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15화
1250화
타란 백작은 차마 차오르는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 놓지는 못했다.
지금의 임무가 림몬에서 내려진 결정이며, 왕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 내려진 명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더욱이 현재 자신은 쉬이 의문을 가지거나 불만을 비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검후의 수도 이송 실패와 쉐어 가든의 붕괴.
이 두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억울한 일이었다. 당시 이드와 메르시오가 싸우던 쉐어 가든의 상황은 타란 백작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사태. 그야말로 자연재해 같은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실은 보고를 통해 듣고, 마법을 통해 확인한 왕과 대신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골적으로 타란 백작을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목소리 높이는 이가 없을 뿐. 분위기는 또 달랐다.
실패가 발생한 만큼,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검후를 놓친 게 컸다.
탈출에 성공한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무슨 말을 할까.
물론 그녀를 감금하고 있던 건 바벨이다. 그러나 그녀가 감금되어 있던 곳은 마스의 땅. 이는 분명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막말로 몰랐다고 잡아떼는 것조차 체면을 깎아 먹는 일이었다. 자국에 검후가 감금되어 있음에도 그 사실을 몰랐다니. 국제적으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덕분에 이미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관계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차라리 검후의 존재를 계속 몰랐으면 좋았을 거라고. 어설프게 욕심을 낸 것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이다.
좌우간. 이런 문제에 더해, 쉐어 가든의 붕괴에 발생한 다수의 사상자까지.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여든 목소리가 느릿하게 향한 곳이 바로 타란 백작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의 임무였다. 그야말로 정치적인 필요에 의한 책임 돌리기였다.
타란 백작은 지인들을 통해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게 그가 알고 있던 정치이기도 했으니까.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백의종군하는 것. 내려진 명령에 충실히 따라 공을 쌓을 뿐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당장 타란 백작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 불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하나 그런 그를 상대하는 이더비히는 시종일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즉시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하지요.’
“그럼 미안하지만 부탁드리겠소, 부관주.”
베나이온 자작은 사과의 말을 하면서도 정중히 요청했다.
기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관주가 직접 마중을 나왔거늘, 다른 것 다 치우고 용건부터 꺼내는 게 예의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급히 요청한 까닭은, 타란 백작도 백작이지만 본인부터가 방문 용건이 가장 시급한 사안이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백작이 현 상황에 불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이쪽도 상황을 좋게만 보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왕과 대신들은 아나크렌과의 전쟁까지 각오하고 미완의 마탑을 품에 안았다.
이미 결정이 난 일이지만, 타란 백작처럼 그에 대한 불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이런 목소리는 안티로스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 후 마탑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더 커졌다.
과연 미완의 마탑에 전쟁을 각오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의혹을 말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마탑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이들까지 이 점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한 인물이 바로 타란 백작이었다.
그는 직접 블레인 영지를 찾아 초인 마법을 확인했고, 그 장단점을 파악해 보고했다. 그걸 본 왕과 대신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환희했다.
정신의 관 토벌을 통해 초인 마법의 가능성을 보고, 과감히 손을 잡기는 했다. 하나 그 결과가 이렇게 빠르게 나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초인 마법을 확인한 마스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영혼의 관에 접근하는 추적조와 검왕을 습격하고, 그 앞을 막아섰다.
제국의 요청과 항의에는 궤변으로 대응했으며, 자국에서 벌어지는 토벌에 대해 단호히 반대의 뜻을 보였다.
제국이 마스의 땅을 밟는 순간 전쟁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무리 마스라도 제국과의 전쟁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인 마법의 존재가 그 결정을 쉽게 만들었다.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군은 물론, 적초인 전력까지 원하는 대로 손에 넣고 주무를 방법이 생겼다. 초인 한정이지만 나는 강해지고, 적은 약해진다. 전력이 몇 배로 늘고, 사용 시점에 따라 몇 번이고 판세를 뒤집을 수도 있다.
설령 그 상대가 거대한 힘을 가진 제국이라고 해도.
이런 무기를 가졌으니, 당연히 만용을 부려 볼 만하다. 하나 그런 중에도 몇몇은 좀 더 확실한 것을 원했다. 타란 백작이 지적한 단점이 수정되길 원했고, 객관성을 위해 베나이온 자작도 보내졌다.
다름 아닌 블레인 자작령 안에 있는 영혼의 관으로 말이다.
이번 방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순히 단점의 보완뿐이라면 전날과 같이 야산에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영혼의 관을 방문했다. 그건 마스에서 영혼의 관을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간단히 말해 탐이 난다는 것.
이런 마스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더비히는 안내를 자처했다.
