의 눈빛이 부딪히고, 스윔 남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톤 자작은 물론, 모든 구경꾼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두 분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우니, 내가 먼저 말하겠소. 솔직히 나는 두 분의 충성을 받을 자신이 없소. 그 대신 새 주군을 찾는 두 분께 인망 있고, 덕이 높으며, 인자하면서도 강력한 새 주군을 소개해 주겠소.”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도 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톤 자작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크게 술렁였다. 하지만 톤 자작과 사람들의 반응은 확연하게 달랐다.

톤 자작의 반응이 당혹과 놀람에서 나왔다면, 좌중의 반응은 재미, 재미 그리고 재미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드는 더욱 반짝거리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을 보고는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 내가 준비한 연극이 마음에 들었나 봐. 반응들을 보면 대박 흥행하겠어.”

“흥행은 모르겠고, 별점 테러에 악평할 사람 하나는 확실하게 나왔네요. 표정 관리 안 되는 것 봐요.”

라미아의 말대로 톤 자작의 얼굴에 은은하게 비치던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똥이라도 씹은 듯 홀쭉한 볼이 씰룩거렸다.

그 얼굴을 마주한 스윔 남작이 말했다.

“보고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자작님이 기사들을 내놓음으로써 할 일이 끝난 것처럼, 저도 이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내놓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할

뿐입니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결국 두 사람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은근히 자작을 내리깔아 보는 스윔 남작의 눈에는 남모를 통쾌함이 감돌고 있었다.

‘상대를 몰아가는 짓을 당신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지.’

스윔 남작은 동의를 구하듯 주변 가득 모여선 사람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말했다.

“두 기사의 뛰어남에 반한 것은 사실이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두 사람의 충성을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저의 모자람을 채울 만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스윔 남작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등을 쫓던 사람들은 곧 그가 향하는 방향 끝에 있는 이드를 보고는 기묘한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허. 바벨의 감찰관이라니! 하긴, 사건의 당사자 중 하나긴 하지.’

“그런데, 바벨의 감찰관이 기사를 둘 수 있나?”

“모르지요. 그보다 바벨에 기사가 들어갈 수는 있는 겁니까?”

“들어갈 수 있지. 바벨의 기사는 하나같이 뛰어나기로 유명하지 않나. 어쩌면 저 여자들에겐 이게 도리어 멋진 기회가 되겠어.”

굳이 자신들의 궁금증을 숨기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윔 남작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는 이드 앞에 멈춰 서서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날 파티에서 저와 함께 보일런 공자의 모욕적인 언사를 함께 들으셨던 바벨의 감찰관을 두 분에게 소개하려 합니다. 바벨의 그늘이라면 모자란 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자, 에단 님?”

말을 마친 스윔 남작이 자신을 향한 시선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졌다.

이드는 그를 대신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톤 자작은 머리가 아파 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드는 바인과 해쉬 앞으로 다가서서 물었다.

“결정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에단 님을 따라 카논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단 님을 모시겠습니다.”

“저 또한 해쉬와 같습니다.

이 정도면 지금 당장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몇 시간 만에 앞으로 인생을 좌우할 선택을 내놓으라는 건 애초에 무리한 요구일 테니까.

이드는 단음강막의 존재도 모르고 애써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는 선언하듯 말했다.

“복잡한 말은 빼고, 여기 자리한 분들이 가장 궁금해할 대답부터 드리도록 하죠. 우리 바벨은 두 사람을 기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짝,

짝짝짝짝.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박수가 환호와 함께 사방에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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