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96화
1231화
열의를 불태우는 기사들이 뿜어낸 열기.
향긋하고 따뜻한 차와 창을 넘어온 기분 좋은 햇살.
분명 조금 전까지는 훈기가 돌던 접객실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하아~
입에서 뿜어지는 숨이 하얗다. 분명 냉기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데, 뒤통수가 서늘하고 스산한 기분이 든다.
“검후님?”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쉴라가 앞을 막아서려 하자 검후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스케스틱 님이야. 우릴 향한 것도 아니고. 그렇죠?”
이드는 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피어 때문입니다, 쉴라 경.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이것이… 드래곤 피어.”
드래곤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능력 중 하나.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쉴라는 신기해하면서도 여전히 표정을 풀지 못했다. 새로운 경험이긴 하지만, 이것이 자신 또는 자신이 충성을 바친 검후를 향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드가 알았다면 괜한 심력 낭비하지 말라고 말렸을 일.
하지만 지금 이드는 쉴라가 아닌 라울을 살피는 중이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던 라울은 어느새 뒷걸음질을 멈추고 초인력을 끌어 올려 드래곤 피어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라울의 눈이 라이트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환하게 빛났고, 그의 몸에도 은은한 금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평소처럼 능글거리는 여유도 부리지 못하고, 꼭꼭 숨겨 둔 전력을 일부나마 끄집어낸 상태랄까.
‘그러게 왜 드래곤을 상대로 도발을 하냐고. 그것도 되지도 않는 어설픈 도발을.’
실수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이 모습이 그 도발의 결과다.
이드는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물론 그뿐이다. 먼저 나서 스케스틱의 드래곤 피어를 멈춰 줄 생각 같은 건 1도 없는 이드였다.
크게 한번 데여 봐야 드래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고 조심을 하지.
‘라울 같은 인간은 빈틈이 있다 싶으면 계속 찔러 보려고 한단 말이지. 이번 기회에 그 버릇을 좀 고치면 좋잖아?’
결코 라울이 골탕을 먹는 게 즐거워 이러는 것이 아니다.
“스케스틱 님, 최대한 오래 좀 부탁드려요~”
뭐, 검후의 생각은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검후였지만, 라울은 그녀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물론 알았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과연…… 이것이 드래곤이라는 존재인가!’
이 순간, 라울의 눈에는 더 이상 접객실이 들어오지 않았다. 스케스틱의 모습도 없었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에메랄드로 깎아 놓은 듯한 거대한 드래곤 뿐이었다.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두 가지 반응이 비슷해 보여도 근본 원인은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현재 라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생존 본능이 깨어나 눈앞의 존재를 향해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한껏 경계하다 작은 변화라도 있다면 즉시 대응하기 위해서.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눈앞에 있는 이 거대한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매우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었으니까.
다만 신기한 점도 있었는데, 분명 인간의 형상이었던 스케스틱이 어째서 자신의 눈에는 드래곤으로 보이는가 하는 점이었다. 접객실에는 그럴 공간도 없을 터인데.
본능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에도 머리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따졌다.
파아앗!
라울의 초인기 골든아이의 출력이 올라가는 순간.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게 만드는 드래곤의 모습이 투명해지고, 그 뒤에 서 있는 흐릿한 그림자가 비쳤다.
‘이것도 드래곤의 권능이란 놈인가. 그나저나,조사한 것 이상으로 굉장하군.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골든아이를 모두 열었음에도, 감추고 있는 모습을 온전히 보기 힘들었다. 라울에게 있어 이런 경험은 결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비밀은 그의 초인기 앞에 진실을 드러냈었다. 그런데 눈앞의 드래곤은 어떤가.
비밀은커녕 그 본신의 모습조차 꿰뚫어 보기 힘들었다. 그저 골든아이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계측 수치가 최고치를 찍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파악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건 상대가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다.
골든아이. 자신의 초인기가 제대로 담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드래곤이고, 스케스틱이었다.
‘내 골든아이의 시야에서 벗어난 다섯 번째 존재인가.’
첫 번째는 당연히 현 바벨의 마스터다. 동시에 자신의 주군.
두 번째는 바벨의 인간이다. 자신과 같은 주군을 모시는 바벨의 간부.
세 번째가 검후다. 검후의 경우는 좀 애매하긴 하다. 그녀의 측정값이 허용치 한계에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인데, 어쨌든 측정값이 흔들리니까. 그리고 네 번째가 바로 이드다. 아니, 이드 일가다.
이드는 물론이고, 그의 두 부인도 골든아이로는 견적이 나오지 않는 괴물들이다. 물론 셋 중 가장 괴물은 이드다.
다른 사람의 경우 대충 저 위치쯤이 아닐까 하는 견적이라도 나온다면, 이드의 경우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닷속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한 느낌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드를 직접 만난 라울이 어떻게든 그와 거리를 줄여 보고자 애를 쓰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지금.