“제가 안내하지요.”
“부관주가 직접 말이오?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소.’
“저희 마탑을 찾아 주신 귀빈분들의 대접에 소홀할 수야 있나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거 참,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지요. 부탁드리겠소.’
“그럼 이리로.”
이더비히가 앞장섰다. 힘찬 발걸음에 풍성한 치마가 물결쳤다.
보통의 마법사들처럼 로브를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저택을 자랑하는 귀부인처럼 품위 있어 보였다.
베나이온 자작이 그 독특한 분위기에 눈을 빼앗겼을 때였다.
“세 가지였지요?”
“무엇이 말입니까?”
“개선 사항 말입니다. 타란 백작께서 요청하셨던.”
“그렇소. 각각 마법의 발동 속도, 들쭉날쭉한 위력, 대상이 된 기사의 적응 문제. 이 세 가지였소. 솔직히, 의심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오.”
“백작님, 말씀이……………..”
대놓고 의심하고 있다고 말하는 타란 백작. 그에 베나이온 자작이 곤란한 듯 나섰지만, 타란 백작은 그를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검법 초식 하나를 수정하기도 쉽지 않은데. 마법을 보완하는 일이 그보다 쉽지는 않을 것 아니겠소. 그것도 이전에 없던 마법을 말이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해냈습니다. 우리의 탑주께서 그 방법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약간의 시간이었지요. 지금부터 두 분께 그분이 만들어 내신 기적 같은 결과를 확인시켜 드릴 것이고, 두 분은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 부디 그랬으면 좋겠소.”
기대한다는 타란 백작의 말에는 어쩐지 날이 서 있다.
어색한 분위기에 말이 끊겼다. 세 사람은 다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드디어 길고 긴 복도가 끝이 나고, 갑자기 시야가 넓어졌다.
그곳에는 바닥에 깔린 검은 돌 위로,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네로, 준비는 끝났나요?”
“언제든 발동이 가능하게 준비했습니다, 부관주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란 백작님.”
“그대로군, 처음 초인 마법을 시연했던 마법사.”
타란 백작이 이전에 만났던 두네로를 알아봤다. 두네로는 별로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제법 기억에 남는 일을 해 주었으니까. 그때 그대가 그랬었지. 수일 안으로 개선될 부분은 개선될 거라고. 그대의 장담대로 되려는 모양이야.”
이렇게 다시 자네를 마주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
자신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말인데, 어째 묘하게 듣기 불편하다.
그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두네로를 구해 주려는 듯 이더비히가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시작하세요.’
“네!”
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마법진 중심으로 걸어 들어가는 두네로를 시작으로, 마법사들이 바쁘게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갔다. 직접 마법 발동에 관여하지 않는 마법사들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란 백작이 말했다.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마법사들이 많아진 듯하오만?”
“옳게 보셨습니다. 요구하신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입니다.”
“괜찮은 것이오?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저만한 수의 마법사들이 필요하다는 건……”
전쟁에서 마법이 필요한 건 한두 군데가 아닐 터였다.
주요 거점은 물론이고, 넓은 국경 곳곳에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건 둘째치고, 마법의 발동을 위해서 역시 마법사들이 필요한데, 그들이 그렇게 흔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더욱이 초인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는 마법사는 미완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뿐이다.
“그 부분도 조만간 개선될 겁니다.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더비히의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타란 백작은 뭐라 말을 하고 싶은 듯했지만, 우선 참았다. 불만은 이번에 단점이 얼마나 보완되었는지를 본 후 터뜨려도 늦지 않으니까.
“그럼 대 초인기 조율 마법을 발동하겠습니다. 발동!”
시동어를 외치는 두네로를 시작으로, 마법사들이 차례대로 마법진에 마나를 주입했다.
부우우우-
그러자 실험실 전체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옅게 빛나며 진동했다. 동시에 바닥에 설치된 마법진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커튼처럼 일렁인다. 마법의 준비가 끝나자 곧장 초인 기사들이 투입되었다.
이전처럼 편을 나누어 아군과 적군의 역할을 맡은 기사들이 검을 마주했을 때, 초인 마법이 그들을 휘감았다.
“흡!”
“허억!”
흔들리는 호흡 뒤로 반응이 극명히 엇갈렸다.
아군의 역을 맡은 초인 기사들은 호흡이 흔들리고 잠시 주춤했지만, 여전히 단단히 검을 들고 섰다.
그에 비해 적군의 역을 맡은 기사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는가 하면, 몇은 크게 휘청이며 검을 놓치기도 했다.
이전과는 비슷하면서도 크게 달라진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타란 백작이 시큼털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