골든아이가 가진바 능력치를 다 담지 못하는 다섯 번째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패배를 인정하는 일과도 같았다. 하나 이런 판단에 있어 라울은 서슴없었다.
어차피 이런 경우가 한두 번도 아니었고 말이다.
또 말이 다섯 번째지, 라미아와 일리나까지 넣으면 일곱 번째다. 그리고 멀지 않아 이런 존재가 수십, 수백으로 늘어나리라.
아무렴 스케스틱만 특별할까. 저이처럼 거의 모든 드래곤이 골든아이로 재단하기 힘든 존재일 것이다.
거기에 아직 담지 못한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들까지.
‘이러니 내가 너무 약골처럼 보이잖아. 짜증 나게.’
아무리 현실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다. 메인스트림에서 점점 밀려나는 기분이랄까.
대신 덕분에 확신이 생겼다.
‘스케스틱. 이 존재는 진짜 드래곤이다.’
저택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 가닥 남아 있던 의심마저 말끔히 사라졌다. 그 누구보다 ‘본다’는 능력에 자신 있는 만큼,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바벨로서는 이득이었다.
아나크렌 제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나 세력보다 먼저 드래곤과 접촉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이제 자신이 나서 바벨과 저들 드래곤 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쌓아 나가면 될 일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대치 상황이 끝나야겠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인 거지.’
시작은 자신이 먼저였음은 잘 인지하고 있는 라울이다. 엉뚱한 화풀이를 할 생각은 없다. 대신 한 가지, 마음에 싹트는 확신이 하나 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상상 이상으로 쪼잔하다는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딱히 공격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압박만 가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걸 해결할 방법은 간단하다.
“후~ 읍. 바벨의 라울이 위대한 존재께 무례한 실수를 저지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자존심 싸움이란, 패배를 인정하면 간단히 끝난다. 자신의 자존심을 굽힐 용기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라울에게 그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강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기 때문이다. 상대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멍청한 짓이라는 게 라울의 평소 지론이었다.
이런 라울의 판단이 효과가 있었을까.
‘위압이란 이런 것이다’를 온몸으로 보여 주던 드래곤의 입이 쩌억 열렸다. 순간 현실이 아님에도 살을 태우는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휘감고 지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벨의 라울이여, 그대의 용서를 받도록 하지.”
쪼잔하게 압박해 오던 것과 달리 높낮이 없이 지극히 냉정한 목소리가 들리고,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이 사라졌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자연체로 서 있는 스케스틱의 모습.
“위대한 존재께 바벨의 라울이 인사드립니다.”
그제야 상대와 두 눈을 마주친 라울이 가슴에 손을 대며 예를 표했다.
“바벨의 라울이여. 그대는 바벨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
“무엇이…… 알고 싶으신 것입니까?”
바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일까. 라울의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다른 뜻은 없다. 내가 초인을 보는 것은 그대가 처음이다. 그렇기에 초인이라는 존재에 알고 싶어 물었을 뿐이다. 그대는 전력으로서 바벨에서 어떤 위치인가.”
재차 질문을 던지는 스케스틱에 라울의 눈이 이드를 향했다.
이드는 별거 아니라는 듯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스틱의 질문은 순수하게 그의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였다.
간단히 말해 너는 얼마나 잘 싸우냐는 질문이고, 그걸 통해 바벨의 전력을 가능하겠다는 의미인데.
라울은 극히 짧은 순간 몇 가지 시나리오를 짜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같은 조직에 속한 이들로서 정확한 우열을 가리긴 힘든 점.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부분을 염두에 주십사 말씀을 먼저 드리고 답을 드린다면, 저는 바벨에서 10위에서 20위 사이 정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흥, 10위에서 20위 사이라고? 헛소리도 정도껏 하는 것이 어때.”
그리고 이런 라울의 대답에 스케스틱 보다 검후가 먼저 콧방귀를 날리며 반응했다. 어디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느냐는 의미다. 그에 라울이 대번에 억울한 표정을 하고서는 말했다.
“정말입니다. 검후. 제가 바벨의 중직을 맡은 것은 능력의 특성 때문이지, 제 전투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 공격을 막았던 것은 누구지?”
“그거야・・・・・・ 검후께서 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가 아닙니까. 검후의 전력이 온전했다면 제가 낭패를 봤을 겁니다.”
“저…… 흥!”
어떻게 봐도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라울에 검후는 발끈하더니 획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을 해 봤자,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장 바벨의 간부들을 불러올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무엇보다 스케스틱에게 라울의 바벨에서 몇 위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라울을 다시 한번 바라본 후 말했다.
“초인 중 강자라고 하는 자가 이 정도 전력이라면,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과연 쓸모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푸훗.”
대놓고 초인의 자존심을 뭉개는 발언에,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어필했던 라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대로 검후는 웃음을 참기 힘든 얼굴이다.
그리고 이드는 그 사이에서 가만히 눈만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